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93화 (93/189)

< 이걸 방송으로 터뜨려? >

따르릉. 따르릉.

“시팔, 이 새벽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이 지랄이야?”

새벽 4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불광동 휘발유는 짜증을 버럭 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댔다.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던 불광동 휘발유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뒈지고 싶어?”

“나에요! 여기 큰일 났단 말이에요!”

애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야, 지금 4시야! 술 마셨으면 곱게 잠이나 쳐 자!”

“어떡해.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나 봐. 온 집안이 쑥대밭이야. 나 너무 무서워. 으흐흑.”

“훔쳐 갈 것도 없는데 도둑은 무슨.”

불광동 휘발유는 심드렁하게 하품했다.

“속옷이나 훔쳐 갔나 보지. 유난 떨지 말고 끊고 잠이나 자. 내일 얘기 해.”

“비상금도, 반지도, 속옷도 전부 그대로란 말이에요. 딱 하나 사라진 게 있는데······.”

“설마······!”

잠이 확 달아났다.

“쌀독에 넣어둔 물건이 사라진 건 아니겠지?”

“맞아요. 바닥에 검정 비닐봉지가 굴러다니고······.”

“이런, 시팔!”

불광동 휘발유는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목숨줄이 털렸다고?’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불광동 휘발유는 즉시 여행 가방에 돈과 물건을 마구잡이로 쑤셔 담기 시작했다.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한쪽 팔에는 점퍼를 끼우고, 다른 팔에는 여행 가방을 둘러매고 그렇게 용수철처럼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이, 불광동 휘발유. 뭐가 그렇게 급해?”

불곰 한 마리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불광동 휘발유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불곰 같은 남자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이미 뼈에 새긴 후였으니까.

“중정에서 나왔다.”

불곰 같은 남자는 품에서 <중앙정보부 공안국 소속 요원 박철구>라는 신분증부터 들이밀었다.

“주, 중정에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제보를 하나 받았거든.”

박철구는 품에서 종이를 두 장 꺼냈다.

친히 적은 진술서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불광동 휘발유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왜 당신 손에······! 나머지 한 장은 또 어쩌고······!”

“오, 여기에 한 장이 더 있었나 봐?”

“그, 그게······!”

“털어놔야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에잇, 시팔!”

불광동 휘발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딜 튀려고?”

빠악!

“커헉!”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불광동 휘발유는 꽥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중정은 경찰이랑 달라서 미란다의 원칙 따윈 안 읊는다. 참고해.”

박철구가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보다 자세한 대화는 중정에서 나누자고.”

“크흑! 이거나 먹······ 켁!”

불광동 휘발유가 움켜쥔 흙을 뿌리고 달아나려는 순간,

퍽!

솥뚜껑 같은 주먹이 명치에 꽂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력한 한 방!

불광동 휘발유는 게거품을 물며 주저앉았다.

“너 성질머리에 비해 허우대는 영 부실하구나?”

울컥해서 쏘아 붙이고 싶었으나, 불광동 휘발유는 냅다 얻어맞은 뒤통수에 그만 눈앞이 깜깜해져서 픽 쓰러지고 말았다.

박철구는 기절한 불광동 휘발유의 손에 수갑을 채우면서 혀를 찼다.

“새끼, 그간 뒤가 구린 짓을 많이도 하고 다녔던 모양이네. 겁도 없이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대뜸 야반도주나 하려 들고.”

박철구는 불광동 휘발유의 이마를 탁 쳤다.

“어쨌거나 유치장 대신 서빙고 물 고문실 확정.”

이 새끼,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박철구는 불광동 휘발유의 수갑 찬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김 비서의 말이 떠올랐다.

-불광동 휘발유라는 자가 상습적인 방화범이라는 정황과 증거를 포착하고 제보합니다.

김 비서는 복사본 두 장을 내밀었다.

쌀독에게 찾아낸 경위서와 진술서였다.

-청와대에서도 예의주시하는 중요 사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참에 위에 눈도장을 찍는 것은 어떠십니까?

-저기, 호의는 감사하나 제가 공안국 소속이라서 말입니다. 이런 건 감찰국이나 정보국을 찾아가 보십시오.

-태성이 감찰국이나 정보국 요원 하나 움직이지 못해서 공안국 소속인 박철구 씨를 찾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태성이 내미는 호의를 굳이 거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철구 씨 본인부터 챙기셔야죠.

김 비서는 두툼한 서류도 함께 건넸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언제까지 공안국에서 간첩이나 때려잡는답시고 뺑이 치실 겁니까?

유종태가 종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모은 불광동 휘발유의 죄목과 피해자 진술서였다.

-슬슬 위로 올라가실 때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정보국에 자리 하나 알아봐 드리지요.

정보국은 중정에서도 실세로 손꼽히는 부서였다.

-제게 왜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대체 뭘 원하시기에.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이건 박철구 씨에게 보내는 뇌물이 아닙니다.

-그럼······.

-박철구 씨가 먼저 우리 태성에게 건넸던 호의에 대한 보답입니다.

-예?

-우광건설 뇌물 장부라고 하면 알아들으실까요?

김 비서는 웃었다.

-박철구 씨의 출셋길은 우리 태성이 열어드리겠습니다.

불광동 휘발유를 내려다보는 박철구의 눈빛은 복잡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죄 없는 놈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일단 족치면 뭐든 알아서 불겠지.”

박철구는 콧노래를 불며 불광동 휘발유를 지프차에 실었다.

부르릉!

* * *

다음날 우광건설 사장실.

출근 후 첫 보고를 받다 말고 우광건설 김 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뭐야? 뭐가 날아왔다고?”

“익명의 투서가 날아왔습니다. 제 앞으로 이렇게.”

최 비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째 내밀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독수리처럼 투서를 낚아챘다.

“이런 빌어먹을!”

우광건설 김 사장은 세 장의 투서를 와락 구겼다.

“이 새끼가 갑자기 쥐약을 처먹었나! 나한테 이딴 걸 보낸 저의가 뭐야!”

협박 외에 다른 의도가 있을 리 있나.

우광건설 김 사장이 그걸 몰라서 되묻는 게 아니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열불이 터져서 그랬다.

“원하는 게 뭐래? 돈? 여자? 아니면 명함 내밀 만한 자리?”

최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일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하고 뒤를 캐봤더니만······.”

“왜 말을 하다 말아? 무슨 일인데? 뭐가 문제야?”

“불광동 휘발유와 그 패거리가 어제 새벽 중정 요원에게 잡혀갔다고 합니다.”

“뭐? 중정에 끌려가?”

“서빙고 물 고문실에서 취조받고 있다는군요.”

“이런 빌어먹을!”

우광건설 김 사장은 신경질적으로 구긴 종이를 내팽개쳤다.

화가 나서 구둣발로 종이 뭉치를 콱콱 밟았다.

아무리 씩씩대며 화를 내도 그런다고 일이 해결될 리는 없을 터.

“최 비서, 당장 중정에 전화 넣어!”

“누구에게 넣을까요?”

“감찰국장에게! 거기 그 누구냐, 서문 뭐시기 한 놈! 그놈 붙이라고 해!”

“하지만 불광동 휘발유를 끌고 간 놈은 공안국 요원이라는데요.”

“공안국장 그 꼬장꼬장하고 뻣뻣한 새끼는 우리 말을 들어 처먹질 않으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버럭 외쳤다.

“인제 와서 공안국장을 구워삶느니 말 통하는 감찰국장을 움직이는 게 더 빨라!”

“공안국장과 감찰국장은 앙숙과 다름없습니다. 공안국장이 쉽게 불광동 휘발유를 내놓을 리 없습니다.”

“감찰국장으로도 안 되면 그 윗선을 움직이면 돼!”

우광건설 김 사장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서빙고 물 고문실로 끌려갔다면 그놈 얼마 못 버텨! 백척간두(百尺竿頭)인 상황이라면 죽기 살기로 우광을 물고 늘어질 게 분명해!”

진짜로 이런 투서가 언론과 경찰서, 검찰청과 청와대로 날아들면 낭패를 면치 못한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걸 수습하느니 중정을 움직여 일을 덮는 게 훨씬 빠르고 쉽고 싸게 먹힌다.

“사장님, 이걸 어쩌죠? 중앙정보부 윤 차장은 현재 청와대의 밀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나가 자리를 비웠다는군요.”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평소 뇌물을 듬뿍 먹여 호형호제하던 중정 차장이 마침 이럴 때 지방에 갔다니.

악재가 거듭되고 있었다.

‘우광화학에 그만한 화재가 터졌는데, 어떻게 형님은 총수 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청와대에서 그걸 곱게 보아 넘길 리가 없는데?’

끌어 내렸어야 할 목표는 멀쩡한데, 제 발밑만 위태롭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니 김 사장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어쩔 수 없군. 중정 차장을 움직일 수 없으면 부장이라도 움직여야겠다.”

“김재국 부장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사시켜 봐야지! 달리 방법이 있어?”

우광건설 김 사장은 눈을 번뜩였다.

“올해 7월에 대선이 있어.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 야당과 군부대까지 정치자금 때문에 들썩인다!”

대선이란 건 돈 먹는 하마다.

전국 노인정과 온갖 단체를 돌며 선거유세를 치른다.

거한 잔칫상을 차려주고, 고무신 하나라도 일일이 돌리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려야 하는가.

“중정을 통해 청와대로 정치자금을 올린다는데, 그놈이 외면할 수 있겠나?”

정치자금을 조달해 오는 것 또한 실적이자 공이었다.

반면 정치자금 전달을 거부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다면 최측근이라는 중정 부장도 불호령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라 확신했다.

“당장 금고 열어서 사과박스 가득 채워 놔.”

“사장님, 갑자기 그리 많은 정치자금을 내놓게 된다면 우광건설 자금 사정이······.”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야?”

우광건설 김 사장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니야! 그래야 후일을 도모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최 비서가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정치자금을 받으러 나온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중정의 김재국 부장이 과연 청탁을 들어주려 할까요?”

“김 부장의 몫으로도 따로 두둑하게 준비해 둬.”

우광건설 김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깟 밑바닥 사채업자 하나 입막음시키는 수고에 비해 떨어지는 수고비가 훨씬 짭짤해. 그러니 마다할 리 없지.”

우광건설 김 사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참에 중정에 단단하게 끈 하나를 더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군.”

돈을 먹였으면 돈값을 해야 하는 게 이 바닥 생리였다.

우광이 중정 부장을 호출하려면 그만한 돈부터 준비하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김재국은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 부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야. 듣자 하니 일 처리 솜씨가 아주 깔끔하다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덮는 기술이 가히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는 위인이었다.

“김재국 중정부장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주 커.”

아마 불광동 휘발유의 투서마저 깔끔하게 덮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중정이라고 하면 경찰과 검찰은 물론 언론마저 한 수 접어줄 정도니까.

“아직도 연결이 안 돼?”

최 비서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눈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계속 통화 중이라고 하는군요. 연락처를 남기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다고 보좌관이 말하는데, 어쩔까요?”

“높으신 분께서 귀찮게 손가락을 놀리게 만들면 쓰나. 연결될 때까지 계속 걸어.”

똥줄이 타는 것은 중정 부장이 아니라 우광건설 김 사장이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바쁘단 핑계로, 군기 잡는다는 이유로, 아쉽지 않은 사람은 배짱을 튕기기 마련이었으니까.

벌컥!

“큰일 났습니다!”

우광건설 사장실에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인간이 있었다.

비서실 소속 신입 비서였다.

“누가 함부로 들어오라고 했나! 최 비서, 직원 교육 똑바로 못 시켜?”

“사장님, 최 비서님! 지금 뉴스에서······!”

“뉴스?”

최 비서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달려갔다.

텔레비전을 켜자, 뉴스 속보가 커다랗게 떴다.

-속보입니다. 우광화학 화재가 단순한 안전사고가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방화였다는 소식입니다!

화면에 크게 <우광화학 화재, 계획된 방화였다!>라는 자막이 올라왔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소식이 속속 터졌다.

-범인이 우광화학의 이름으로 현무화학에 인화성 물건을 주문했다는 진술서를 토대로······.

-대통령은 경찰서장과 검찰총장을 불러 진상 규명에 총력을 다하라는 지시를······.

-우광화학 참사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털썩.

우광건설 김 사장은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믿을 수 없었다.

“나한테 얻어먹은 뇌물이 얼만데! 방송국 새끼들이 일말의 언질도 없이 이걸 바로 방송으로 터뜨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 이걸 방송으로 터뜨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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