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깽판을 부렸으면 깽값을 물어야지 (2) >
똘마니 중 하나가 ‘처음부터 사람들을 죽이려고 불을 지른 게 아니다.’라고 자백했다.
그건 다른 말로 바꾸면 ‘불을 질러서 사람들을 죽였다.’란 뜻이었다.
다른 똘마니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몰래 기름만 잔뜩 뿌려뒀을 뿐이라고요!”
죄수의 딜레마.
공범 중 한 놈이 입을 열면 그놈은 형을 경감를 받는 대신 입을 다문 놈은 가중처벌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공범 중 다른 놈이 입을 열었을 때, 나머지 놈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때 같았으면 건물 조금 타고, 사람들 겁먹어서 순순히 돈 내놓고!”
“화재 보험 들어놓은 것으로 따로 돈 더 챙기고. 그래야 했던 일이었어요!”
자백에 동조하여 형량을 같이 경감받는 게 이득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 다물고 있다가는 가중처벌을 면치 못할 테니까.
반면 불광동 휘발유는 악을 썼다.
“입 닥쳐, 이 새끼들아!”
똘마니들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앞다투어 외쳤다.
“전 그저 형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믿어주세요!”
“재수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도 놀랐다니까요?”
불광동 휘발유가 버둥대며 고함을 쳤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아! 진짜 뒈지고 싶어서 그래?”
“지금 당장 뒈지기 직전이요!”
“차라리 감방을 가는 게 낫지! 이러다 진짜 죽겠다고요!”
똘마니들도 지지 않고 악을 썼다.
서빙고 물고문실에서는 저놈들도 제 목숨을 챙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수사에 협조하는 놈은 선처하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킨다.”
철구 아저씨가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는 일대일 면담이다. 저놈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놈들은 취조실로 데려가.”
“예!”
중정 요원들이 똘마니 둘을 데려갔다.
그들은 취조실에서 진술서를 작성하게 될 것이다.
이곳 서빙고 물고문실에는 불광동 휘발유와 철구 아저씨만 남았다.
“너 뒤에서 뭔 짓을 하고 다녔던 거냐?”
“없는 죄도 자백하게 만드는 게 중정이라더니. 난 모르는 일입니다.”
“글쎄. 담배도 안 피우는 새끼가 품에 토치를 품고 다닐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불광동 휘발유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돈 받으러 다니는 새끼가 기름 냄새를 잔뜩 묻히고 다닐 일이 뭐가 있냐고.”
“되도 않는 소리! 거 선량한 시민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지 맙시다. 나지도 않은 휘발유 냄새 타령은 그만하자고요.”
“그러니까 휘발유로 불 질렀단 소리네?”
“누가······!”
“누구도 휘발유란 단어는 꺼내지 않았어.”
불광동 휘발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속 시원하게 불어. 그래야 감형이라도 받지.”
이미 범행을 시인한 마당에 불광동 휘발유만 입을 다물면 독박을 쓸 뿐이다.
그런데도 불광동 휘발유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는 불광동 휘발유답지 않은 태도였다.
놈은 영악하고 잔인하며 비겁한 놈이었다.
“하나라도 더 부는 게 너한테 가장 유리한 길이라는 거 잘 알 텐데. 왜 계속 입을 다물지? 여기까지 온 이상 지켜야 할 의리도 없을 텐데.”
“의리는 안 지켜도 내 목숨은 지켜야 해서.”
어느새 불광동 휘발유는 존댓말조차 집어치운 후였다.
“그럼. 내가 믿는 구석도 없이 일을 쳤을까 봐?”
“누구야?”
“알면 다쳐. 댁은 감당 못 해. 거물이거든.”
“글쎄, 그런 거물이라면 굳이 너 같은 양아치 새끼 뒤나 봐줄 것 같진 않은데?”
“들어는 보셨나, 운명 공동체? 우리가 그래.”
불광동 휘발유는 부인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제 믿을 구석을 어필하려고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병원 로비에서 태성의 행사를 망친 건가?”
“그런 쥐꼬리만 한 병원에서, 후미진 구석에 조잡하게 붙인 글자와 풍선? 시팔, 간판만 종합병원이지, 무슨 병원에 강당도 없어서 로비에서 그런 행사를 열어.”
사실이었다.
구로동 판자촌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병원.
근방은 공장단지였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는 대개 깃털처럼 가벼웠다.
여차하면 돈 없는 환자들이 병원비를 떼어먹고 도망가기 일쑤였던 곳이었다.
“그냥 아픈 애새끼들이나 우쭈쭈 해주려고 여는 신년맞이 재롱잔치인 줄 알았지. 댁 같으면 그게 진짜 태성의 행사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지금 황당한 게 누군데 그래?”
태성병원은 태성에 인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가 최신식 고압 챔버 시설과 커피 자판기를 보고 놀랐을까.
태성그룹에서 투자금 왕창 받아서 규모 키웠다고, 돈 들어가는 거 보니까 병원 살림이 얼마나 폈는지 확 와닿았더랬다.
“구로병원, 아니, 태성병원? 거긴 기계에 손 끼인 공돌이 공순이들이나, 칼침 맞은 깡패 새끼들이 실려가는, 걸핏하면 장례식장 조문 가는 곳이었다고.”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수술 하나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는 게 더 신기한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저 수술 솜씨 때문에 적자가 잔뜩 쌓여 있던 병원을 태성이 인수했던 것일까.
탕!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말고. 뒷배가 누구냐니까?”
그때 서빙고 물고문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박철구, 거기까지만 해.”
낯익은 얼굴이었다.
철구 아저씨를 고문했던 선배 요원이자, 우리 집 담을 넘어왔다가 처맞았던 놈이었다.
그놈 이름이 뭐랬더라? 서문 뭐시기였는데.
“감찰국장님의 명령이다. 박철구, 뒤로 물러서.”
“이럴 순 없습니다! 이놈들 방화범입니다!”
“박철구, 증거도 없이 함부로 모함하지 마라.”
“증거는 아직이지만 진술서라면······!”
“이거?”
서문 머시기가 구겨진 서류 몇 장을 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라이터를 켜서 서류 끝에 불을 놓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걸 어쩌나. 증거는 물론이고 진술서마저 사라졌네?”
“선배!”
중정 요원 몇이 달라붙어서 철구 아저씨를 붙들었다.
철구 아저씨라면 중정 요원들을 때려눕힐 것도 같은데, 선뜻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중정 요원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참아. 여기서 더 일 키우지 말자, 철구야. 응?”
“선배들까지!”
서문 머시기가 타다 만 진술서 쪼가리를 바닥에 툭 떨궜다.
바닥의 흥건한 물로 서류 쪼가리는 작게 치이익 하면서 젖어 들었다.
“깝치지 마라. 너 그러다 또 저 물통에 처박히는 수가 있어.”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경고한다.”
“지난번엔 뇌물 장부라는 누명이라도 잡았지, 지금은······!”
“야, 박철구. 넌 순진한 거냐, 멍청한 거냐?”
서문 머시기가 불광동 휘발유를 풀어줬다.
“없는 죄도 자백하게 만드는 중정. 네가 그걸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꽉 쥐고 있던 철구 아저씨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서문 머시기는 그런 철구 아저씨를 조롱하듯 놀렸다.
“그래서 네가 아직까지 밖에서 뺑이나 도는 거야. X도 모르는 새끼.”
불광동 휘발유는 보란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뒷배가 좋아. 그래, 이게 돈의 힘이고, 이런 게 권력의 힘이지. 중정 요원들을 머슴처럼 부리네.”
불광동 휘발유는 중정 요원들에게 붙들린 철구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수고. 꼴을 보아하니 배웅까진 못 바랄 것 같아서.”
불광동 휘발유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긁으며 말했다.
“그 진술서 쓴 새끼들 말인데요. 아마 대단한 내용은 없을 겁니다. 끽해야······.”
“닥쳐. 판단은 내가 하니까.”
불광동 휘발유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서문 머시기가 중정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아까 그 새끼들은 물고문실에서 처리해. 확실하게.”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서문 머시기는 불광동 휘발유와 함께 물고문실에서 나갔다.
철구 아저씨가 버럭 외쳤다.
“설마 선배도 얽힌 일이요?”
대답은 없었고, 문은 닫혔다.
“선배들도 얽힌 일이냐고 묻잖습니까!”
철구 아저씨를 붙잡고 있던 중정 요원들 역시 대답하지 못했다.
쾅!
웬 양복 입은 남자가 물고문실 문을 걷어찼다.
“박철구 그만 놔줘라.”
“국장님!”
“감찰국 새끼들아, 내 말 안 들려? 죄도 없는 우리 애 풀어주라니까!”
철구 아저씨를 붙들었던 중정 요원들이 눈치껏 떨어져 나갔다.
국장이라 불린 남자는 물고 있던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바닥에 툭 떨궜다.
바닥엔 서문 머시기가 태우다 만 진술서 쪼가리가 물에 젖어 있었다.
“우광이 나섰다. 부장님이 내려오고 있어.”
국장은 담뱃불을 구둣발로 비벼 껐다.
“답 없는 일이야. 너도 그만 손 떼.”
* * *
미래의 어느 시점인지도 모를 푸른 장면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난 불광동 휘발유에게서 손을 뗐다.
‘방화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태성화학 화재 사고로 죽고 다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내가 왜 손해를 감수하며 동분서주했는데.
방송에서 화재 사고를 접하는 순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마는가.’ 하며 깊이 탄식했건만.
인제 보니 천재지변이나 안전사고가 아니었다.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놈들이 있었을 줄이야.
‘태성화학 화재 사고. 이 새끼들과 우광이 짜고 벌인 짓이라니.’
그렇지 않고서야 우광이 나서서 불광동 휘발유의 뒤를 봐줄 리 없다.
불광동 휘발유가 믿는 구석을 운운하며 지껄이던 말을 보면 확신할 수밖에.
-들어는 보셨나, 운명 공동체? 우리가 그래.
빌어먹을 개새끼들!
‘우광이 중앙정보부를 책임지는 부장을 움직여야 할 정도로 똥줄이 탔다는 말인데.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질 나쁜 사채업자 하나를 빼내겠다고 우광이 중정의 부장까지 움직여?
개가 웃을 일이다.
그렇기에 강한 의문이 들었다.
‘우광은 왜 작정하고 화학 공장에 불을 지른 거지?’
태성화학이라면 또 모를까.
이미 우광으로 넘긴 화학 공장에 굳이 불을 질러서 손해를 자초해?
태성그룹 회의에 따르면 재산상 피해만도 10억에 이른다고 했다.
1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손해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더 큰 이득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자기 공장에 불을 지를 이유가 없다.
미심쩍은 일은 또 있다.
‘진술서를 쓴 똘마니들을 살인멸구로 처리할 때 불광동 휘발유도 같이 처리하면 됐을 텐데.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
우광은 쉬운 살인멸구 대신 중정의 부장까지 움직여서 불광동 휘발유를 빼낸다는 골치 아픈 방법을 택했다.
그럴 때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불광동 휘발유가 우광의 약점을 제대로 잡았다는 뜻이다.’
고작 뒷골목의 사채업자에게 제대로 약점을 잡힐 일이라고 치면 이것밖에 더 있을까.
‘불광동 휘발유는 우광화학 화재를 사주한 범인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보군.’
나 역시 짚이는 사람이 있다.
우광화학 화재를 이용해 더 높은 자리를 탐할 만한 야심가.
이득을 위해 더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던 영악하고 교활한 자.
‘난 심증만 있지 확증은 없다. 반면 불광동 휘발유는 어쩌면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우광이 무리수를 써 가면서 불광동 휘발유를 구하려 들까 싶다.
‘우광은 작정하고 공권력을 움직였다.’
철구 아저씨가 이놈들을 중정에 끌고 갔는데도 쉽게 풀려나왔다.
국장까지 답 없는 일이라며 손 떼자고 할 정도면 말 다 했다.
‘화재 사고에 우광이 이리 깊게 연루되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청와대가 극노한 사건인 만큼 우광에겐 결정적인 목줄, 빠져나갈 수 없는 덫, 그 자체가 될 수 있겠어.’
문득 철구 아저씨가 적어 내린 진술서 갱지가 황금빛으로 빛났던 게 떠올랐다.
재앙 같은 화재 사고가 터지면 손해를 입으면 입었지, 태성이 무슨 이득을 보겠냐고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우광의 목줄을 잡고, 죗값까지 두둑이 뜯어낼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장사로군.
‘깽판을 부렸으면 깽값을 물어야지.’
이제 남은 고민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 내 식대로? 아니면 재벌가 식대로?’
재벌들은 보통 공권력을 동원하여 일을 처리하곤 한다.
경찰, 검찰, 중정을 움직이고, 법무팀을 동원하고, 재판부와 언론에 압력을 행사하고.
말 그대로 합법과 편법을 동원하여 권력과 시스템으로 묻어버리는 거다.
‘아무래도 판을 더 키워야겠군.’
우광이 할 수 있는 일은 태성도 할 수 있다.
우광이 나서야 하는 일이라면 태성도 나서도록 만들면 된다.
‘그럼 처음은 내 식대로 풀어 볼까?’
내가 주로 쓰던 방법이라면 아주 심플하다.
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는다.
2. 조진다.
3. 얽힌 놈들 죄다 줄줄이 엮어 조진다.
봐. 깔끔하지?
물론 재벌가의 방식도 끌어다 써야겠지.
원래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 깽판을 부렸으면 깽값을 물어야지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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