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의 주인공 >
심 사장님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도련님께서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자네는 마음 푹 놓고 딸 치료에 전념하면 되겠군.”
“아······!”
김 반장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이런 걸 덥썩 받아도 될까요? 저 말고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러니까 제가······.”
김갑용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이···, 그러니까 저는···, 이런 행운을···, 아······.”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김갑용은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게, 미안하기도 하고, 면목이 없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또······.”
병원비 지원이란 소리에 기뻐하면서도, 괜히 눈치를 보고, 행여 번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그런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믿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제게······. 전 그리 잘나지도 않은 사람이고, 이런 행운을 거머쥘 자격도······.”
그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행운이 언제 자격 따져가면서 오던가요?”
사실 그런 건 염라대왕에게나 따져 물을 일이다.
나로 말하자면 왕년에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더럽게 박복하게 살아봤다구?
진짜 내 인생만 왜 이렇게 시궁창이냐고 하늘을 향해 원망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막상 죽어서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말하더라고.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라고.
‘당신이 사람들을 구하고 죽어서 저승에 갔다면 염라대왕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주셨겠냐마는. 그래도 살아서 가족이랑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게 낫잖습니까.’
당신의 행복을 도울 만한 작은 행운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챙겨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나 역시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공을 인정받고 금수저 물고 돌아왔거든.
돈은 이럴 때 쓰는 거라구?
“행운은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우연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자에게 찾아오는 필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김 반장님은 누구보다 태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면서요?”
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찍이서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긴 마찬가지였다.
머리 위에서 [10일] 혹은 주황색 화살표가 반짝거리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태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주세요. 정말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그는 태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동료들을 위해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지금 이 시점에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미 내가 알고, 저승사자가 알고, 하늘이 안다.
“내일 나랑 같이 태성병원에 가요. 병원장님께는 미리 말씀드려 놨어요.”
“도련님······.”
심 사장이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고맙다고 인사나 드리게. 도련님께서 많은 걸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예? 예! 감사합니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태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달란 말만 까먹지 않으면 돼. 알았나?”
“예? 예! 그래야죠! 네, 물론입니다!”
심 사장은 반쯤 넋이 나가 있는 김 반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성화학에서 열심히 일했던 것처럼 태성건설에서도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네. 여기 이 도련님은 태성건설 사장님의 자제분이거든.”
“태성건설에서도 열심히, 정말 죽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김 반장은 차렷 자세로 크게 외쳤다.
울먹임은 섞였을지언정, 부끄러움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다짐이었다.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 그러니까 머리 위에 [10일]이란 글자를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유독 크게 기뻐하며 달려왔다.
“잘됐습니다, 반장님!”
“이제 따님만 나으면 되겠군요!”
“봐요! 김 반장님이 열심히 일하는 거 위에서도 다 안다고 그랬죠?”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겁니다! 잘됐어요, 진짜 잘됐어요!”
그들은 활짝 웃으며 김갑용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목에 팔뚝을 걸고, 박수를 치고, 등을 팡팡 두드렸다.
김갑용은 싱글벙글 웃으며 동료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들이군. 동료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나는 뒷골목 세계에서 심성 비틀린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동료의 행운을 발견하면 칼부터 갈았다.
뜻밖의 횡재를 일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삭막하고 팍팍하고 서글프고 암담한 밑바닥 시궁창 인생이었다.
‘이거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는데?’
안 되겠다.
동전 지갑을 열지 않을 도리가 없구만!
나는 십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다섯 장을 꺼내 들었다.
“심 사장님, 새해 첫날부터 태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에요. 이걸로 막걸리와 안주라도 넉넉히 챙겨주세요.”
50만 원이라면 쇠고기 회식까지는 무리일지 몰라도 막걸리와 안주라면 다들 배 터지게 먹고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시절 짜장면이 300원, 장관 월급이 25만 원, 국무총리 월급이 35만 원이었으니까.
“하하하하! 역시 화끈하시군요! 좋습니다!”
심 사장이 목청껏 크게 외쳤다.
“태성화학 식구들, 오늘은 새해 첫날이고 하니 우리 조촐하게나마 회식합시다!”
회식 소리에 태성화학 직원들이 즉각 반응했다.
일터로 복귀하려던 사람들이 고개를 빼가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웬 회식?”
“열심히 일한 공장 식구들을 위해서 바로 여기 이분, 차 회장님의 막냇손자이신 정혁 도련님께서 한턱 크게 내시겠답니다!”
“정혁 도련님?”
“태성건설 사장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다들 막걸리와 안주를 든든하게 먹고 열심히 일합시다!”
“막걸리래!”
공장 전체가 떠나갈 듯 환호성을 울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삼겹살!”
“파전!”
“잔치국수!”
“소주는 안 됩니까?”
이거 안 되겠는데?
나는 동전 지갑을 다시 열었다.
지폐고 동전이고 전부 탈탈 털어줄 수밖에.
‘먹는 걸로 야박하게 굴면 쓰나.’
이럴 줄 알았다면 현금을 듬뿍 가지고 올 걸 그랬다.
나는 두 손을 모아서 동전 지갑에서 쏟아낸 지폐와 동전을 내밀었다.
“혹시 이것으로도 돈이 부족하다면······.”
“부족할 리가 있겠습니까? 도련님, 이건 도로 넣어두십시오.”
심 사장님은 내가 내미는 돈을 마다했다.
대신 양복 안주머니에서 본인의 지갑을 꺼내었다.
“설사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제 몫으로 남겨주십시오. 태성화학 식구들이 먹고 마시는데, 사장이 지갑을 안 열면 누가 열겠습니까. 하하하.”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심 사장도, 태성화학 직원들도, 김 반장도, 그의 동료들도.
희망과 행복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햇살 같은 웃음이었다.
심 사장의 눈동자에 비친 나도 활짝 웃고 있었다.
* * *
공장 공터에서는 테이블을 죽 늘어놓고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태성화학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제법 새해 연휴다워서 보기 좋았다.
작업반장들은 돌아다니면서 주의를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거 저녁 회식 아니야! 근무 중이란 거 잊지 말고! 막걸리는 적당히! 입술만 적시자고!”
“이 반장님도 얼른 앉아서 한잔 받으세요. 안주 식습니다.”
“어허! 자꾸 은근슬쩍 술 먹일 생각하지 말고! 안주나 많이 먹어! 안주빨이 최고야!”
“그러는 이 반장님은 아까부터 안주 나르느라 고기 한 점도 못 드셨으면서. 얼른 앉으시라니까요.”
“어허! 지금 공장 라인이 돌아가고 있는데, 한가하게 먹고 놀자 할 때가 아니라! 딱 한 잔만 따라 봐. 크흠흠! 삼겹살이 잘 익었네.”
“파전은 기가 막히게 잘 부쳤습니다. 잔치국수 국물이 진짜 끝내줍니다.”
“알아! 냄새부터가 죽여!”
나는 그 모습을 태성화학 사장실에서 내려다봤다.
창가가 잘 내려다보이도록 집무실 의자에 올라앉아서.
‘그래도 처음에 공장에 왔을 때보다 주황색 화살표가 많이 줄어서 다행이다.’
태성건설로 이직을 제안하길 잘한 것 같다.
아깐 새해 연휴인데도 불구하고 백여 명의 머리 위에 주황색 화살표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식겁했거든.
‘김갑용과 동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황천길 카운트다운도 없애고 싶은데.’
마침 공터에서 동료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서 웃고 떠들던 김갑용이 내 쪽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김갑용이 두 손을 크게 저으면서 활짝 웃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 언제나 도련님께 행운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김갑용의 머리 위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10일]이란 글자가 가슴에 콕 박혀왔다.
그의 옆에 앉아서 같이 음식을 먹던, 머리 위에서 [10일]이란 글자가 반짝이는 사람들도 나를 올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도련님, 잘 먹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 반장님을 도와주시기로 한 건 아주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자자, 도련님을 위해 축배를 들자고. 애기 도련님을 위하여!”
그들이 선창을 하자, 막걸리를 마시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싸구려 플라스틱 컵을 높이 들었다.
“위하여!”
나는 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그들에게 내어준 것은 고작해야 쌈짓돈이었다.
새해맞이를 핑계로 막걸리와 안주를 내어줬을 뿐이었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겼을 뿐이었다.
“태성을 위하여!”
“위하여!”
쩌렁쩌렁한 외침과 기분 좋은 웃음을 마주하기 민망해서 나는 의자를 뱅글 돌려 앉았다.
의자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들의 죽음까지 막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이 사고의 원인부터 파악해야 할 텐데.
‘태성화학 화재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는 못 봤다.’
우연한 안전사고인지, 누군가의 우발적인 범행인지, 치밀하게 사전 계획된 범행인지는 속단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장 중요한 것부터 따져보자.
심플하게 생각하자고.
그럼 결정은 간단해지지.
‘태성화학을 우광에 빨리 넘겨야겠군. 네 가지 이유로.’
첫째, 태성 측의 안전사고라면 인부들이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지.
둘째, 우연한 사고였다고 해도 사람 없는 공장에 설비 가동까지 멈추니 불날 일이 없을 것이고.
셋째, 태성을 노린 악의적인 범죄였어도 태성이 물러난 이상 강행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넷째, 그런데도 화재가 난다면 거기까진 내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고 볼 수밖에.
‘좋아. 고민 끝!’
나는 심 사장을 돌아봤다.
심 사장님은 집무실 책상에 서류를 산처럼 쌓아놓고 끙끙대고 있었다.
우광에 태성을 넘긴다니까 철제 캐비닛에서 꺼내온 서류가 이렇게 많더라고.
“심 사장님, 아까 말했던 태성화학 인수 계획이요. 그걸 조금 더 앞당겨야겠어요.”
“예?”
“생각해 보니까 3일도 길어요.”
심 사장은 경악했다.
아예 턱이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만년필을 쥐고 있던 심 사장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여, 여기서 더 줄일 것도 있습니까?”
줄여야 한다.
화재사고 당시 심 사장은 우광 인수단과 협상 테이블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3일 내로 끝내라고 했지만, 우광과의 협상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광 측에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니 옥신각신하느라 피곤해 보이더군.
“오늘부터 사흘 동안 꼬박 밤새워도 태성의 손해를 줄이기 어렵습니다.”
“그까짓 손해 좀 보면 어때요. 소탐대실이라고 했어요.”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공장이 폭발하는 것보다도 낫고.
“태성화학은 회장님께서 아버님을 위해 마련한 회사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미 중요한 서류는 전부 아빠에게 넘겨주셨잖아요.”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심 사장님이 맡고 있던 차명 주식도 넘겼고, 태성화학이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주식도 넘겼고, 비자금 장부도 넘겼고.”
“아직 남은 것이 좀 있습니다.”
“아, 일주일 내로 나머지 주식과 비자금 장부도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놓겠다고 약속하셨죠?”
“지금 그걸 처리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뒤탈이 없을 만큼 깨끗하게 세탁하려면······.”
“돈세탁이라면 마침 딱 좋은 곳이 있잖아요.”
나는 엄지로 나를 가리켰다.
“내 투자회사요.”
“아······!”
심 사장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탁 쳤다.
“그 방법이 있었군요!”
“인생 쉽게 살자니까요.”
“그럼 굳이 일주일이나 매달려서 어렵게 세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심 사장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서 한 움큼의 서류를 떼어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건 도련님의 몫으로······.”
“잊으셨어요?”
그럴 줄 알고 나는 동전 지갑에서 고용계약서를 꺼내 심 사장의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투자회사 바지 사장 자리를 맡아주시기로 했잖아요.”
“······.”
결국 그 일도 심 사장의 몫이란 소리였다.
“그걸 감안해도 일이 훨씬 간단해졌죠?”
“그렇긴 합니다만. 크흠! 아직도 일거리는 넘쳐 납니다. 조금이라도 태성이 손해를 덜 보려면······.”
“지금 당장 우광 본사에 쳐들어가서 우광그룹 총수와 담판 짓죠.”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자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네?”
심 사장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결론이 갑자기 왜 그렇게 튑니까? 잠깐만요, 도련님!”
< 행운의 주인공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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