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78화 (78/189)

< 우광과 담판 짓다 (1) >

심 사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태성화학은 무려 300억짜리 회사입니다! 이걸 3일 만에 넘기라는 요구도 황당한데, 뭐라고요? 오늘 내로 마무리하자고요? 우광의 김 회장님과 담판을 지어서?”

3일 내로 넘기나, 오늘 내로 넘기나.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태성화학 식구들도 태성건설로 옮기기로 했고. 비자금이나 주식마저 방금 심 사장님 몫으로 해결했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그것부터가 문제란 말입니다! 이런 무리수를 우광의 김 회장님이 잘도 받아주겠군요!”

“바로 그렇게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인 거죠!”

“허억!”

심 사장은 뒷목을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끼는 먹음직스러운 걸 흔들어야 하는 법이에요. 그래야 낚이죠. 안 그래요?”

“지금 우광의 김 회장님을 낚겠다는··· 허허허!”

“실무자들끼리 며칠 동안 머리 맞대고 실랑이해봐야 인수 협상은 지지부진할 거예요.”

“그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러니 내가 초강수를 둘 수밖에요.

심 사장님과 우광의 인수 협상단이 테이블에 앉아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제6 공장이 폭발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하, 이걸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도련님은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원래 인수 협상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이 걸리는 일이에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그룹 총수의 말 한마디면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단 소리죠.”

우리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태성화학이 하루아침에 우광에게 넘어가게 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차 키 들고 따라와요. 지금 당장 출발하죠.”

“지금 당장··· 말입니까?”

“말 나온 김에 가시죠.”

“도련님, 잠깐만요! 태성화학을 이렇게 날치기로 넘겨버린다면 차 회장님께서도 뒷목 잡고 쓰러지실 겁니다.”

“설마요. 할아버지는 이미 마음을 굳히셨어요. 결심이 서지 않은 건 심 사장님뿐이라고요.”

“······!”

우리 할아버지 별명이 화염 불도저랬다.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말 잊었어요? 미련 두지 말고, 질질 끌지 말고, 깔끔하게 확실하게 넘겨라!”

나는 심 사장의 주머니에 특약사항이 적힌 종이를 쑥 찔러 넣었다.

“할아버지에게서 태성화학 인수 협상에 관한 전권을 얻어내셨다면서요. 이럴 때 써야죠. 안 그래요?”

심 사장은 끙 소리를 내었다.

“도련님, 우광의 김 회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쉬워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까요.”

나는 코트 단추를 꼼꼼하게 채웠다.

목도리도 두르고, 털장갑도 꼈다.

“우광의 김 회장님이 솔깃할 만한 제안이 뭐가 있을까, 가는 동안 그거나 궁리하자고요.”

귀도리까지 착용하고 나니 외출 준비 끝!

“기어이 우광 본사에 쳐들어가겠다고요?”

“아, 새해 연휴라서 우광 본사에 출근 안 하셨으려나?”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럼 우광그룹 김 회장님 댁으로 가면 되겠네요.”

“도련님!”

사장실 밖 복도에서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벌컥!

태성화학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대뜸 문을 열었다.

기본 예의라는 노크조차 생략할 정도로 다급한 얼굴이었다.

“우, 우광의 김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댔는데.

집까지 쳐들어가지 않아도 되겠네?

원래 똥개도 자기 구역에서는 큰소리치는 법이다.

심 사장, 운이 좋구만!

“이 반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심 사장은 버럭 외쳤다.

“우광의 김 회장님이 새해부터 여긴 왜 찾아오겠어!”

“그게 계열사 시찰이라고······.”

태성은 새해에 계열사 임원들과 함께 떡국 먹으면서 임원 회의를 하는 모양이던데.

우광에서는 계열사 시찰을 다니나보네?

‘태성화학은 이제 우광의 것이라고 못 박겠다는 소리지?’

그러든가 말든가.

다시 생각해 봐도 운이 좋구만!

새해 첫날부터 무통보로 집에 쳐들어가 담판 짓는 무례를 면했잖아.

“인수 협상은 심 사장님의 몫이란 거, 기억하시죠?”

“서, 설마······!”

“오늘 내로 끝내라고 하늘이 밀어주나 보네요. 넉넉잡아서 3시간이면 되겠죠?”

“······세 시간이요?”

심 사장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날 돌아보았다.

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참고로 김 비서님 직속 수하였던 유 팀장님은 현무건설 오 사장님과의 담판을 3분 내에 끝냈답니다?”

“······?”

일개 계열사 사장과 우광그룹 총수란 체급 차이는 별거 아니란 소리였다.

“우광의 회장님을 밖에 오래 세워둘 수는 없죠. 얼른 가보셔야겠네요.”

“도련님은요?”

“저는 고작 여덟 살이에요. 300억짜리 회사의 인수 협상 자리에 낄 주제가 되나요.”

내가 열여덟만 되었어도!

“전화로 지원사격할게요. 그러니 전화나 잘 받으세요.”

“전화요?”

나는 방긋 웃으며 두 주먹을 들어 보였다.

“심 사장님, 그럼 파이팅!”

* * *

나는 사장실 옆 비서실에 들어갔다.

비서실장 자리에 앉으니 벽에 예쁘게 붙여놓은 메모지가 보인다.

사장실부터 거래처까지.

내선 및 외선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좋네!’

벽에는 전화번호가, 책상 위에는 전화기가,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할아버지 댁 전화번호까지 있지!

어머니의 수첩에 적혀 있던 번호를 잘 외워뒀거든.

‘진짜 안 되겠다 싶으면 할아버지를 호출하지 뭐. 우광의 김 회장과 담판 짓는 일이라면 당장 달려오실걸?’

이것 참 든든하구만!

딱!

나는 손가락을 부딪쳤다.

‘어이, 수호신!’

[그래.]

스르륵 연기처럼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아직이다. 우린 음력으로 치거든.]

‘그럼 새해 첫날도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않고 보내도 되겠네! 가랏!’

[······.]

나는 비서실 유리창 아래를 가리켰다.

‘우광그룹 김 회장이 왔다잖아. 뭐 하는지 좀 따라가 봐.’

[그러지.]

저승사자는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까 미래를 봤을 때처럼 푸른빛이 일렁거리지 않는 깨끗한 시야.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였다.

* * *

공장 공터에서 조촐하게 테이블을 붙여놓고 막걸리와 안주를 먹고 있던 태성화학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몇 명은 미어캣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쭉 빼어서 공장 쪽을 주시했다.

“누구지? 오늘은 연휴라서 저렇게 양복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방문할 일이 없는데.”

“아까 이 반장님이 알아보러 가신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안 오시지?”

“중요한 손님들이신가 보지.”

누군가 무릎을 탁 쳤다.

“혹시 차 회장님이랑 계열사 사장님들이 오신 거 아냐?”

“맞네! 심 사장님이랑 도련님도 왔잖아!”

태성화학 사람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쳤다.

“덕분에 막걸리랑 안주 잘 얻어먹었다고 감사 인사 드려야지.”

“앞으로 태성건설에서 잘 부탁한다고 미리 인사도 좀 드리고.”

그런데 막상 저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차 회장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짚은 롱코트의 노신사였다.

그 뒤를 경호원과 정장 차림의 관록 있게 생긴 중년인들이 따랐다.

태성화학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김 반장이 눈치를 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저기······ 혹시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분은 우광그룹 총수님이십니다. 우광 계열사 사장단과 함께 계열사 시찰 나오신 겁니다.”

“계, 계열사 시찰이요?”

김 반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경호원의 입에서 나온 단어마다 묵직하기 짝이 없었다.

태성화학 사람들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우광이 왜 여기에 시찰을 나옵니까?”

“여긴 태성화학이지, 우광의 계열사가 아닙니다!”

우광그룹 경호원은 피식 웃었다.

“소식이 어두운가 봅니다? 태성그룹 차 회장님께서 우광에게 태성화학을 넘기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만?”

“그러니까 아직은! 태성화학입니다!”

딱!

우광그룹 김 회장은 지팡이를 짚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가 태성화학 사람들을 슥 훑어보며 지나갔다.

“아무 말도 못 들었나?”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좌중을 찍어누르는 위압감은 덤이었다.

“여기 조만간 간판 바꿔 달고 우광화학이 될 예정이다. 그러니 계열사 시찰을 나와야지.”

“그러니까 아직은······!”

딱!

우광그룹 김 회장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짚었다.

항의하려던 작업반장 중 한 명은 그 박력에 밀려서 입을 다물었다.

“개판이군.”

좌중이 조용해졌다.

태성화학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뜸 쳐들어온 재벌 총수를 어찌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막아서지도 못했다.

‘방금 전에 심 사장에게서 태성화학을 우광에 넘길 것이란 말을 들었고, 태성건설로 이직하겠단 서명까지 끝냈으니까.’

말로만 들었을 때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막상 우광 쪽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태성화학은 자기네 계열사라고 선포하는 것이 주는 울림이 달랐을 터였다.

우광그룹 김 회장은 공장 공터에서 테이블을 붙여 마련한 막걸리 안주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근무 중에 술잔치를 벌여?”

태성화학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싸구려 플라스틱 컵도 은근슬쩍 내려놓고 나무젓가락도 등 뒤로 숨겼다.

“공장 라인을 가동시킨 채 인부들을 이렇게 놀려? 작업반장들은 뭐 하고 있었나? 임원들은 어디 갔고?”

싸늘한 일갈이었다.

“공장 참 잘 돌아가는군.”

우광의 김 회장은 슬쩍 눈짓했다.

“장 실장.”

“예, 회장님.”

장 실장이라고 불린 중년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구조조정 준비해. 이런 것들에게 공장을 맡길 순 없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태성이 직원 교육을 이리 난잡하게 시키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때 심 사장이 이 반장과 함께 공터에 들어섰다.

“구조조정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사장님!”

“이 사람들은 우리 태성의 식구들입니다! 태성에서 거둬가기로 말 끝났습니다!”

“태성이 거둬?”

“예, 이미 태성화학에 사표 냈으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우광의 김 회장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사표 쓴 놈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사표 쓴 김에 송별 파티를 열어줬다 칩시다.”

“쯧!”

김 회장은 혀를 찼다.

“차태성이 약속했던 일이다. 쓰레기 같은 회사를 내놓으면 곤란해.”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공장 엉망이고, 직원들 관리는 더 엉망이고, 재고와 원재료도 잔뜩 쌓였는데, 공장 라인은 내팽개쳐두고.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김 회장님을 찾아뵈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를?”

“예, 오늘 내로 태성화학 인수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뭐?”

우광의 김 회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늘 내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회장의 뒤를 따르고 있던 우광의 계열사 사장단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태성화학은 어림잡아도 300억짜리 회사라고 들었습니다만?”

“벌써 직원들 정리까지 끝냈다면···,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들 역시 계열사를 이끄는 사장들이기에 인수합병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안다.

양쪽 기업 간에 신경전과 물 밑 작업이 치열하게 오가는, 고단하고 복잡한 실랑이가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작심하고 ‘계열사 시찰’이란 명분을 앞세워 선전포고하러 온 참이었다.

“심 사장,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그게 가능하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루 만에 협상을 끝내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심 사장은 가슴을 쫙 폈다.

“차 회장님으로부터 태성화학 인수 협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 왔습니다!”

심 사장은 우광 김 회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히 마주 보며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공장의 원재료와 창고에 쌓아놓은 상품 및 거래처와 납품 계약까지 전부 넘겨드리겠습니다!”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콧방귀를 뀌었다.

“대충 훑어봐도 억 단위 양이던데. 원재료와 상품까지 전부 넘기겠다고?”

“거래처와 납품 계약까지 넘기겠다고 나와? 미치지 않고서야.”

“태성의 충신을 자처한다는 심원철이 우광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심원철,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무슨 꿍꿍이냐고!”

우광의 김 회장이 흥미로운 눈으로 심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김 회장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공장이나 구경하다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장실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인수 조건에 대해 찬찬히 들어보시겠습니까?”

인수 협상은 차 한잔 마실 시간 안에 끝낼 작정이란 뜻이었다.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할 김 회장이 아니었다.

심 사장의 패기만만한 도발에 김 회장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에스프레소 더블샷으로 하지.”

< 우광과 담판 짓다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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