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79화 (79/189)

< 우광과 담판 짓다 (2) >

저승사자는 태성화학 사장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저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인고? 기생처럼 화려하게 차려입고 와서는 뭔가 자꾸 짝짝 씹어대는데?]

‘아, 그거 다방 아가씨가 껌 씹는 거야.’

[껌? 그것참 신기한 물건이로군.]

사장실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태성화학 인수 조건을 논하자는 소리에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까지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일부러 심술을 부리려고 작정한 사람들처럼 저마다 요구하는 차가 가지각색이었다.

그래서 짜증 난 심 사장은 공장 근처 다방에 전화를 넣었다.

그게 바로 새해 첫날부터 다방 아가씨가 배달을 나오게 된 까닭이었다.

“커피 시키신 분~”

다방 아가씨가 껌을 짝짝 씹으면서 돌아보았다.

“크흠, 여기.”

“여기도.”

“이쪽도.”

다방 아가씨의 뒤태를 힐끔 살펴보던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이 손을 들었다.

보자기를 펼치자 장미꽃 그림이 그려진 양철 쟁반에 보온병과 커피통이 나왔다.

심 사장이 우광의 김 회장을 향해 정중하게 안내했다.

“이쪽부터 주문받으시죠. 에스프레소 더블샷이라는군요.”

“에스······ 뭐요?”

“에스프레소 더블샷. 이탈리아 스타일로 대접해 드리게.”

“그러니까 설탕이랑 프림은 얼마나?”

“없이. 양은 작게, 맛은 진하게, 아주아주 독한 커피로.”

“말 참 더럽게 어렵게 하시네요. 그냥 블랙커피 달란 소리잖아요?”

예쁘게 생긴 다방 아가씨가 껌을 짝짝 씹으면서 커피를 듬뿍 탔다.

무려 물 반 컵에 커피 다섯 스푼!

다방 아가씨는 우광의 김 회장에게 독한 블랙커피를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꼬우면 이태리에서 커피 배달시키든가요. 다음 손님?”

배짱 장사를 하는 다방 아가씨 덕분에 우광의 김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태성의 방식인가? 손님 대접 수준이 알 만하군.”

“비서도 출근 안 한 새해 연휴에 대충 보리차나 대접하는 대신 비싼 다방 커피를 시켜줬으면 성의 표시는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다방 아가씨에게 둘둘둘을 부탁한 심 사장은 싱긋 웃어 보였다.

“아마 태성이 준비한 인수 조건을 들으시면 성의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김 회장님은 오늘 땡잡으신 겁니다.”

“허세는 집어치워. 차 한 잔만 마시고 일어설 생각이니까.”

“이런. 인제 보니 소태같이 쓴 커피로 주문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심 사장은 달달하게 탄 밀크 커피를 홀짝거렸다.

“족히 세 시간은 마셔야 할 겁니다. 뜨거운 물은 공짜니까 잔뜩 부어 드셔도 좋습니다.”

“내 회가 동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내로 돌아봐야 할 계열사가 꽤 남았거든.”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가씨, 들었지? 세 시간 동안 이 사람들에게 커피 팔게 생겼는데. 배달은 안 밀렸나?”

“하나, 둘, 셋, 넷······ 마흔하나. 전화 한 통만 쓸게요. 마담 언니한테 배달 취소한다고 알려야겠네요?”

계산이 빠른 아가씨였다.

다방 아가씨는 신이 나서 커피를 탔다.

그렇게 본격적인 태성화학 인수 협상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 * *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창고에 쌓인 상품은 물론 재고품까지 그냥 넘기겠다는 말은 못 믿겠군요. 덤핑 조건부터 차근차근 따져볼까요?”

“거래처를 넘기겠다는 게 설마 연락처만 넘기고 끝내겠단 소리는 아니겠지요? 어음은 어떻게 처리하려고요?”

“원재료부터 수송차까지. 동산과 부동산은 어떻게 처분할 겁니까?”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 때마다 심 사장은 캐비닛에서 서류를 잔뜩 꺼내어 해당 발언의 계열사 사장에게 넘겼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넘깁니까? 구두로 요약해서 보고하세요.”

“설비 목록과 안전 점검 기록이 빠졌습니다만?”

“큰소리치는 것에 비해 협상 준비는 제대로 안 하셨나 봅니다?”

심 사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반박할 거리가 넘쳐 났다.

심 사장이 도저히 못 참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따르릉!

심 사장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귀찮은 인수인계 절차는 전부 우광의 몫으로 떠넘겨요. 궁금한 사람이 알아서 찾으라고 하시죠.

달칵.

심 사장은 길게 심호흡했다.

“태성이 양보한다는 말이 벌써 서른 번째입니다.”

그 말은 무려 서른 번이나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과 실랑이를 벌였다는 소리였다.

“궁금한 건 본인이 직접 여기서 찾아보십시오. 안 말리겠습니다.”

심 사장이 집무실 책상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우광이 계열사 사장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서류를 뒤졌다.

“이건 원재료 납품 내역서!”

“오, 어음 결산 장부도 있군!”

“태성샴푸 배합 비율 조정에 관한 연구 보고서까지!”

외부에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귀중한 서류들이었다.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은 눈을 번뜩였다.

찾은 자료를 들이밀며 심 사장에게 묻기 바빴다.

“재료 배합 비율을 바꾼 결과는 어땠습니까? 차이가 좀 납니까?”

“태성화학 매출 장부와 영업이익 계산서에 관해 묻겠습니다.”

“태성치약에 관한 신제품 개발 보고서가 있던데요. 시제품 샘플도 확인해보고 싶습니다만.”

심 사장은 울컥했다.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이 그를 둘러싸고 여기저기에서 귀 따갑게 쪼아대자 인내심이 팍팍 닳는 모양이다.

“다 넘긴다면서요?”

“양보하겠다면서요?”

“자료 찾아서 얼른 가져와 보세요. 빨리요!”

그들은 호구를 잡은 사람처럼 도를 넘는 요구와 후려치기를 시작했다.

참다 참다 이마에 핏대까지 튀어나온 심 사장이 막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따르릉!

-소탐대실. 실랑이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이대로라면 김 회장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실 거예요.

심 사장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시끄럽게 날뛰는 가운데, 우광의 김 회장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홀로 우아하게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태성화학 인수 결정권자랑 담판 지으세요. 왜 계열사 사장들과 협상하고 계세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

-협상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부터 우광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관리하겠다는 약속만은 꼭 받아내야 해요.

그것 때문에 태성이 이만큼 양보하는 거다.

-이럴 땐 뭐다? 결정권자 나와! 배 째! 아시죠?

“······알겠습니다.”

-억 단위 손해를 봐도 괜찮다니까요. 사람만 챙겨요. 재인수 협상 조건만 통과시키세요.

“예.”

심 사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고 김 회장을 돌아보는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김 회장은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여유를 선보였다.

“이게 태성이 준비한 인수 조건이라면 실망스러운데.”

“이게 협상에 임하는 우광의 태도라면 저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지? 차태성인가?”

“회장님이라면 당장 전화 바꾸라고 하셨겠죠. 그 전에 이미 달려오셨을 테고요.”

심 사장은 우광 계열사 사장들을 내버려두고 소파에 앉았다.

김 회장처럼 다리를 꼬고서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동안 우광 계열사 사장들의 요구에 시달리느라 차 한잔 마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김 회장님, 우광은 원래 다수결로 결정을 내리나 보죠?”

우광의 김 회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거나 말거나.

“우리 태성은 차 회장님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릅니다. 송년의 밤에서도 보셨죠?”

할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태성화학을 우광에 넘기겠다고 공언했다.

그 결정에 계열사 사장들은 반박하고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지지하며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태성화학 인수 협상의 책임자만 이 자리에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물려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래서야 인수 조건에 관해 제대로 된 대화나 해보겠습니까?”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야. 날 설득해야 할 사람 역시 자네지.”

김 회장은 웃었다.

“자네는 차 회장에게서 태성화학 인수 협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며? 이대로 협상이 파투 나면 곤란해질 텐데.”

“전 곤란할 일 없을 겁니다. 사표를 썼거든요.”

“사표?”

순간 목청껏 떠들어대던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잠깐의 정적은 더욱 큰 웅성거림으로 돌아왔다.

심 사장이 우광의 김 회장을 상대하기 위해 궁리한 강수였다.

“이거 보이십니까?”

심 사장이 팔랑팔랑 흔드는 것은 아까 태성화학 직원들이 서명한 사직서 묶음이었다.

그 맨 윗장에 ‘심원철’이란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루아침에 태성화학이 넘어가게 됐잖습니까? 별수 있습니까? 물러나야죠.”

“자네는 이미 태성의 막내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 밑으로 들어가면 그만일 텐데.”

“태성화학 사장이던 제가 태성건설 임원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각하께서 이미 인정한 태성건설 사장 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그럼 장남이나 차남 밑으로······.”

“회장님께서 그걸 곱게 보시고요?”

심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표까지 쓴 마당에 뭐가 아쉽겠습니까. 어차피 떠나는 회사에 무슨 의미를 두겠습니까.”

심 사장은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로 짓씹듯이 내뱉었다.

“결정하십시오. 저들을 물리고 저와 독대하실지, 아니면 다수결로 결정하실지.”

“다들 조용.”

김 회장이 손을 올리자,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웅성거리던 소리 하나 없이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제자리에.”

김 회장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른다.

방금 전까지 난리법석을 피웠던 사람들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차분했다.

지금까지의 소란은 전부 태성화학의 인수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술책이었던 거다.

“차태성은 독단으로 회사를 넘기는지 몰라도 나는 좀 달라. 이게 우리 우광의 스타일이지.”

김 회장이 턱 끝을 까딱였다.

“계속해. 태성화학을 이렇게 헐값에 넘기는 저의가 뭐지?”

“태성 따위 망해버리든가 말든가. 내 알 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 저건 내가 우광이 안 믿으면 대뜸 질러버리라고 부추긴 말인데, 그걸 그대로 갖다 쓰시는구만!

“태성화학이 어떻게 되든, 태성이 억 단위 손해를 보든 말든, 난 이제 모릅니다, 배 째!”

그렇지! 잘한다!

“오늘 태성화학 인수 협상이 물 건너간다면 아마 차 회장님께서 이 문제를 진두지휘하겠죠?”

“차태성이 이끄는 태성의 인수 협상단이라. 그렇다면 자넨 태성화학 인수 협상권은 왜 얻어온 거지?”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 김 회장님과 독대할 수 있잖습니까. 이거 그냥 싹 다 가져가세요!”

심 사장은 마시던 커피잔을 탁 내려놓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인수 협상, 지금이라면 억 단위 이득뿐만 아니라 저런 귀한 덤까지 얻어갈 수 있는데, 왜 망설이십니까? 전 오히려 그게 더 이해가 안 갑니다만?”

심 사장이 가리킨 산더미 같은 서류들.

태성화학의 극비 문서들이었다.

“내일부턴 차 회장님과 담판 지으셔야 합니다.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 동안 태성은 인수 협상을 진행하면서 대놓고 열심히 공장을 돌려서 제품을 팔아먹겠죠. 물론 저 서류들은 전부 폐기 처분 될 테고요.”

“그러고 보니 태성화학의 극비 문서가 왜 양철 캐비닛이 아니라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거지?”

“사표 쓴 김에 다 태워버리려던 참이었거든요.”

이건 심 사장이 김 회장을 꼬드기려고 궁리한 미끼였다.

심 사장은 손뼉을 짝 쳤다.

“운이 좋은 겁니다. 오늘 안 왔으면 이런 횡재는 못 얻으셨을 테니까요.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봐.”

“제가 제출한 사표가 수리되기 전에 인수 협상을 끝냈으면 합니다.”

오늘 내로 끝내야 한다는 당부가 있었으니까.

“또 있습니다. 아직 사직서를 제출하지 못한 태성화학 사람들은······.”

“연휴라고 노는 놈들이라면 저기서 술 처먹는 놈들보다 훨씬 정신머리가 나간 작자들이겠지. 그런 놈들을 우광에 들이고 싶지 않군. 전원 해고야.”

연휴에 출근하지 못했던 태성화학 사람들의 거취 문제도 해결. 끝.

“태성의 비축물자와 극비 자료까지 전부 가져가려면 꼼수를 좀 써야 할 겁니다. 시설 점검이랑 하자 보수 혹은 어음 처리에 관한 것을 핑계로 차 회장님께서······.”

“내가 인수 계약서에 서명하는 시간부로 전부 우광의 것이고, 우광의 책임하에 관리한다. 태성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

“그럼 그걸 특약사항으로 적어놔야겠군요.”

척하면 척이다.

역시 결정권자랑 담판 지으니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제 행여 화재가 나도 태성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겠구만!’

심 사장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분 정리.”

세상 대부분의 문제가 다 그렇듯, 기업 인수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 문제라 할 수 있다.

“태성의 지분을 전부 인수하지.”

“최소 150억입니다. 철강 사업 때문에 자금 동원에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가능하시겠습니까?”

심 사장은 은근한 어조로 떠봤다.

“그냥 태성에 우광의 지분을 넘기고 현금을 받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는 못 하지.”

김 회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내 체면이 더럽게 구겨졌는데, 태성화학을 곱게 넘겨줄 수야 있나. 어림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150억은······.”

“어음으로.”

심 사장은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설마 150억 전부를?”

“안 될 것 있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조건인가 본데. 그렇게 당황할 것 없······음?”

부스럭.

심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개월 만기, 3개월 만기, 6개월 만기, 1년 만기 어음을 각각 25%로 한다.>

<만기까지 어음을 완납하지 못할 경우 어음 비율에 따라 지분을 넘기는 것으로 갈음한다.>

<만일 어음 결제를 포기하고 태성화학 재인수 협상을 요구할 시 사채시장의 룰에 따른다.>

<재인수 협상엔 지분 비율 조정은 없다. 오직 가격 협상만 가능할 뿐이다.>

<지분 정리가 끝나기 전까지 태성은 우선협상권을 가진다.>

김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뭐?”

< 우광과 담판 짓다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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