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81화 (81/189)

< 이게 되네? (2) >

의아했다.

‘이승에서 쌓은 공덕과 업보를 죽은 이후 저승에서 정산하여 다음 생을 결정한다.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맞다. 그러니 이건 아주 특별한 예외라고 봐야지.]

저승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성긴 것 같아도 결코 그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너는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인명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 또한 공덕이다.]

저승사자는 말했다.

[오늘 네가 쌓은 공덕은 조만간 몇 배로 값진 보답으로 돌아올 것임을 대왕께서 약속하셨다.]

잠깐. 웨이러 미닛.

‘난 아직 손해 안 봤는데?’

아니, 태성화학을 어음 처리하고 넘겼다고 저승에서도 날 안쓰럽게 봤다는 소리야?

기가 차는군.

‘하, 원래 빚내서 투자하는 게 제일 무서운 법인데 말이야. 내가 영끌로 빚 잔뜩 져서 코인 몰빵, 주식 몰빵, 부동산 몰빵했다가 파산하는 집을 한두 번 보나? 우광이라고 다를 것 같아?’

그것참 내가 저승사자한테까지 조만간 제2차 오일 쇼크가 터질 것이라고 설명해야 하나?

우광이 치른 단기어음, 그거 화재 안 나도 못 갚는단 소리라고.

오일 쇼크까지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우광이 태성화학을 어떻게 날로 먹겠어.

‘내가 왜 우광증권까지 끌어들여서 담보로 잡았는데?’

태성화학은 물론 우광증권까지 날로 먹겠다는 작정이거든.

이건 목숨값이 안 들어가서 셈으로 안 치나 본데.

이 정도 함정은 악덕이 아닌, 정당한 경쟁의 술수로 봐준다는 소리로구만.

오호라, 감 잡았다!

‘하기야 미래 정보를 이용해서 덫을 놓는 게 죄라고 볼 순 없지.’

저승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번 일로 23명의 예정된 죽음과 166명의 예정된 고통을 구원하였지. 대왕께서는 이를 무척이나 흡족하게 여기신다.]

태성화학 화재 사고의 인명 피해.

저승사자는 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승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저승에서는 무엇보다 인명의 귀함을 최고로 친다. 대왕께서 특혜라 할 수 있는 공덕의 실시간 정산을 강행하게 되신 까닭이다.]

좋은데?

‘그럼 앞으로도 내가 남을 구하면 염라대왕이 실시간으로 공덕을 정산해준다 이거지?’

[그래. 대왕께서 말씀하시길, ‘남을 구하는 것이 곧 너를 구하는 길이고, 남을 살리는 것이 곧 너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저승사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네게 아주 특별한 인연을 하나 선물하겠다 하시더군.]

특별한 인연이라.

[원래라면 절대로 닿지 못했을 인연의 끈이었을 터. 특별히 네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만한 거물과의 인연으로 고르셨다더군.]

솔깃했다.

거물과의 인연은 사기 어렵다.

사람들이 저마다 거물과 끈을 대고 싶어 하지만, 그들과 끈이 닿는 건 결국 끼리끼리 만난다.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야 한 끗발 높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문득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행운이란 것이 사기만 하면 로또 1등, 찍기만 하면 시험 만점, 길 가다가 돈벼락을 맞기는 예사고, 뭐 그런 겁니까?

-하하하, 살다 보면 어쩌다 그런 횡재를 얻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매번 그런 일만 바라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인세(人世)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묻는 겁니다.

-네가 천벌을 받았을 때 말이다. 하는 일마다 번번이 훼방을 받았었지? 하지만 이번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오!

-좋은 인연이 모이고, 거기에서 크고 작은 기회가 생기고, 때마침 운까지 따라주면 제법 살맛이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운(大運)이니라.

염라대왕은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니 부디 인연을 신중히 맺거라. 인세(人世)의 운이란 본디 인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니.

나는 턱을 쓸었다.

‘대운을 부르는 귀인이라. 장차 내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만한 거물이자, 원래라면 절대로 닿지 못했을 인연의 끈. 그게 누군데?’

저승사자는 빙그레 웃었다.

[하늘이 준비한 인연이다. 곧 알게 되겠지.]

저승사자는 스르륵 연기처럼 사라졌다.

“도련님.”

심 사장이 날 불렀다.

그가 내게 내미는 것은 세 장짜리 계약서였다.

‘우와! 엄청난 황금빛!’

아까 내가 타자기로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이 정도까지 밝게 빛나지 않았거든.

그런데 우광의 김 회장이 여기에 사인한 이후 갑자기 이렇게까지 번쩍거리더라고.

‘이게 되네?’

이건 좀 신기했다.

내가 적은 쪽지에서 즉시 황금빛을 뿜은 건 본 적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계약서에 서명 날인을 한 후에 더 밝은 황금빛을 뿌리는 건 처음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 우광과 태성화학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할 때요. 뭔가 덧붙인 거 있어요?”

“덧붙인 거라면······ 예,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도련님과 상의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이왕 무리수를 두는 김에 보다 확실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한 줄을 더 덧붙였습니다.”

“한 줄을 더?”

나는 계약서의 특약사항을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친필로 적혀 있는 조항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태성은 만기까지 어음 체납에 대해 독촉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 담보인 우광증권도 재인수 협상 조건에 갈음하여 처리한다.>

심 사장은 설명했다.

“도련님이 적었던 사채시장 룰이란 단어를 우리 쪽 언어로 대체했을 뿐입니다.”

그 단어 하나 때문에 황금빛의 밝기까지 바뀐다는 건가?

흥미로웠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어려서 이 ‘담보인 우광증권도 재인수 협상 조건에 갈음하여 처리한다.’라는 문구가 얼마나 끔찍한 조항인지 와닿지 않을 겁니다.”

와닿는다.

나는 그걸 사채시장의 룰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 밑에 은밀하게 숨겨놓았고, 댁은 그걸 대놓고 조항으로 적어낸 게 다를 뿐이다.

“우광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9위인 대기업입니다. 우광의 전 계열사 매출액을 태성화학에 몰아넣어서 어음을 갚겠다고 들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광은 태성화학의 어음은 제일 후순위로 두고 처리할 거란 말이죠?”

“예, 어음 금액이 큰 만큼 만일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 청와대가 개입할 여지가 크거든요. 우광은 굳이 태성의 어음을 급하게 처리할 것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설사 태성화학에 화재가 안 나더라도 우광은 태성화학의 단기 어음을 우습게 보고 손 놓고 있다가 화를 자처할 거다.

내가 굳이 사채시장의 룰을 들먹이며 어음 거래로 묶어놓은 이유였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목표하는 바는 같았다. 그런데도 이 조항 하나 때문에 이 계약서의 가치가 달라진단 말이지?’

나는 황금빛이 밝게 빛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이왕이면 양지의 룰에 따라, 합법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게 낫다는 거로군.’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다.

합법적인 건 불법 혹은 편법에 비해 뒤탈이 날 확률이 적다.

또한 남들에게 쉽게 인정받을 수 있고.

‘좋은 거 배웠다.’

나는 몹시 흡족했다.

이 일을 훌륭하게 수행한 심 사장이 예뻐 보일 만큼.

“고생하셨어요. 특히 이 마지막 특약사항, 내 맘에 쏙 들어요.”

나는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중요한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재벌 기업들의 룰. 덕분에 확실하게 배우고 갑니다.”

“영특하시군요. 제 숨은 뜻까지 헤아려주실 줄은······. 태성의 미래가 정말 든든합니다.”

나는 모른 척 은근슬쩍 물었다.

“만에 하나, 내 예상이 틀렸을 때요. 우광과 짜고 태성화학을 날로 넘긴 개새끼 취급을 받게 될까 걱정되진 않았어요? 그때가 되면 태성을 향한 심 사장의 진심을 증명하기 어렵잖아요.”

“제가 그걸 걱정한다고 생각하셨군요?”

심 사장은 나를 마주보기 위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 회장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부드러운 눈빛에 온화한 표정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재벌 기업이 망해가는 회사를 날로 먹을 때 주로 쓰는 수법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우광증권을 끌어들였다는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제 뜻을 바로 알아채셨을 겁니다.”

“아······!”

“사실 제가 걱정한 것은 도련님이었습니다.”

“저를요?

나는 동그래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일 제 예상이 맞았을 때, 그러니까 우광이 태성화학을 인수하기 위해 착실하게 단기 어음을 갚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나는 우광이 단기 어음을 떼어먹는 걸 기본으로 봤는데, 심 사장은 우광이 착실하게 단기 어음을 갚는 걸 기본 전제로 상정하고 있었다.

“태성이 제대로 인수협상단을 꾸려서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이나 테이블 위의 혈전을 감수하며 싸워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기업은 신용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다는 걸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용이라.

뒷골목의 세계에서 귀하게 쳐주지 않는 단어였다.

“저는 우광이 우광건설을 부도내면서까지 태성화학을 날로 먹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함에 따른 태성의 손해가 많이 아까웠습니다.”

양지에서 활동하는 재벌 기업들에게 신용이란 단어의 가치는 우리와는 다른 무게로 사용됐던 모양이다.

나는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우광 쪽 사람들을 상대해 보니까, 150억이면 40년 넘는 우정도, 기업의 신용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는 금액이구나 싶어서 씁쓸해지더군요.”

150억이면 21세기 물가로 치면 7,500억 정도 되는데.

그런 돈 앞에서 40년 우정이 대수겠어?

“사실 도련님의 미끼가 워낙에 좋았습니다. 우광의 김 회장뿐만 아니라 우광 계열사와 저까지 다 낚일 정도였거든요. 과감한 수였습니다.”

심 사장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목표를 향한 맹렬한 집념, 겁 없이 달려드는 배짱과 과감한 수단, 거기에 상대의 의중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까지.”

심 사장은 몹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여덟 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이 심원철이 도련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럼 이제 시험은 다 끝난 거죠?”

“······알고 계셨습니까?”

“고생하셨어요. 여덟 살짜리 어린애의 눈높이에 맞춰 무리수를 쓰느라.”

심 사장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이거 제가 한 방 먹었군요.”

“반신반의하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뜻에 따라 일을 강행해주셨고요.”

날 능력에 걸맞게 대우해줄 사람이라는 판단이 안 섰다면 나 역시 속뜻을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내 의중을 살피며 협상을 진행했다는 건, 내가 무슨 짓을 시켜도 그에 대응하여 뒤를 받쳐줄 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심 사장은 우광과의 협상 도중 말을 끊고 내게 달려왔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볼 작정으로.

마흔 명에 달하는 우광 계열사 사장들에게 쪼이면서도 내 속을 떠볼 만큼 여유로웠다는 소리다.

그러니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만한 능력도 없는 자에게 태성화학의 인수협상에 관한 전권을 선뜻 내어줄 리 없지. 둘째 큰아버지가 그리 탐내지도 않았을 테고.’

심 사장은 둘째 큰아버지 앞에서도 의뭉스럽게 굴던 자다.

고작 여덟 살짜리인 내 앞에서 속을 훤하게 까발리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남자가 날 위해 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기쁠 수밖에.

“이 일은 어떻게 커버하실 작정이었어요?”

“덫은 도련님이 놓으셨으니, 몰이사냥은 제가 할 생각이었습니다. 우광이 단기 어음을 쉽게 갚을 수 없도록 잔뜩 휘저어 놓으면 되잖습니까.”

음?

“안 그래도 자금 경색 직전인 우광의 현금흐름을 제대로 막아봐야죠. 어음이 여기저기에서 펑크 나기 시작하면 줄도산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렇게 우광을 재인수 협상 테이블에 앉힐 작정입니다.”

어째 뒷골목에서나 나올 법한 멘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우광은 머지않아 재인수 협상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거야 원. 태성화학 화재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1년 안에 오일 쇼크가 터진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때가 되면 태성화학은 물론 우광증권까지 울면서 바치게 생겼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어쨌거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이런 적극적인 자세, 마음에 들어!

똑똑똑.

우광건설 사장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비서실 문을 열었다.

“태성화학 인수 합병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이곳에 있는 모든 자료, 모든 기물, 모든 재산은 전부 우광의 것이다. 외부인은 이만 꺼져주지?”

우광의 축객령이었다.

심 사장은 ‘너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 회장님께서 우광건설 이름으로 어음을 발행하겠다는데. 괜찮겠나?”

우광건설 김 사장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으니까.

< 이게 되네?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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