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되네? (1) >
우광의 김 회장은 심 사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재밌는 친구로군. 전부 예상했다 이건가?”
“기업 간의 인수 합병에 어음 거래가 안 끼는 경우가 어디 있답니까? 중요한 건 비율이고, 조건이죠.”
“그게 문제지.”
김 회장은 종이의 문구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태성화학 재인수에 관한 태성의 우선협상권?”
김 회장의 눈빛은 차갑게 번뜩였다.
“거기에 어음 비율에 따라 지분을 넘기는 것으로 갈음해? 그것도 사채시장의 룰에 따라서? 하!”
김 회장은 종이를 와락 구겨서 등 뒤로 던졌다.
“이건 지나치게 태성에 유리한 조건인 것 같은데. 내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는가?”
“확인 차 묻겠습니다. 어음 발행처가 우광그룹 지주회사입니까?”
“아니, 우광건설이다.”
우광건설 김 사장이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형님!”
“결과로 보여주겠다며?”
우광건설 사장은 찔리는 바가 아주 많아 보였다.
심 사장은 말했다.
“우광이 작심하고 악의적으로 어음을 부도내 버리면 태성은 땡전 한 푼 못 받고 회사만 홀랑 뺏기게 되겠군요.”
어음은 부도나면 휴지 조각이나 다를 바 없다.
어음의 기본 전제는 기업의 신용인데, 도산한 기업의 신용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광건설을 버리는 패로 쓰실 겁니까?”
“150억짜리 회사를 날로 먹으려면 우광건설이 부도나야 한다는 전제가 먼저겠지. 우광건설도 우광의 계열사다.”
“하지만 우광건설은 구로동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는 과정에서 불을 지른 데다 언론을 매수해서 각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바람에 청와대의 눈총을 샀습니다.”
우광건설 사장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는 까닭이었다.
“정부에서 조만간 부동산 규제 조치를 내린다고 하지, 지하철 2호선 사업도 물 건너갔지, 눈독 들이던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공사까지 놓쳤으니. 우광건설을 포기해도 태성화학을 건지면 남는 장사란 계산이겠죠.”
심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우광건설이요? 당장 M&A 시장에 내놓아 보십시오. 50억이나 받겠습니까?”
심 사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더니 김 회장이 구겨서 버린 종이를 주웠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쾅!
심 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섰다.
* * *
심 사장은 곧장 내가 있는 비서실을 향해 달려왔다.
벌컥!
“도련님!”
심 사장이 씩씩대며 말했다.
“우광이 태성화학을 날로 먹으려 듭니다! 전 도저히 더는 못 참겠습니다! 태성그룹 법무팀과 총무팀을 불러야겠습니다. 하나하나 따져 보자고요!”
“화나실 만 해요. 담보 없이 어음으로 돌리는 건 물건 거래까지지, 인수 합병마저 어음으로 퉁치겠다는 건 욕심이 과하죠.”
“그러니까요! 전 이런 조건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그러니 이 기회에 우리도 우광철강의 지분을 담보로 잡겠다고 요구하자고요.”
심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되겠습니까? 우광은 철강을 기반으로 조선업과 운수업은 물론 방산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우광철강을 못 내놓겠다면 우광증권이라도 물고 늘어져야죠.”
“······!”
“태성엔 아직 증권사가 없잖아요. 재인수 협상 조건을 봐요. 우광이 어음을 제 때 막지 못한다면 담보로 잡혔던 우광증권은 어떻게 될까요?”
“······!”
심 사장은 재빨리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만기까지 어음을 완납하지 못할 경우 어음 비율에 따라 지분을 넘기는 것으로 갈음한다.>
심 사장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설마 어음 못 막으면 태성화학은 물론 우광증권까지 같이 넘어오는 겁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일부러 조건을 더 달아놨잖아요.”
<만일 어음 결제를 포기하고 태성화학 재인수 협상을 요구할 시 사채시장의 룰에 따른다.>
“사채시장에서 담보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심 사장님도 잘 아시죠?”
“······어?”
“어음 결제를 포기한다는 건 어음 발행처가 도산하는 것도 포함이에요.”
“······!”
난 다른 건 몰라도 돈 회수에는 목숨 걸었다.
우광이 어음으로 날로 먹겠다면 이쪽도 날로 먹으면 그만이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잘만 하면 이참에 태성이 우광증권에 한 발 걸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맙소사! 도련님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시고······!”
“우광을 상대하기 버겁다면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겠어요. 약속했던 대로.”
이럴 때 지원사격을 갈겨줄 수 있는 사람은 둘이나 된다.
하지만 심 사장은 이미 의욕이 풀 파워로 채워진 후였다.
“아닙니다. 제 선에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무능한 편은 아니라서!”
“표정 관리하세요. 그렇게 웃고 있으면 우광이 미심쩍잖아요.”
“아차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정도 연기력은 됩니다!”
심 사장은 뿌듯하게 웃었다.
“그럼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어음으로 받아오겠습니다!”
철컥.
심 사장은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
사장실로 복귀한 심 사장은 비장하게 외쳤다.
“좋습니다. 150억짜리 어음, 받겠습니다.”
“좋아.”
“하지만 조건을 하나 더 붙여야겠습니다. 우광건설의 도산을 대비해 담보 하나쯤은 더 잡고 있어야겠습니다.”
“담보?”
“예, 우광건설이 부실해서 못 믿겠습니다. 좀 더 우량한 계열사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어디?”
“우광철강 아니면 우광증권. 둘 중 하나는 양보하시죠.”
심 사장은 김 회장이 구겨서 버린 종이를 주워서 도로 폈다.
“행여 어음이 문제가 되더라도 재인수 협상에서 다투면 되잖습니까. 그래서 이 특약사항도 포함입니다.”
“심원철.”
그렇게 우광과 태성의 날이 선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든 강행하려 했다.
그에 반해 태성의 입장을 항변하는 것은 오로지 심 사장뿐이었다.
아무리 태성이 더는 양보하지 못한다고 외쳐도 우광은 막무가내로 밀어부쳤다.
-전액 어음으로!
얼마나 그렇게 피 튀기는 설전을 계속했을까.
“어음까지 태성이 양보했음을 아셔야죠. 그러니 오늘 내로 끝내시죠. 저런 덤까지 잔뜩 얹은 태성화학을 갖고 싶다면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심 사장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잠시 사장실을 비워드리겠습니다. 우광은 우광 스타일대로 다수결로 결정하십시오.”
심 사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려 할 때였다.
“심원철, 우광에 들어오지 않겠나? 태성화학을 맡게 해주지.”
“일 없습니다.”
심 사장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 * *
이번에도 심 사장은 비서실로 달려왔다.
아까와 달리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으나, 입꼬리는 귀까지 걸려 있었다.
“도련님, 거의 다 넘어왔습니다! 우광이 어떻게든 날로 먹겠다고 날뛰고 있거든요.”
“고생하셨어요.”
“눈치로 보아 놈들이 담보로 우광증권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심 사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광철강을 내놓겠다고 들면 진짜 사양하고 싶거든요. 그쪽엔 쌓인 적자와 들어가야 할 설비 투자가 워낙 거액이라. 한 번 물리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렇겠죠.”
타다다다다닥! 철컥. 타다다다닥!
“도련님, 타자기 갖고 놀 때가 아닙니다. 자리 좀 비켜주십시오. 제가 지금 태성화학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거든요.”
심 사장은 씩 웃었다.
“우광그룹 회장님이 결심을 굳혔는데, 계약서가 없어서 인수 협상이 파투 나면 피눈물 날 것 같습니다.”
타다다다닥! 철컥!
“이거 가져가세요.”
“그건 뭡니까?”
“태성화학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요.”
“뭐라고요?”
심 사장이 입을 떡 벌렸다.
“세 장?”
심 사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300억짜리 태성화학을 넘기는데, 고작 세 장짜리 계약서를······.”
“계약서가 길어봐야 법무팀 일거리만 많아질 뿐이잖아요. 제대로 된 계약서는 재인수 협상 때에나 준비해서 가세요.”
머지않아 태성화학을 가져올 생각인데.
잠깐 쓰고 버릴 계약서에 큰 공 들여서 뭐 하겠나.
중요한 사항만 챙기면 됐지.
“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죠?”
심 사장은 손등으로 두 눈을 벅벅 비볐다.
“이 와중에 들어가야 할 건 죄다 서식에 맞게 들어가 있군요. 심지어 법 조항이랑 맞춤법까지 완벽할 줄이야. 이건 대체······ 허!”
나는 모른 척했다.
허구한 날 쓰던 게 사채 계약서부터 기업 인수 합병서라 이까짓 건 일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벌써 우광증권 담보에 관한 특약까지 전부 적어넣으셨군요.”
심 사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단기 어음이 무려 150억입니다. 잘못하면 저 어음 때문에 우광은 줄도산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음 거래가 파투 나면 어쩌죠?”
“우광은 줄도산에 대해 그리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IMF는 안 왔지.
IMF 때 재벌기업 줄도산이 왜 났는데.
어음을 못 막아서 났다. 남의 돈으로 문어발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다가.
지금의 우광처럼.
“하여간에 어음도 빚이고 대출도 빚이고 사채도 빚인데. 사람들은 제 돈은 아까워하면서 남의 돈은 참 쉽게 여긴다니까요?”
그러니 태성화학이라는 알짜배기 회사를 인수하는데도 저런 날도둑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양심도 없는 새끼들!
“현금으로 지분을 사 가라면 엄두가 안 나는 것도 어음으로 가져가라면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부가 대기업의 줄도산을 내버려둘 리 없다고 믿을 테고요.”
실제로 몇 년 전에 있던 8.3 사채 동결 조치만 해도 그렇다.
“우광은 몇 년 전에 부실기업 리스트에 올랐음에도 8.3 사채 동결 조치 때 사채와 어음을 엄청나게 털어내서 우량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죠?”
우광이 믿는 구석이 그것일 터였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재계 서열 9위인 우광이 넘어가면 대한민국 경제가 뿌리까지 흔들릴 것이란 배짱! 정부는 그걸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 단기 어음? 우광의 매출이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걸요?”
심 사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제가 오늘 귀신에 홀린 기분도 모자라 똥멍청이가 된 기분은 물론, 이젠 경제 전문가에게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까지 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딱.
‘수호신, 우광 사람들은 뭐 하고 있어? 다수결은 다 끝났대?’
그 독선적인 우광의 김 회장이 다수결로 결정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 * *
태성화학 사무실 안에선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이열 종대로 소파에 앉아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김 회장은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을 돌아보았다.
“서 사장, 심원철의 제안대로 할 때 우광의 이득은?”
“태성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산만 억 단위, 거기에 어음으로 회사 인수 자금을 충당할 수만 있다면 아낄 수 있는 은행 및 사채 이자까지 계산한다면······.”
주판을 열심히 튕기던 서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족히 십억 단위 이득이 떨어집니다.”
김 회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른 계열사 사장을 돌아봤다.
“이 사장, 심원철이 덧붙인 조건은? 얼마나 우광에 불리하지?”
“정해진 기간 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태성화학을 헐값에 날리는 건 태성이 아니라 우광이 될 겁니다.”
“흐음.”
“태성 측에서 제시한 어음 대부분이 단기 어음이었습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대부분 단기 어음을 사용하지 않나?”
어음은 한마디로 기업 간의 외상 계약서라 할 수 있다.
회사 간의 거래에서는 보통 거래 금액이 크기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거액을 주고받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보통 거래 때마다 현금을 지불하는 대신 단기 어음으로 상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광과 태성의 경우는 사업상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던지라 어음이 오가는 경우가 특히 더 많았다.
“금액이 150억이나 되니 문제인 겁니다.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광이 아무리 현금 흐름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걸 못 막을 정도는 아니지.”
김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행여 문제가 생겨도 청와대에서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있나. 분명히 중재가 들어올 거야.”
김 회장은 다른 계열사 사장을 바라보았다.
“장 사장, 태성과 재인수 협상을 벌일 가능성은?”
“태성화학을 고작 어음 몇 장으로 먹을 기회가 어디 흔합니까? 재인수 협상이라면 우리 쪽에서 필사적으로 거절해야죠.”
김 회장은 손깍지를 낀 채 소파에 등을 묻었다.
“이건 차태성이 의도한 그림이 아니야. 심원철의 독단이 분명해. 그래서 흔치 않은 기회인 거고.”
이열 종대로 늘어선 계열사 사장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심원철이 제안한 태성화학 인수 조건에 반대하는 사람 거수(擧手).”
반대했다간 김 회장의 눈 밖에 날 터.
다들 눈치만 보며 헛기침을 터뜨렸다.
“태성 측에서 요구한 담보는 우광증권으로 하겠다. 반대하는 사람 거수.”
김 회장은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저 마셨다.
소태처럼 쓴 커피는 바닥을 드러냈다.
“만장일치로군. 심원철 불러 와.”
계약서에 도장 찍을 시간이란 소리였다.
* * *
‘우와!’
비서실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믿기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황천길 카운트다운과 주황색 화살표가 한꺼번에 사라졌어!’
눈 깜짝할 새였다.
등이 꺼지듯이 동시에 사라지더라니까?
‘이게 되네? ······음?’
내 몸 위로 얇은 막처럼 일렁이는 은색빛 광채.
이런 건 처음 본다.
‘이게 뭐지?’
[오, 대왕께서 사람들을 구한 공덕을 실시간으로 추가 정산해주시려나 보구나.]
‘깜짝이야!’
내 귓가에 그렇게 바싹 붙어서 말하지 말라고!
그런데 뭐?
‘실시간 공덕 추가 정산?’
원래 저승의 정산은 후불이 기본 원칙 아니었어?
< 이게 되네? (1)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