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광 침몰지계 스타트 >
“김 비서님, 할아버지를 찾아가긴 아직 일러요. 그건 확실한 증거부터 얻은 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나는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심증만으로는 안 돼요. 확실한 증거는 물론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인수 계획서까지 완벽하게 작성해서 같이 보고하는 것으로 하죠.”
“훌륭하십니다.”
“그게 김 비서님의 일이고, 판단은 할아버지의 몫이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김 비서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나는 김 비서의 명함을 쭉 밀었다.
“우광의 약점을 회수하려고 해요. 김 비서님이 저와 함께 해주셨으면 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로 넣어두십시오.”
김 비서 역시 내 쪽으로 명함을 밀었다.
“태성의 미래를 위한 대계인데, 제가 마땅히 도와야죠. 그러니 부탁이란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김 비서만큼은 내가 이번 일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줘야 한다.’
할아버지 앞에서 내 공을 주장할 생각이거든.
‘고작 여덟 살짜리인 내가 스스로 공을 주장하는 것보다 김 비서가 증언해 주는 게 백배 낫다. 신뢰도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할아버지는 공에 따라 포상하시는 분이랬다.
‘우광의 계열사를 집어삼키게 된 일에 내 공과 기여도가 절대적이었음을 어필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날로 먹겠다고 들면 날도둑놈이지만, 공에 따라 논공행상을 받으면 포상이 되는 법.
내 몫은 내가 챙겨야지!
일부러 김 비서를 찾아온 까닭이었다.
“김 비서님, 몇 분이나 드릴까요?”
“예?”
“남은 회사 업무는 비서들에게 배분하고, 불광동 휘발유에 관한 조사는 유종태에게 맡겨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1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역시 김 비서!
이거 아주 든든하구만!
* * *
저승사자가 안내한 곳은 미아리 텍사스촌이었다.
이곳은 청량리, 천호동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3대 환락가 중 하나였다.
1960년대 종로3가의 집창촌이 폐쇄되며 흘러들어온 직업여성이 대거 이주해 형성된 곳으로, 90년대의 전성기를 거쳐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에 따라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야성, 그 자체!
“오빠, 우리 가게로 와요. 잘해줄게.”
“예쁜 아가씨들 많아요. 오늘밤 같이 한 잔 어때요?”
화려한 네온사인과 빼곡하게 늘어선 가게.
호객행위를 하는 업소 아가씨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긴 한때 남산 찰거머리가 관리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관리하고 있으려나?’
여자를 밝히던 놈답게 남산 찰거머리는 이쪽을 꽉 잡아서 음지의 거물이 되었다.
서울 3대 사창가는 물론 강남과 청담으로 대표되는 고급 회원제 클럽도 여럿 운영하던 거물 포주였다.
‘쯧, 역시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니까.’
나만큼이나 김 비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도련님께서 오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만.”
“불광동 휘발유가 맡긴 물건만 찾으면 전 바로 퇴장할게요. 김 비서님과 태성그룹 경호원 아저씨들은 마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셔도 좋아요.”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도련님!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오해십니다! 우리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겁니다!”
그런데 맨 뒤에서 신입 경호원에게서 눈치 없이 중얼거리는 본심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곧 퇴근 시간이잖습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커헉!”
신입 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선배들에게 질질 끌려가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때, 김 비서는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서둘렀다.
“미아리꽃 여인숙이라고 하셨죠?”
저승사자가 불광동 휘발유의 애인이 지내고 있다고 알려준 곳이었다.
[저기다. 저 여관의 지박령이 제보했다.]
저승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불광동 휘발유란 놈이 며칠 전에 이곳을 찾아와 애인에게 쪽지를 전하고 뒤를 부탁했다는군.]
띵동. 띵동.
덜컥덜컥.
“현관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창문도 없고, 안에 사람도 없습니다.”
“문이라고는 오직 현관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보고했다.
김 비서는 대수롭지 않게 지시했다.
“열어.”
“도련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오함마를 가져오겠습니다.”
“위험하니 뒤로 멀찍이 물러서십시오. 제가 문을 걷어찰······ 도련님, 지금 뭐 하십니까?”
“보면 몰라요? 문 따고 있잖아요.”
난 동전 지갑에 넣고 다니던 철사와 실핀으로 자물쇠를 공략했다.
“그건 또 어디서 나셨습니까?”
어디서 나긴.
한남동 자택 지하실 금고를 딸 때 쓰던 걸 챙겨왔지.
‘이 시대의 자물쇠는 조악하기 짝이 없어서 금방 뚝딱이지 뭐. 내가 소싯적에 이거 따면서 용돈깨나 벌었다니까?’
전당포에서 일하다 보면 잠겨 있는 금고를 따는 건 일도 아니게 된다.
덕분에 요령이 생겨 못 따는 게 없었다.
금고도 따고, 문도 따고, 병뚜껑도 따고······ 됐다!
“아니, 도련님. 인제 보니 병만 잘 따시는 게 아니라 문도 잘 따셨군요!”
“병도 따?”
“예, 김 비서님. 지난번에 도련님께서 직접 잭나이프로 와인병을 따주셨지 뭡니까?”
“잭나이프로? 그러니까 코르크 마개를?”
“그렇게 예술적인 병 따기는 또 처음 봤지 뭡니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신기하더라고요. 진기명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척하면 뽕! 뚝하면 딱!”
날 돌아보는 김 비서의 눈이 뜨거웠다.
나는 현관문을 열며 씩 웃었다.
“덕분에 이웃의 이목을 끌지 않게 되었잖아요? 그럼 됐죠.”
나는 헛기침을 흠흠 해야 했다.
“지금 문 따는 게 중요한가요? 어쨌거나 문이 열렸으니 저 안에서 불광동 휘발유가 숨겨놓은 물건을 찾아 회수하는 게 중요한 거죠.”
“맞습니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앞장서서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도련님께선 멀찌감치 비켜서 계십시오.”
“집을 뒤집어엎을 겁니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가 요란하게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일을 이렇게 과격하게 해요?”
“도둑이 얌전하게 집 뒤지는 거 보셨습니까?“
“도둑이라면 응당 장롱과 궤짝, 이불장부터 뒤지고 보는 거죠.”
김 비서는 차갑게 웃었다.
“우리가 여기 초대받아서 온 건 아니잖습니까. 후딱 뒤지고 물건만 챙겨서 바로 빠지죠.”
뭐 그게 도둑질의 국롤이긴 하지만.
‘굳이 그런 고생과 난장판을 자초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나는 집 안을 쓱 둘러보았다.
‘찾았다!’
유독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곳이 있었다.
나는 쌀독의 항아리 뚜껑을 열고 팔을 넣어 휘휘 저었다.
바스락거리는 검은 비닐봉지가 손에 잡혔다.
비닐봉지 속에는 악필로 휘갈겨 적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불광동 휘발유가 적은 친필 진술서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김 비서님, 이것 좀 보세요. 찾았어요!”
“이렇게 빨리?”
김 비서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단번에 찾으셨습니까?”
“······보물찾기?”
“······.”
뭐? 왜? 뭐!
보물 찾은 거 맞지!
황금빛이 이쪽에서 번쩍였다고 말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물건은 찾은 것 같으니 이만 철수하죠.”
“예!”
* * *
김 비서는 차 뒷좌석에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도련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불광동 휘발유가 잡고 있다는 우광의 약점. 우광화재 방화 교사였습니다.”
불광동 휘발유가 애인 집 쌀독에 숨겨 놓은 종이는 모두 세 장이었다.
“이건 밀명에 대한 진술서입니다. 김갑용이란 태성화학 인부에게 접근해 사채를 빌미로 화학 공장에 불을 내도록 지시하려 했다는데, 막판에 그가 퇴사하며 일이 크게 어그러졌다는 내용이군요.”
김갑용을 불러다 해당 내용에 대한 증언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김 비서는 다음 장을 넘겼다.
“이건 우광화학 공장 내에 인화성 물질을 반입하게 된 경위서입니다. 우광화학의 이름으로 현무 화학에 아래와 같은 주문을 했다는데. 꽤 자세합니다.”
태성화학은 현무 화학에서 일부 원재료를 납품받곤 했었다.
“현무 화학이 얽힌 일이니 이 역시 조사하면 밝힐 수 있겠네요.”
“다만 이건 불광동 휘발유의 범행을 증명하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우광이 방화를 지시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불광동 휘발유가 우광을 협박하려고 작심한 거죠. 혼자 죽기 싫었을 테니까요.”
김 비서가 내민 다음 장은 다음과 같다.
<이건 맛보기일 뿐이고. 당신이 우광화학 화재 사고의 배후란 결정적인 증거는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장담하는데,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인제 와서 꼬리를 자르려고? 그럼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그럴까 봐 내가 따로 안배를 해뒀거든.>
김 비서는 미간을 구겼다.
“어떻게든 우광과 엮어보려고 발악하고 있긴 합니다만, 배후에 관한 증거랄 게 딱히 있을까 모르겠군요. 이게 사실인지 허풍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허풍이라도 상관 없지 않나요?”
“예?”
“어차피 협박용이잖아요. 우광만 흠칫하면 그만이에요.”
불광동 휘발유가 이런 것을 애인에게 맡긴 까닭?
혹시라도 독박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살인멸구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만일 날 모른 척한다면 이건 언론과 경찰서, 검찰청, 중앙정보부에 지금과 같은 내용의 투서가 날아들겠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어쨌거나 우리는 한배를 탄 운명의 공동체잖아? 공범끼리 도와야지.>
<내가 멀쩡하게 나가면 저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투서로 날아들 일은 없어. 약속한다.>
<이만하면 날 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아?>
우광이 무리수를 써가면서 불광동 휘발유를 중정에서 꺼냈던 진짜 이유였다.
우광은 가진 게 많았고, 언론과 청와대가 반응하여 경찰과 검찰이 대거 투입되면 X되게 생겼으니까.
“같이 들어 있던 물건입니다. 우광건설 최 비서의 명함이죠. 아마 투서는 이곳으로 보낼 예정이었을 겁니다.”
똥빛이 도는 명함이었다.
대체 불광동 휘발유는 이걸 어떻게 손에 넣은 걸까.
방화라는 뒤가 구린 일을 시키면서 미쳤다고 제 명함을 내어줄까.
자칫 공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토끼는 도망칠 굴을 여러 개 파놓는다더니.’
애인 집에 결정적인 증거를 맡겨놓을 줄 알았는데, 놈은 그보다 더 영악하게 머리를 굴렸다.
“일개 사채업자가 우광건설 최측근의 명함이 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죠. 그러니 수사기관에서는 의심쩍은 정황이라 여길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범행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광으로선 이런 걸 받게 된다면 상당히 섬뜩한 기분이 들겠네요?”
그게 협박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그래서 통했을 것이다.
“우광은 가진 게 많아서 잃을 것도 많아요. 만에 하나 저 투서를 무시하지 않고 뒤를 파헤치는 자가 생긴다면 골치 아플 거란 말이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우광이 덮어놓고 서빙고 물고문실에서 불광동 휘발유를 허겁지겁 빼냈던 이유였다.
“그럼 그 협박, 우리도 해봐요.”
“예?”
“만일 이 투서와 명함이 최 비서가 아니라 다른 주소로 보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련님, 설마······!”
“우광의 김 회장님께 보내세요.”
“······!”
김 비서가 입을 떡 벌렸다.
“우광의 김 회장님이 이걸 받고도 가만히 있을까요?”
“도, 도련님!”
“우광화학 화재 때문에 청와대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렀고, 재산상의 피해는 10억이 넘는데다, 사망 보험금과 피해보상금 문제로 예정에 없던 지출이 늘었으며, 노조가 들썩이는 상황에 우광의 주가마저 폭락하게 됐는데요?”
김 비서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우광에서 우광화학에 방화를 교사한 일이에요. 김 회장님이라면 눈 돌아가서 배신자를 잡겠다고 날뛸 것 같지 않아요?”
차도살인(借刀殺人)
이거 내가 아주 좋아하는 단어라니까.
“이 역시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협박하는 데에는 상관없잖아요?”
우광 침몰지계(沈沒之計) 첫 단계. 스타트.
< 우광 침몰지계 스타트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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