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사과, 조촐한 진심 >
나는 저승사자와의 시야 공유를 껐다.
‘역시 우리 아버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들이 전부 비지니스를 외칠 때, 한 걸음 물러서서 사람을 외칠 수 있는 사내!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확실히 지금 우광병원만으로는 부상자들을 전부 수용하기 어렵겠지.’
과거 태성화학 화재 사고는 어땠던가를 떠올려 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태성그룹 보고서에는 그와 관련한 대목은 나와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대국민 사과 발표를 위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고, 사재 30억 원을 출연하여 태성재단을 설립하셨지.’
거기까지가 태성그룹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우광그룹의 보고서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나온다.
‘총수 자리에서 물러난 할아버지가 태성재단을 직접 운영하며 피해 가족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건강을 크게 해쳤다지?’
할아버지는 태성건설과 태성화학이 계열 분리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피해자 가족을 돌보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한다.
‘우광의 김 회장은 어떻게 나올까.’
저승사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쳇, 연속극 다 놓쳤군. 이 밤에 볼 거라고는 재미없는 프로그램밖에 없던데.]
기어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이 난리였다.
‘어차피 밤새 회의를 엿듣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 이 다음은 실무자 회의니까.’
구체적인 전략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시작될 터였다.
그런 건 들어봐야 골치만 아프고.
내가 관심 있는 건 전략적인 방향성이지, 현장 실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라서.
[아니, 이건 또 왜 이래?]
저승사자가 몹시 분개하여 외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텔레비전 화면에 커다란 자막과 함께 우광그룹 총수인 김우광 회장의 모습이 비쳤다.
<우광그룹 총수 김우광 회장의 긴급 기자회견 발표>
이 시간에?
애국가가 나올 때가 머지않았고, 좀 있으면 야간통금시간이 될 법한 늦은 밤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우광그룹 본사로 보이는 강당이 비쳤다.
우광의 로고가 적힌 단상 앞에 오른 우광의 김 회장이 마이크를 켰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우광화학 공장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고에 관해, 저 김우광은 고개 숙여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우광화학 화재 사고에 대한 김 회장의 대국민 사과였다.
김 회장이 머리를 숙이자, 카메라 플래시가 어지럽게 찰칵 찰칵 터졌다.
텔레비전 화면이 강당 다른 쪽을 비추자, 우광그룹 계열사 사장 및 임원진이 줄맞춰 강당에 모여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우광의 사과였다.
김 회장은 미리 준비한 사과문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다시 한번 우광 화학의 모든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우리 우광은 사고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화재 사고의 원인을 확실하게 규명하기 위해 노력함은 물론이거니와, 피해자 및 유가족을 위한 성의 있는 피해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우광의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우광이 책임지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텔레비전 자막이 바뀌었다.
<우광의 대국민 사과: 진심 어린 사과 및 원인 규명 약속>
-저희 우광은 앞으로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우광화학으로 거듭나겠습니다. 회사에 어떠한 손해가 있더라도 고객과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우광의 김 회장은 텔레비전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광화학을 사랑하는 모든 고객과 국민 여러분의 불안감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회사로 거듭나겠습니다.
사재를 출연하겠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저희 우광화학 제품을 믿고 쓰실 수 있도록 회사의 역량을 다할 것이며.
유가족에 관한 보상에 관한 말도 없었다.
-나아가 안전과 사회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국가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광재단 설립에 관한 말은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번 우광화학 화재 사고로 피해를 보신 모든 분과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것으로 우광의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끝났다.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허, 자숙하는 의미로 총수 자리에서 사퇴한다는 말조차 없네?’
이게 대기업의 대국민 사과문이란 말이지?
이게 사상자를 이백 명 가까이 낸 기업 총수의 입장이자, 결단이란 말이지?
‘우광······.’
우광의 김 회장은 태성그룹 총수였던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택했다.
‘청와대에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볼까?’
분명 청와대의 압력이 있어서 이 늦은 밤에 김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게 됐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현무호텔에서 엿봤던 청와대의 주인이 그리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는 않던데.
‘정말 이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대기업이라 이거지?’
* * *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날이 밝으면 앞다투어 간밤의 대국민 사과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 쏟아지리라 예상했는데.
언론은 우광을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우광그룹 총수의 진심 어린 사과가 통했다!>
<비통한 약속! 우광이 책임지고 우광화학의 화재 사고 원인을 규명하겠다!>
<김우광 회장의 지휘 하에 빠르게 정리되고 있는 화재 사고 현장!>
절로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기레기들이! 대체 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은 거야?”
신문만이 아니었다.
방송에서도 우광 화재에 관해 잘 포장된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김우광 회장이 우광화학 화재 사고의 피해자들을 위해 합동 분향소를 마련했습니다!
-곳곳에서 이어지는 추모의 행렬을 저희가 심층 취재했습니다!
-아홉 시 뉴스에서 자세히 뵙겠습니다!
정작 우광화학 사망자를 위한 합동 분향소에 우광의 김 회장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뉴스 카메라에는 우광그룹의 온갖 계열사에서 보내온 장례화한이 우광병원 복도를 빼곡하게 채우는 것을 비췄다.
합동 분향소를 찾은 여당 의원들과 야당 의원들이 재빨리 마이크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다시는 이런 참담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한마디라도 더 해서 얼굴 도장을 찍고 싶은 정치권 인사들의 욕심이었다.
달칵.
[텔레비전을 왜 꺼! 이제 곧 일일연속극 할 시간인데!]
‘꼴도 보기 싫어서 그렇다.’
[뉴스만 안 보면 되잖아. 일일연속극은 죄가 없다. 놓친 방송은 다시 볼 수 없다고!]
저승사자가 뭐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팔짱을 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정혁아, 저녁 먹자.”
생각 없는데.
“내일은 오전에 엄마랑 같이 태성병원에 가야지.”
태성병원?
아, 맞다!
내일은 태성 가족 환우를 위한 기부금을 전달하기로 한 날이다.
* * *
어머니와 나는 철구 아저씨의 지프차를 타고 태성병원으로 향했다.
그새 알록달록했던 철구 아저씨의 멍은 많이도 빠졌다.
“요즘도 간첩 때려잡느라 바빠요?”
“물론이지. 이 나라의 간첩은 내가 다 잡는다! 모르냐? 으하핫, 내일부터 정식 복귀다!”
서빙고 고문실에서 물고문 받았다고 중정에서 휴가를 제법 길게 줬었는데.
휴가가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할 모양이다.
철구 아저씨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강 여사, 뭘 그렇게 긴장하셨어? 건강검진 처음 받아봐?”
“그럼,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 받아보지. 떨려 죽겠다.”
보조석에 앉은 집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떨렸다.
“내 나이가 몇이냐. 큰 병이라도 덜컥 나오면 어떡한다냐.”
“아이고, 강 여사. 걱정도 팔자셔. 건강검진을 왜 받는지도 모르시나? 큰 병으로 가기 전에 미리 잡아낸다는 거 아뇨. 가래로 막을 거 호미로 막는다는 말도 모르시나.”
딱!
집주인 할머니가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철구 아저씨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여기서 더럽게 가래가 왜 나와! 안 그래도 요즘 기침이 안 멈춰서 걱정돼 죽겠구만!”
이 가래가 그 가래가 아닐 텐데.
우리는 태성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병원 로비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병원 앞에 웬 사람들이 저렇게 많죠?”
설마 태성병원 송 원장님이 의료진들을 집합시킨 건 아니겠지?
지금 우광화학 화재 사고로 실려온 환자들이 태성병원에 많을 텐데.
약간의 우려가 무색하리만치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의료진들이 아니었다.
“송 원장님.”
“도련님, 사모님 오셨습니까?”
정문 구석에서 송 원장님이 몹시 피곤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 사람들은 다 무슨 일로 이러고 계신 거예요?”
“우광화학 화재 사고의 유가족과 보호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들이 심상치 않았다.
계란과 귤은 물론이고 물바가지도 있었다.
송 원장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게, 오늘 우광의 합동 장례식 마지막 날이 아닙니까. 합동 장례식이 끝나고 우광에서 이쪽 병원으로 위문 온다는 소식이 돌았지 뭡니까?”
* * *
태성병원으로 들어서자 정말로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태성 가족 환우 돕기에 태성의 임원들이 동참했습니다!>
멀리서 봐도 큼직한 글자로 적혀 있는 모금 명단 맨 위에는 할아버지 이름이, 그 바로 옆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플래카드 옆에 벽보가 붙어 있었다.
<태성 가족 환우 돕기 행사는 차정혁 도련님의 제안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태성은 한 가족!’이란 뜻에 동참한 태성의 계열사 임원들이······.>
벽보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붙게 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환우 가족으로 선정된 가족 및 병원비 지원 등에 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분명히 사실만을 적은 글이었는데, 그걸 보는 내내 낯이 홧홧하게 뜨거웠다.
“오늘 도련님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태성 가족 환우 돕기의 행사를 조촐하게나마 열기 위해서입니다.”
플래카드와 벽보가 붙어 있는 구석에는 꽃과 화환으로 장식된 단상이 놓여 있었고, 색 끈과 풍선으로 장식된 <태성 가족 환우 돕기>란 글자가 걸려 있었다.
이걸 태성병원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로비에 전시해 놓은 것이다.
“전 조용히 병원비 지원만 하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요란하게 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나는 그저 김갑용의 처지를 알게 된 후 병원비를 도와줄 요량으로 벌인 일이었다.
“병원 로비에 저렇게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도록 부탁하신 분이 바로 도련님이셨습니다.”
그야 좋은 일에 좋은 마음을 보탠 티가 나도록 태성의 임원들을 배려하느라 그랬다.
그들에게 명예는 곧 체면과 자부심으로 직결되는 일이었으니까.
난 송년의 밤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했을 뿐이었다.
“이번에 도련님 덕분에 수술비와 병원비를 지원을 받게 된 태성의 환우 가족이 스물다섯 가구나 됩니다.”
그래서 태성건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외에도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꽤 여럿이 모여 있었던 것이구나.
“애사심을 높인다는 측면에서도, 자부심을 고양시킨다는 측면에서도. 작게나마 이런 행사를 마련하고, 태성을 위한 노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옳습니다.”
송 원장의 말엔 틀린 데가 없었다.
내가 좋은 일에 좋은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던 태성의 임원들 체면을 챙겨주려던 것처럼 송 원장 역시 이번 일을 기획한 내 얼굴을 빛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이, 꼬맹이. 너 뒤에서 몰래 이렇게 좋은 일 하고 다녔냐?”
철구 아저씨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설마 이번에도 의사 가운에 성의를 찔러넣어서 성사된 일은 아니겠지?”
철구 아저씨의 웃음에는 자랑스러움이 번져나갔다.
그때 ‘태성건설’ 작업복을 일제히 맞춰 입은 김갑용과 전(前) 태성화학 직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왔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김갑용을 비롯해 제6공장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태성건설이란 작업복으로 바꿔 입었지만, 그들의 가슴에 박힌 오버로크 명찰 이름은 여전했다.
‘이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동료들을 구했기에 태성화학 화재 사고 사망자는 23명에 그쳤던 게 아닐까?’
같은 화재 사고가 터졌는데 우광화학 화재 사고 사망자는 최종 56명에 이르렀다.
“도련님 덕분에 병원비 문제를 해결했더니, 우리 김 반장님이 요즘 신나서 삽질하신답니다.”
“말도 마세요. 아침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서 일하고, 밤이슬 맞으면서 야간작업을 감독하신다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따님의 수술이 아주 성공, 성공, 대성공이었다지 뭡니까? 태성에 뼈를 묻으시겠답니다.”
김갑용과 그의 아내가 허리를 꾸벅 굽혔다.
“송 원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도련님께서 태성가족 환우를 돕겠다며 이번 행사를 기획하셨다죠?”
감격스러운 목소리였다.
“덕분에 우리 딸이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밀린 병원비까지 전부 해결하고 났더니······.”
“감사합니다, 도련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건들건들 걸어오는 낯익은 인간이 한 명 있었다.
“어이, 김갑용이. 내 돈은 언제 갚을 거야?”
불광동 휘발유였다.
< 화려한 사과, 조촐한 진심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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