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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75화 (75/189)

< 빨리 넘겨버립시다 (2) >

심 사장은 공장장과 몇 명의 작업반장들을 불러서 출근한 직원들을 공터에 모이도록 했다.

새해 연휴에도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직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공터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평일 아침 조회 시간도 아닌데 뜬금없이 전부 모이라고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태성화학이 넘어간다는 소리가 있더라고. 아마 그것 때문이지 않을까?”

“설마 구조조정? 우리 짤리는 거야?”

태성화학 직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걸어왔다.

심 사장은 확성기를 들었다.

“아, 아! 태성화학 가족분들께 알립니다! 저는 태성화학의 사장 심원철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급히 모이라고 전한 것은 회장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장님 소리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시간 관계상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태성화학을 조만간 우광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다양한 감정이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누군가는 길게 장탄식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체념의 한숨을, 누군가는 당혹성을 터뜨렸다.

“인수가 어쩌고 지분이 어쩌고 하는 말보다는 직장에서 잘리느냐 마느냐, 월급이 나오느냐 마느냐, 퇴직금을 받느냐 마느냐가 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심 사장의 말에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일이었고,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실직자가 되어버리면 당장 먹고사는 일부터가 곤란해질 터였으니까.

“태성은 가족을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비록 태성화학이란 회사는 우광에게 넘겨도, 태성의 가족들은 태성이 품어야지요!”

쑥덕거리던 음성이 뚝 멎었다.

다들 한 줄기 희망의 끈을 잡은 사람들처럼 집중했다.

“태성건설에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태성건설!”

“여러분, 요즘 태성건설이 확 바뀌었습니다! 전(前) 사장과 임원진이 한꺼번에 사퇴하면서 태성화학의 임원들이 그쪽으로 영전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성건설은 이번에 굵직한 국책 사업을 여럿 따냈습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를 우리 태성건설이 맡습니다!”

“오!”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상가 공사도 태성이 합니다! 중동에서 도시를 건설하고, 도로를 깔고, 아파트를 지을 겁니다!”

심 사장이 확성기에 대고 크게 외쳤다.

심 사장의 목청이 커질수록 태성화학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태성건설 사장님께서 약속한 게 있습니다! 태성건설 직원들을 위한 보금자리 지원 정책!”

내가 심 사장을 시켜 물어봤던 또 하나의 안건이었다.

“태성 아파트에 입주하길 희망하는 태성 가족을 위한 분양 물량을 따로 확보해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태성건설 전(前) 사장과 임원들이 나 몰라라 내팽개쳤던 아파트 공사를 아버지가 재개하기로 했다.

태성 아파트가 지어질 곳은 삼성동과 반포동.

제법 목 좋은 곳을 아파트 부지로 빼두었다.

“또한 사내 대출을 이용해서 아파트 대출을 지원할 계획이라 하셨습니다!”

은행 문턱이 높던 시절이었다.

제도권 금융이 제 역할을 다해내지 못하여 사채가 판을 치던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들 강남 아파트 분양 붐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현금이 없어서 아파트를 못 샀다.

마침 아버지가 아파트 분양 물량을 따로 빼두고, 사내 대출까지 지원한다니.

다들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파트! 아파트!”

“태성건설! 태성건설!”

심 사장은 웃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태성화학이 지원하던 모든 복지를 태성건설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나 더! 태성화학에서 일했던 경력과 호봉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와아!”

“또 하나 더! 중장비 교육도 무상으로 지원해주시겠답니다! 여러분, 기술이 곧 경쟁력입니다! 중장비 면허 하나만 있어도 어디 가서 굶진 않습니다!”

“맞습니다!”

태성화학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태성화학에 남아 우광과 함께 일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태성건설로 옮겨 태성의 식구로 남고 싶은 사람은 여기 서류에 이름을 적으십시오!”

심 사장은 종이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태성화학 직원들이 공터로 모이는 동안 짤막하게 만든 이직 동의서였다.

“태성은 여러분을 믿습니다! 태성은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그게 태성화학이든 태성건설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태성을 믿고 함께 해주십시오!”

“믿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태성화학 직원들은 휘파람을 불고 쩌렁쩌렁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직원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공장이 들썩일 정도였다.

기뻐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심 사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자, 서두릅시다! 머뭇대다가는 태성건설에 자리가 없어서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태성화학 인부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태성건설로 옮기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단상 옆에 줄지어 늘어선 테이블에서 작업반장들이 서류 작성을 도왔다.

심 사장은 단상에서 내려와 내게로 걸어왔다.

“이로써 걱정을 한시름 덜었군요. 도련님이라면 누구보다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공장을 둘러볼수록 마음이 진흙처럼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가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역시 보기에 영 안 좋지? 도로 지워주랴?]

저승사자에게 태성화학 화재 사고로 다칠 사람도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사람들 머리 위에 주황색 화살표를 띄워놨더라고.

대충 세어도 백 명이 넘는 주황색 화살표가 동동 떠다니는데, 착잡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화학물질이 주변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도 아니고, 안전 수칙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고.’

공장은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 태성화학 심 사장이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 사장님, 우리 제4공장 제1작업반은 전원 이직에 동의하여 서명 날인 끝냈습니다.”

태성화학에서 지급하는 작업용 점퍼를 입고 있는 30대 남자가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넸다.

“역시 김 반장이야. 자네가 이끄는 작업반이 빠릿빠릿하긴 해.”

심 사장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작업반 전원이 나왔었나? 다들 연휴에도 열심이군.”

“연휴 수당이 짭짤하잖습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번다고 다들 나왔더라고요.”

“딸은 좀 어떤가? 차도는 있고?”

“심 사장님 덕분에 사내 의료 보험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만, 휴우, 빨리 수술 일정이 잡혀야 할 텐데. 어렵네요.”

그의 점퍼에는 명찰이 오버로크로 박혀 있었다.

<김갑용>

철구 아저씨가 적어 내려갔던 진술서에 이름을 올렸던 바로 그 남자였다.

철구 아저씨가 김갑용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죽은 우광건설 김광필과 친분도 없으면서 몇 차례나 접촉했다는 점.

-둘째, 김광필의 주선으로 우광병원장과 독대했다는 점.

-셋째, 은행 대출과 사채까지 써야 할 만큼 병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렸다는 점.

-넷째, 태성생명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어두고 해약하지 않았다는 점.

철구 아저씨가 불순분자의 냄새를 맡은 이유였다.

‘그런데 왜 저 사람 머리 위에도 황천길 카운트다운이 떠 있는 거지?’

그의 머리 위에 또렷하게 적혀 있는 글자는 [10일].

그래서 의아했다.

‘보통 사고를 일으킨 사람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오기 마련인데. 철구 아저씨가 잘못 짚었나?’

그러고 보니 철구 아저씨는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다고 했었다.

-첫째, 죽은 김광필의 뇌물 장부에 김갑용의 이름이 없다는 점.

-둘째, 김갑용이 우광병원으로 옮겨 딸을 수술시키지 않았다는 점.

거기에 내 의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셋째, 김갑용의 머리 위에 황천길 카운트다운이 번쩍거린다는 점.

김갑용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심 사장님, 이 어린애는 누굽니까? 혹시 조카분이십니까?”

“차 회장님 손자분이야. 태성화학 공장을 둘러보고 싶으시다기에 내가 모시고 왔지.”

“회, 회장님 손자분이라고요?”

김갑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음, 공장 견학이라. 공장엔 위험한 것들이 많으니 아무거나 만지면 안 됩니다. 막 뛰어다니거나 술래잡기한다고 숨어도 안 됩니다. 또······.”

심 사장과 함께 왔는데도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김 비서를 데리고 오는 건데.

내가 못마땅한 눈으로 심 사장을 올려다보자 심 사장은 헛기침했다.

“김 반장, 자네더러 도련님 공장 안내를 부탁할 생각 없어. 도련님은 내가 모실 테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는 소리야.”

“아, 예. 꼭 제 딸을 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김갑용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순박하게 웃었다.

그의 순진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내게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태성화학에서 화재 사고가 나면 태성은 막대한 불이익을 보게 될 텐데.

철구 아저씨가 적은 갱지에선 똥빛이 아니라 황금빛이 났었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심 사장님, 김 반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믿음직하고, 의리 있고, 일 잘하고, 꼼꼼하고, 동료들 잘 챙기고. 어디 가서도 제 몫 이상으로 해내는 태성의 자랑스러운 일꾼입니다.”

심 사장의 평가가 후하다.

그런 칭찬을 면전에서 듣게 된 김 반장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믿고 맡겨주시는 만큼 앞으로도 태성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김갑용은 크게 외쳤다.

나는 장갑을 벗고 맨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예, 도련님.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갑용 역시 더러워진 목장갑을 벗고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순간 눈앞이 푸른빛으로 일렁거렸다.

‘어?’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일이었다.

바로 퇴원하는 날, 철구 아저씨의 지프차에서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만졌을 때.

나는 서빙고 물 고문실에 끌려가 취조당하는 철구 아저씨의 미래를 엿봤었다.

* * *

푸른빛이 일렁거리는 이곳.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곳곳에서 풍겼고, 간호사복을 입은 사람이 복도를 지나갔다.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태성병원!’

김갑용은 의사에게 사정했다.

“병원비는 어떻게든 마련해 오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대로 퇴원하라는 소리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원무과에서 밀린 병원비부터 수납하고 얘기하시죠.”

의사는 등을 돌려 걸어갔고, 김갑용은 재빨리 따라붙었다.

“이번 달 월급은 연휴 수당과 야근 수당까지 붙을 테니 제법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때까지만 사정을 좀······.”

“사정은 지금까지 충분히 봐 드린 것 같군요. 벌써 백만 원 가까이 밀렸으니까요.”

김갑용의 발걸음만큼이나 말이 빨라졌다.

“사채를 더 쓸 테니, 제발 치료는 멈추지 말아 주십시오. 애가 많이 아픕니다.”

“사채를 쓰든, 대출을 받든, 월급을 가불하든, 난 그런 건 모릅니다.”

의사는 가운 자락을 붙든 김갑용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내가 아는 건 병원비를 지불해야 치료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병원비를 내지 못하면 병실을 빼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병원의 기본 원칙이에요.”

“선생님!”

“병원이 자원봉사 하는 곳은 아니잖습니까?”

김갑용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의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는 다시 한번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생사람 목숨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태성은 한 가족이라면서요. 저도 태성에서 일합니다!”

“그 말은 원무과에서 하시고요. 다음 진료가 있어서, 그럼 전 이만.”

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김갑용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병원 복도에 기댔다

절망과 체념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빌어먹을!”

그런 김갑용에게 건들건들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어이, 듣자 하니 이달 월급으로 연휴 수당과 야근 수당까지 제법 많이 나온다고? 그걸 왜 내가 아니라 의사 양반에게 보고하시나?”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불광동 휘발유! 저놈이 왜 여기서 나와?’

악독하고 짜증 나게 쥐어짜기로 유명한 사채업자였다.

저놈은 남산 찰거머리에게 달라붙어서 평생 없는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곤 했다.

< 빨리 넘겨버립시다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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