< 빨리 넘겨버립시다 >
심 사장과 나는 자동차에 올랐다.
태성화학 공장으로 가는 길.
심 사장은 운전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요구하신 일을 전부 수행하고 왔습니다.”
귀찮은 질문을 피하고자 도망쳐 왔다는 심 사장이 비공식적인 임원 회의에 굳이 참석했던 까닭이었다.
“먼저 회장님의 허락하에 태성화학 인수인계에 관한 전권을 얻어왔습니다.”
“잘하셨어요.”
“도련님께서 예측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회장님께서 남기신 당부마저 똑같더군요.”
심 사장은 씩 웃었다.
“미련 두지 말고, 질질 끌지 말고, 깔끔하게 확실하게 넘겨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우광과의 혼사를 물리는 대가로 태성화학을 양보하기로 하셨다.
질질 끌며 진상을 부려봐야 할아버지의 체면에 흠만 갈 뿐 좋을 일은 없다.
“할아버지가 우광의 김 회장님에게 태성화학을 정리하자고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세요?”
“지분을 정리하자고 하셨었죠.”
송년의 밤에서 할아버지가 말했었다.
-어떻게 할래? 내가 지분을 넘길 테니 네가 태성화학을 가질래, 아니면 나한테 지분을 넘기고 돈으로 받을래?
-네 회사도 내 아들 덕분에 숨통 트이게 생겼다. 우광은 철강 사업 때문에 여태 적자만 보고 있어서 돈이 궁했잖아.
-사업 정리엔 시간이 필요하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라. 이미 결론이 난 일이야. 상황이 바뀌면 입장도 바뀌니까 협상은 빠를수록 네게 유리할 거다.
태성화학은 우광과 태성이 공동 출자 해서 지분을 반반씩 나눠 가진 회사다.
“우광이 회사를 건네받고 싶다면 할아버지의 지분을 사들여야 해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분을 사갈 겁니다.”
태성화학은 실적이 꽤 좋은 알짜배기 회사였으니까.
“무려 300억짜리 회사를 간단하게 가져올 기회가 왔는데, 우광이 놓칠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광은 철강 사업의 적자 때문에 현금을 동원할 여력이 없어요.”
우광건설이 요즘 아파트 분양으로 제법 목돈을 벌어들였다지만, 150억을 내놓기엔 택도 없다.
“우광은 이미 은행 대출도 풀로 당겨 받았고, 사채도 만만치 않게 쓰고 있는 상태예요. 여기서 어떻게 150억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회사가 탐나면 어음이라도 발행할 겁니다.”
“누가 어음을 150억이나 받아준대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우광이 양심도 없게 어음을 150억이나 달아두려고 하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인데.
이 양반 사채에 안 데여보셨구만?
“조건을 조율하다 보면 협상이 지지부진해지고, 한 해 두 해를 넘기게 될 거예요. 심 사장님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시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태성화학의 경영권은 우리 태성에게 있으니까요.”
“득보다 실이 많아요.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직원들 사기는 떨어질 테고, 사사건건 우광의 간섭을 받게 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왕 넘길 거면 빨리 넘겨버리세요. 대신 재인수 협상에 집중하세요.”
“재인수 협상··· 말입니까?”
“태성화학을 되찾아오기로 했잖아요. 약속대로 일단 넘기고 재인수 해야죠. 별수 있어요?”
“잠깐만요, 도련님. 태성화학을 되찾아 온다는 게 지분 인수가 아니라 재인수였단 말입니까?”
“다시 묻겠어요. 우광이 태성에 지분을 넘겨주려고 할까요, 회사를 받아내려고 할까요?”
“그야 당연히······ 알짜배기인 태성화학을 가져가려고 하겠죠. 아, 그렇군요. 애초에 지분 인수로 태성화학을 되찾아 오겠다는 건 제 희망사항일 뿐이었군요.”
우광이 지분을 넘기겠다고 나오면 얼른 '땡큐!' 하고 거둬갈 수 있다.
우리에겐 지하 금융계의 거물들에게서 뜯어낸 투자금 덕분에 현금이 아주 넉넉하거든.
하지만 우광의 김 회장이라면 체면과 보복 때문에라도 아득바득 태성화학을 가지려 들 터였다.
태성화학은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회사라서 장기적으로 봐도 회사를 가져가는 쪽이 남는 장사이기도 하고.
‘사실 내가 준비하려던 재협상 카드는 따로 있었지만.’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해서.
뒷골목에서 주로 쓰던 방법은 잠시 미뤄둘 생각이다.
내가 태성가에 들어간 이상 조금 더 재벌다운,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보려고.
“도련님은 우광이 태성화학 재인수 협상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이에요.”
내가 태성화학 심 사장에게 태성화학 인수에 관한 전권을 얻어내라 요구한 이유였다.
나는 동전 지갑에서 곱게 잘 접은 종이를 꺼내 건넸다.
“넘겨야 할 것은 빨리 넘겨버리는 대신 M&A 계약서에 특약사항만큼은 반드시 달아둬야 해요.”
“이건 뭡니까?”
심 사장은 백미러로 힐끔 보았다.
“설마 그 동전 지갑에서 M&A 계약서까지 나오는 건 아니겠죠?”
“그 두꺼운 서류를 어떻게 여기 집어넣어요? 이건 특약에 반드시 집어넣어야 할 조항을 추려온 거예요.”
내가 건넨 종이에는 몇 줄밖에 안 적혀 있다.
<1개월 만기, 3개월 만기, 6개월 만기, 1년 만기 어음을 각각 25%로 한다.>
<만기까지 어음을 완납하지 못할 경우 어음 비율에 따라 지분을 넘기는 것으로 갈음한다.>
<만일 어음 결제를 포기하고 태성화학 재인수 협상을 요구할 시 사채시장의 룰에 따른다.>
<재인수 협상엔 지분 비율 조정은 없다. 오직 가격 협상만 가능할 뿐이다.>
<지분 정리가 끝나기 전까지 태성은 우선협상권을 가진다.>
마침 신호에 걸렸다.
“허, 이런 범상치 않은 어휘력부터 진짜······!”
특약사항을 읽어내린 심 사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우광은 법무팀을 대동해서 물고 늘어질 겁니다. 재인수 협상 조건이 태성에 워낙 유리해서 말입니다.”
“이 조항을 거는 대신 태성화학을 3일 내에 넘겨준다고 하면요?”
“네?”
재인수 협상 조건이 태성에 유리하다면 인수 협상 조건은 우광에게 유리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어차피 우광에게 넘겨주기로 이야기 끝난 일이니 미련 둘 것도 없다.
“방금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며칠 내에 넘겨줘요?”
“3일이요.”
“사, 삼 일? 삼 이이이일?”
심 사장이 다다다 쏘아대려는 찰나, 출발 신호가 터졌다.
심 사장은 끙 소리와 함께 운전에 집중해야만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도 허락한 일이라면서요. 뭐가 문제예요?”
“그것부터가 문제입니다! 300억짜리 회사를 어떻게 3일 만에 넘긴단 말입니까!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립니까!”
심 사장답지 않게 목청이 커졌다.
“설비와 재고를 뒤로 빼돌릴 시간조차 없잖습니까! 인수 준비 시간이 촉박할수록 태성은 손해만 잔뜩 보게 됩니다! 누구 좋으라고요!”
“심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우광 역시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겠죠?”
3일 만에 태성이 남기고 간 물자까지 전부 날로 먹을 수 있다는데, 우광으로선 놓치기 아까운 기회일 것이다.
“특약사항은 태성이 크게 양보하는 조건으로 재인수의 협상 여지를 남겨뒀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되잖아요.”
“우광이 그걸 믿겠습니까? 그 협상을 진행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전데요! 저 심원철입니다!”
“그러니까요. 태성화학이 날로 넘어가서 심 사장님 거취가 붕 떴다는 걸 우광이라고 모르겠어요? 내 알 바 아니라고, 태성 따위 망해버리라고 대놓고 말해버리세요.”
“억······!”
심 사장이 뒷목을 잡든 말든.
“3일 내로 인수 준비를 다 끝내려면 저 진짜 죽습니다! 과로로 돌연사할 겁니다!”
“인생 쉽게 사셔야지요. 그냥 나 몰라라 하세요. 배 째! 알았죠?”
“커억······!”
“귀찮은 인수인계 절차 따위는 전부 우광에게 떠넘겨 버리자고요.”
나라고 이게 무리한 일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내게는 태성화학을 빨리 넘겨버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태성화학 화재 사고.’
인재든, 안전사고든, 방화든, 천재지변이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고, 막을 수 있으면 막는 게 좋다.
하지만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네?
‘하늘이 도와서 태성화학에 화재 사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태성화학은 일찌감치 넘겨버리는 게 좋다. 우광을 옭아매어 늪으로 끌어내리는 건 돈으로도 할 수 있거든.’
고리대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어음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데.
그런 거 잘못 쓰면 줄도산을 면치 못한다.
이미 우광은 철강 산업에 발을 잘못 들여서 도미노 끝자락에 놓여있는 상태다.
‘150억에 달하는 태성화학 지분이라면 도미노 끝을 밀어 넘어뜨리기에 충분하지.’
심 사장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현재 공장에 남은 재고와 원재료만 해도 태성은 최소 억 단위 손해는 봐야 합니다. 그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충분히 공들일 만한 일입니다.”
“내가 태성화학 재인수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고 약속했죠?”
“······두 달입니다.”
“어차피 넘겨줘야 할 회사, 두 달이나 심 사장님이 굴러가며 귀한 시간 낭비해서 뭐 하게요? 우광더러 구르라고 해요. 아마 억 단위 이상의 이익을 얻었답시고 신나서 굴러다닐 걸요?”
나는 씩 웃었다.
“대신 우광을 재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일은 내가 맡을 게요.”
“······!”
“그러니 심 사장님은 인수 협상과 재협상만 맡아주세요. 간단하죠?”
“허······!”
심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안색은 붉으락푸르락했고, 입술만 요란하게 달싹거렸다.
하지만 입술을 곱씹을수록 희한하게 심 사장의 안색이 평온해지더니 급기야 헛웃음을 길게 토해냈다.
“허, 허허, 여덟 살짜리 도련님께서 우광을 재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일을 맡아···, 허허허허! 그게 말처럼 쉽게 된다면······ 허허허!”
두 번째 신호대기가 찾아왔을 때.
심 사장은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뱃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소리를 토해냈다.
“제가 어디 가서 멍청하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사는 편인데, 귀신에게 농락당하다 못해서 똥멍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 * *
차는 공업단지에 들어섰다.
“심 사장님, 태성화학 직원들의 거취 문제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아참, 3일짜리 인수 협상에 놀란 나머지 보고하는 것을 깜빡했군요. 성준 도련님과 그 문제 또한 이야기 끝냈습니다.”
집중했다.
아버지가 거부하면 태성화학의 식구들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테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준 도련님께서는 태성화학 인부들도 태성건설에서 받아주기로 하셨습니다.”
좋았어!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마침 태성건설에서도 공사 인부가 부족하게 된 상태잖아요.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제안이고요.”
“예, 태성화학 직원들은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 않아서 좋고, 태성건설은 부족한 인력을 충당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아버지는 지하철 2호선 공사뿐만 아니라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도로 확장과 상가 증축 공사를 따냈다.
거기에 태성건설 전(前) 임원들이 방치해 둔 국내 건설 공사가 잔뜩 밀렸고,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까지 완공해야 한다.
건설 공사에 투입할 인부가 부족할 지경이다.
그럴 때 태성화학 사람들이 들어온다니, 아버지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일 터였다.
“태성화학 공장에 간 김에 공장 직원들에게 이에 관해 말을 나눠볼 생각입니다.”
마침 우리가 탄 차는 태성화학 공장에 도착했다.
* * *
‘이럴 수가!’
태성화학 공장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새해 연휴인데 공장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네요?”
“재가동 비용이 상당히 커서 말입니다. 그래서 공회전을 감수하고 적당히 돌려두는 겁니다.”
공장 인부들도 제법 많아 보인다.
“연휴 수당이 꽤 큽니다. 잔업을 자처하는 인부들에게는 보너스와 성과금을 아주 듬뿍 지급하고 있거든요.”
새해 연휴까지 공장 일을 해야 한다니.
남 일은 아니었다.
나도 과거에는 저렇게 살았었다.
없는 사람들에겐 연휴도 사치였다.
[10일]
휴일까지 반납해가며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인부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재수 없는 글자.
저건 저승사자가 띄워놓은 황천길 카운트다운이었다.
그런 사람이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 빨리 넘겨버립시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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