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95화 (95/189)

< 결전의 시간 >

‘좋아!’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를 끊었다.

‘우리 철구 아저씨가 우광화학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게 됐다!’

지금 언론에서 우광화학 화재 사고를 안전사고가 아닌 방화란 의혹에 불을 지피고 있다.

우광화학 화재 사고의 사상자가 많은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모여 있는 상황.

국민들 앞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게 된단 소리였다.

‘일개 중정 요원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리는 중정 전체가 철구 아저씨를 밀어줬다는 뜻이다. 윗선의 지시가 있지 않고서야 어림없는 일이지.’

이 정도로 힘 있는 윗선을 움직일 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김 비서!

태성이 밀어주겠다던 약속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다.

‘이름값이 힘이고, 경력이 곧 권력인 자리다. 철구 아저씨, 이제 그 실력으로 어디 가서 까이고 살진 않겠어.’

하여간에 서문 머시기!

철구 아저씨를 아주 우습게 알더라니까?

‘우광이 덮으려던 일을 얼마나 낱낱이 캘 수 있는가에 우광의 침몰 정도가 달렸다.’

아무리 큰 배라도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가라앉을 수밖에.

작은 구멍이라면 어떻게든 때워도 큰 구멍엔 속수무책!

재계 9위라는 큰 배에 올라탄 우광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였다.

‘우광은 여기서 어떻게 탈출하려나?’

언론이 집중포화를 시작했다.

중정이 밀어주고, 청와대가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정치인은 외면한다.

사면초가에 진퇴양난인 상황이었다.

‘똥줄이 타고 있는 것은 확실하겠고.’

아마도 연일 대책 회의를 강행하느라 무척 바쁠 터였다.

결론적으로 몸통이 살려면 꼬리를 잘라낼 수밖에 없을 테지만.

‘잘라내려는 꼬리가 고작 불광동 휘발유에서 끝난다면 곤란하지.’

내가 김 비서를 포섭한 이유였다.

태성의 힘을 이용해서 우광을 절벽 끝까지 몰아세워야 한다.

‘물론 우광의 김 회장도 익명의 투서를 받은 후다.’

김 비서의 솜씨라면 흔적도 없이 편지 한 통 배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터.

‘거기엔 최 비서의 명함까지 동봉해서 보냈으니. 형제끼리 개싸움이 나는 건 피할 수 없겠네.’

딱.

‘어이, 수호신.’

[일일연속극······.]

‘그게 싸움 구경보다 더 재밌어?’

[그, 그건······!]

‘이쪽은 우광의 계열사를 몇 개나 날로 먹느냐가 달린 싸움, 저쪽은 녹화한 연속극을 언제 보느냐가 달린 일. 그래도 안 갈래?’

저승사자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슬쩍 흔들었다.

‘약속대로 네가 좋아하는 일일연속극을 이렇게 녹화해 뒀거든.’

[오오오오!]

‘하지만 일하지 않은 자에겐 녹화 테이프를 보여주지도 말라. 당연한 소리지? 다녀온다. 실시!’

[실시!]

저승사자는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 * *

저승사자는 돈지랄의 끝판왕이라는 제주 현무암 10층 돌담과 20미터에 달하는 철문 앞에 섰다.

종로 삼청동에 위치한 우광 김 회장 저택의 정문이었다.

부지 약 1,200평에 2층짜리 건물 연면적이 약 900평.

정문 앞에는 신문과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와 리포터, 카메라맨이 장사진을 이뤘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그들은 ‘특종!’을 외치며 의지를 불태웠다.

“에취! 특종 잡으려다 사람 잡겠다. 입 돌아가겠는데?”

“보온병에 가져왔던 커피도 다 얼었습니다. 어우, 추워!”

“가서 호빵이랑 데운 두유라도 좀 사와. 그거라도 좀 먹자.”

“그나저나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꿈쩍을 안 하시네. 말이 안 되잖습니까?”

너무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각까지 기자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기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지고 있는데, 그룹 차원에서 대책 회의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광화학 화재 사고가 터질 때랑은 행보가 너무 다르잖아.”

“그땐 계열사 임원들 전부 불러다 대국민 사과를 한 위인이 이번엔 왜 침묵을 택했지?”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특종의 의지를 불태우는 까닭이었다.

“뭔가 냄새가 나.”

“그래, 음모의 냄새다.”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는지 감이 안 온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진 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정문 앞에서 기자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신문 1면 기사! 특종은 내 차지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옆집 주차장을 통해 고급 세단이 몇십 대나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우광그룹 핵심 계열사 사장들의 차였다.

탁.

우광건설 김 사장과 최 비서가 차에서 내렸다.

최 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도 우리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이대로 우리와 손절하고 살길을 모색하려는 모양입니다.”

“뇌물 받아먹을 자격도 없는 새끼들.”

“사장님,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만일 불광동 휘발유를 사주한 게 사장님임이 밝혀지면······.”

“어허, 큰일 날 소리! 난 그딴 놈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우광건설 김 사장은 딱 잘라 말했다.

“세 장짜리 익명의 투서가 뭐라고.”

최 비서에게 보낸 익명의 투서엔 명함이 빠져 있었다.

김 회장에게 보낸 것과는 달리.

“증거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해.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겠지만.”

“사장님, 그럼······.”

“형님께서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꿈쩍도 않고 있는 동안, 내가 왜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겠어? 계열사 사장들을 만나 뜻을 모았지.”

우광건설 김 사장의 얼굴에 피곤이 짙게 깔린 이유였다.

“뇌물을 딴 놈들 입에만 처넣은 줄 알아? 내 사람한테는 훨씬 더 많이 먹였어.”

지금껏 호시탐탐 총수 자리를 노린 세월이 얼만데.

우광건설 김 사장은 사내 정치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판사판 기호지세야. 형님이 배신자를 색출하는 것보다 내가 형님을 끌어내리는 게 더 빠르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쨌거나 다시 잡기 힘든 기회야. 최 비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알았어?”

“예, 사장님.”

“아마 오늘 이후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질 거야. 형님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나 김우석의 시대가 시작될 테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비열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김 회장 저택 후문과 연결된 문이 열리자, 먼저 도착했던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41개 우광의 계열사 중에 28개 계열사 사장들이었다.

“김 사장님 오셨습니까?”

은밀히 포섭한 이후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 세월이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형제보다 더 끈끈하게 지내온 동지들이었다.

그런 계열사 사장들이 먼저 저택에 들어가는 대신 우광건설 김 사장을 기다려 함께 들어가길 택했다는 건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래서 우광건설 김 사장이 흡족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30년이 넘도록 이날만을 기다렸다.

“결전의 시간입니다. 이만 들어가십시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처럼.

우광건설 김 사장은 어깨와 가슴을 쭉 편 채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 뒤를 28개 계열사 사장들이 뒤따랐다.

* * *

김 회장 저택의 서재.

우광 계열사 사장들이 이열 종대로 소파에 앉아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김 회장은 달빛이 싸늘하게 들어오는 서재 유리창 앞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광의 계열사 사장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말없이 오가는 눈짓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은 물론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마침내 김 회장이 뒷짐을 진 채 입을 떼었다.

“서 사장, 현재 우광의 주가는?”

“우광화학 화재 사고로 약 30%가 일제히 폭락했고, 방화 추정 기사가 뜨면서 적게는 15%에서 많게는 30% 가까이 추가로 더 떨어졌습니다.”

며칠 만에 주가가 반토막 났단 소리였다.

가만히 앉아서 천문학적인 손해를 봤다는 뜻이었다.

“그룹 전체가? 아니면 특정 계열사가?”

“그룹 전체 평균을 보고드린 겁니다.”

우광증권 서 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태성화학 인수 협상에서 주판알을 튕기며 수십억의 이득을 계산했던 남자였다.

“그중에 우광철강의 주가가 가장 많이 떨어졌습니다.”

“어느 정도나?”

“직전 대비 약 40% 선에서 거래를 마쳤습니다.”

“며칠 만에 60% 가까이 주가가 폭락했단 건가.”

끔찍한 수치였다.

우광 계열사 사장들은 믿기 어려운 암담한 상황에 입을 꾹 다물었다.

서 사장은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었다.

“우광철강은 사업 초기부터 막대한 자본금이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가장 양호한 계열사는?”

“우광건설입니다. 지난해 우광 아파트 분양 실적이 워낙 좋았던 탓이죠. 총 20% 정도 떨어진 것에 그쳤으니까요.”

김 회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 사장, 은행과 사채시장에선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대출 연장을 거절했습니다. 원금을 상환하라는 독촉장을 받았습니다.”

이건 주가가 떨어졌다는 소리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다.

대출을 갚지 못하면 은행과 사채시장에 담보 잡힌 우광의 주식이 넘어가게 된다.

“회장님, 어음도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갚기 어렵습니다.”

어음은 기업 간의 외상 계약서라 할 수 있다.

회사 간의 거래에서는 보통 거래 금액이 크기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거액을 주고받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보통 거래 때마다 현금을 지불하는 대신 단기 어음으로 상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성에 지급해야 할 어음액이 너무 큽니다.”

태성과 우광의 경우는 사업상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던지라 어음이 오가는 경우가 특히 더 많았다.

“거기에 태성화학, 아니, 우광화학을 인수할 때 150억이나 단기 어음으로 지급 약속하는 바람에······.”

이 사장은 태성화학 인수를 두고 150억이나 되는 단기 어음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자였다.

하지만 우광의 현금 흐름을 두고 낙관론을 펼치며 인수 합병에 동의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쩔쩔맸다.

“안 그래도 우광의 현금 흐름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우광화학 사망자 및 피해자 보상금을 두고 노조가 들고 일어나며 문제가 심각해지고 말았습니다.”

우광의 다른 계열사 사장들도 깊이 동의하는 바였다.

계열사 전체가 노조 시위와 파업 농성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으니까.

“파업 농성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제품 생산과 판매가 올스톱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장 창고에 쌓인 물건도 못 파는데, 돈 들어올 길이······.”

이 사장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없는데 어음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다른 어음이라면 몰라도 우광화학 어음은 절대로 못 막습니다. 여력이 없습니다.”

김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뒷짐을 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장 사장, 태성과 우광화학 재인수 협상을 벌일 가능성은?”

“재인수 협상이라면 우리 쪽에서 필사적으로 부탁해야겠죠. 부디 좋은 값에 사달라고.”

그는 태성화학을 고작 어음 몇 장으로 먹을 기회가 어디 흔하냐면서 재인수 협상을 필사적으로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였다.

장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우광은 줄도산을 면치 못할 겁니다.”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김 회장은 말없이 유리창만 바라볼 뿐이다.

괘종시계 추가 좌우로 움직이며 내는 째깍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형님, 결단을 내리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이었다.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십시오. 각하께 엎드려 선처를 구하세요. 그래야만 우리 우광이 살 수 있습니다.”

< 결전의 시간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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