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96화 (96/189)

< 일석이조 >

우광건설 김 사장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룹 총수 자리를 두고 개전(開戰) 선언!

그렇지 않고서야 결단이란 단어를 운운하며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을까?

총수 자리를 내려놓고 각하께 엎드려 선처를 구하란 발언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

우광 계열사 사장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잔뜩 굳은 표정이 똥빛처럼 거무죽죽했다.

하지만 우광건설 김 사장은 개의치 않고 손깍지를 꼈다.

“형님, 이렇게까지 문제가 심각해진 이상 청와대에서 우광을 곱게 두고 볼 리 없잖습니까. 제재가 들어올 게 분명합니다. ”

과거엔 문제가 생기면 청와대에서 청와대의 중재가 들어올 거라고 낙관했던 일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우광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9위의 대기업이고, 우광이 넘어지면 국가 경제가 흔들릴 테니까.

“지난번에야 운 좋게 어찌 넘어갔는지 모르나, 이번에도 곱게 넘어가긴 힘들 겁니다. 왜? 여론이 안 좋거든요.”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부는 여론과 민심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제 잘못이 아닌 것엔 칼을 뽑아 써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여론이 저렇게 눈 까뒤집고 떠드는데 이 일을 어찌 덮겠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 못 가립니다. 각하의 분노는 어찌 피하려고요?”

허공에서 김 회장과 우광건설 김 사장의 눈이 부딪쳤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튕길 것 같은 살벌한 눈초리였다.

“우광화학의 화재가 자칫 노동과 인권 운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가장 꺼리는 상황이 시작된 거지요.”

우광건설 김 사장은 계열사 사장들을 돌아보았다.

“민심이 요동치고 시위가 격화되면 분란이 시작됩니다. 그럼 그 원망의 화살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손가락을 들어 천정을 가리켰다.

“청와대는 여론의 비난을 원인 제공자에게 돌리려고 하겠죠. 바로 우리 우광을 향해서!”

천정을 가리켰던 손가락을 김 회장에게 겨누었다.

삿대질이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동안 형님께선 대체 무엇을 하셨단 말입니까?”

명백한 힐난이었다.

“우광의 이미지는 땅에 처박혔고, 우광의 주식은 폭락했고, 우광의 돈줄은 끊긴 데다가, 우광을 위해 일하던 자들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그뿐입니까? 태성의 입에 알짜배기 계열사를 세 개나 공으로 물려주게 생겼습니다.”

계열사 사장들이 서로에게 고개를 기울여 작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태성화학 인수합병 역시 형님께서 강행한 일이었지요. 눈앞에 떨어지는 십수억의 이득에 눈이 멀어 우광의 미래를 날리게 생겼지요. 단기 어음이란 덫에 빠져서!”

“이보십시오, 김 사장······!”

“돈줄이 꽉 막혔는데, 150억이나 되는 단기 어음을 무슨 수로 막습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세 장짜리 ‘태성화학 인수 합병 계약서’ 사본을 흔들며 말했다.

“여기 이 조항 보이십니까? 만일 어음 결제를 포기하고 태성화학 재인수 협상을 요구할 시 사채시장의 룰에 따른다! 담보인 우광증권도 재인수 협상 조건에 갈음하여 처리한다!”

계열사 사장들이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우광화학은 물론 담보로 잡힌 우광증권까지 넘어간단 소립니다.”

여기저기에서 길고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150억을 주는 게 아까워서 우광화학을 날로 먹으려다가 우광건설뿐만 아니라 우광 계열사 전체가 줄도산이 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끝까지 책임을 외면하시렵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손깍지를 끼며 다리를 꼬았다.

“형님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군요. 한 기업의 수장이 내린 잘못된 결단으로 인해 우광의 41개 계열사 전부가 위태로워졌습니다.”

김 회장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계열사 사장들을 슥 훑어보았다.

동생인 우광건설 김 사장은 물론 계열사 사장들이 전부 김 회장만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이 일제히 쏟아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광은 침몰할 뿐입니다. 형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동생인 우광건설 김 사장은 눈을 번뜩이며 각오를 종용하고 있었다.

김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우광의 뜻인가?”

“형님, 이 모든 것은 우광을 위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심정으로 올리는 충언입니다.”

“좋다. 정 그렇다면 우광의 뜻을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겠군. 내가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거수(擧手).”

우광건설 김 사장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으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자신감과 기쁨은 숨길 수 없었다.

“우광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라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계열사 사장들은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서로 힐끔 바라보며 복잡한 눈짓이 오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쉬이 손을 드는 자가 없었다.

“그래, 이까짓 일에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셋을 세겠다. 하나, 둘.”

김 회장의 독촉에 계열사 사장들이 눈을 질끈 감고 결정을 끝냈다.

몇 명의 계열사 사장들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셋. 우광의 뜻, 잘 알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우광건설 김 사장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달랑 일곱 놈밖에 손을 안 들어! 이건 말도 안 돼!”

“우석아, 계열사 사장들은 내가 물러나길 바라지 않는 모양이다. 이게 바로 우광의 뜻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네놈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장밋빛 미래가 무너졌다.

형을 총수 자리에서 끌어내릴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문 앞에서 28개나 되는 계열사 사장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그러니 우광건설 김 사장은 극노하여 삿대질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받아먹었으면 돈값을 해야지! 지금껏 내 돈을 그렇게나 처받아 먹고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날 외면해? 이건 배신이야, 배신! 이거 놔! 놓으라고!”

어찌가 화가 난 모양이던지.

분노로 인해 우광건설 김 사장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질 지경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내가 아닌 형님을 택했어? 형님이 나보다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속에서 열불이 끓는지 목청이 더 커졌다.

“공부도 내가 더 잘했고, 사장단과 임원진 챙긴 것도 나였어! 형이 그 자리에 오른 이유는 딱 하나, 장자였기 때문이잖아!”

원망은 자연스럽게 형에게 향했다.

“사업자금? 아버지 전답을 팔아 치워서 마련했고! 회사 키우기? 형보다 내가 더 고생했어! 잠 안 자고 밥 안 먹어가면서 밤낮으로 우광을 위해 뛰어다녔다고!”

몹시 억울하고 분한 모양이었다.

“고생은 둘이 같이 했는데, 왜 형은 회장이고 나는 꼴랑 건설사 사장이야! 왜 형의 자식은 임원부터 시작이고, 내 자식은 사원부터 시작하는데!”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형님이 높은 자리에서 명령만 내리면 그만일 때, 난 온갖 더럽고 추잡한 일을 해치워야 했어요! 그럼 적어도 내 자식에게는 부와 명예를 챙겨줬어야지요!”

형의 멱살이라도 잡아 주먹다짐이라도 할 기세였다.

“형의 자식이 자존심 세워가며 폼나는 일만 할 때 내 자식은 밑바닥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란 소립니까? 나처럼?”

“네 놈 그릇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쯧쯧.”

“형님!”

“내게 칼을 들이민 대가를 어찌 치르게 될지. 각오는 되어 있겠지?”

우광건설 김 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싸움이 시작된 이상 승패는 갈리기 마련이다.

총수 자리는 하나고, 패자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혀, 형님. 절 어찌하실 겁니까? ”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며?”

“그럼 제가 건설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우광을 대표로 대국민 사과를······!”

“그거 가지고 되겠어? 여론이 들끓고 청와대가 주목하고 있다.”

“혀, 형님!”

그제야 우광건설 김 사장은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우석아, 우광을 위해서다. 한심하게 굴지 마라.”

우광그룹 경호원들에게 붙들린 반역자들의 안색은 시커멓게 죽었다.

“다들 알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아. 내 등에 칼을 꽂는 새끼들까지 보듬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서.”

배신자를 처리하는 가장 심플한 방법.

그것을 짐작한 계열사 사장들은 표정을 굳혔다.

“들어와!”

김 회장이 외치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정 요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가장 앞서 들어오는 자는 불곰 같은 남자였다.

“중앙정보부 공안국 소속 요원 박철구입니다. 우광화학 방화 사건에 관해 수사 중입니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놈들이야. 끌고 가게.”

김 회장이 총수 사퇴에 찬성했던 계열사 사장들을 가리켰다.

차도살인(借刀殺人).

우광의 김 회장 역시 제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남의 칼로 처리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안 그래도 코너에 몰린 우광에겐 제물이 필요했으니까.

일석이조의 수였다.

“우광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서빙고 물고문실로 데려가!”

반역에 가담했던 계열사 사장들은 기겁했다.

“바, 방화라뇨!”

“저희는 그런 거 모릅니다!”

“그건 언론이 뭣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악의적인 누명입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소립니다! 억울합니다!”

중정 요원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자세한 얘기는 중정 취조실에서 하시고.”

중정에선 있는 죄는 물론 없는 죄까지 자백받는다는 악명이 자자했다.

“잠깐 정신이 나가 선동에 휩쓸렸습니다!”

“맹세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다들 비명처럼 외치며 엎드려 간청했다.

중정 서빙고 물고문실로 끌려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앞이 깜깜했다.

“사직서 쓰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오늘 입과 손을 잘못 놀린 대가는 우광을 위해 치르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여론을 틀어막겠습니다!”

하지만 김 회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광화학 방화에 다들 어디까지 작당했는지 알아내는 게 순서지. 처분은 그 뒤의 일이고.”

붙들린 채 끝까지 발악하는 것은 우광건설 김 사장뿐이었다.

“이거 놔! 난 모르는 일이야! 증거 있어? 없잖아!”

“증거가 왜 없어? 그럼 심증만으로 중정을 불렀을까 봐?”

김 회장은 품에서 세 장의 종이를 꺼냈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익명의 투서가 나한테도 날아왔더군.”

김 회장이 세 장의 투서를 건네자, 계열사 사장들이 서로 머리를 들이밀고 읽어내렸다.

읽을 때마다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김 회장의 심복 십여 명은 이미 읽은 후였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우광화학에 불 지른 놈이 우광의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서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계열사 사장들은 비명처럼 경악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회,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삼십 년을 충성했습니다! 그간의 공을 생각해 자비를······!”

김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중정 요원들에게 끌려 나가는 계열사 사장들을 보았다.

철구 아저씨는 오! 소리를 내며 증거를 반겼다.

“협박 편지까지!”

“명함도 동봉되어 있더군. 우광건설 최 비서의 명함이지.”

“밑바닥 사채업자 따위 우광의 비서 명함을 어떻게 얻었겠습니까? 아주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 같군요!”

지켜보던 다른 계열사 사장들은 일제히 신음을 흘렸다.

그들도 안다.

중소기업이라면 모를까, 대기업은 거물을 만나 한번에 거액을 융통한다.

그러니 하꼬 사채업자를 만날 일도 없고, 명함을 주고받을 일도 없다.

그들은 사는 세계가 다르고, 노는 물이 다르고, 보는 세상이 달랐다.

자연히 계열사 사장들의 분노한 눈은 우광건설 김 사장을 향해 쏠렸다.

“김 사장, 정말 우광화학에 방화를······!”

“난 모르는 일입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악을 썼다.

“명함 주인에게 물어 보라 하십시오! 최 비서 혼자 독단으로······!”

“네가 여기서 헛소리를 떠들고 있을 때, 최 비서는 뭐 하고 있었을 것 같으냐?”

“······!”

“이 집 지하실.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 테고.”

최 비서가 똥줄이 바짝 타서 숨겨둔 비장의 한 수를 꺼내도록.

내가 일부러 최 비서에게는 명함을 보내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이 귀한 건 최 비서도 똑같거든.

“서, 설마······!”

“장 실장, 그 새끼 끌고 와.”

“예, 회장님!”

우광그룹 경호실장인 장 실장이 허리를 굽혔다.

우광그룹 경호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최 비서를 질질 끌고 왔다.

반송장이 된 최 비서는 바닥에 붉은색 흔적을 길게 칠하며 끌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쿨럭!”

최 비서는 피와 침을 뱉어내며 말했다.

“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쿨럭!”

장 실장은 고급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하지만 핏물이 짙게 밴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 실장은 피 묻은 손으로 물건을 건네야 했다.

최고급 사양의 미제 녹음기였다.

달칵.

우광건설 김 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성화학 인부에게 붙였던 그 악덕한 사채업자 말이야.

-불광동 휘발유 말입니까?

-그래, 그놈. 불 지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놈이라며?

-오죽하면 별명이 불광동 휘발유겠습니까? 제 돈 갚지 않은 놈들 집과 직장을 찾아다니면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몰래 불 놓는 솜씨가 예술이라더군요.

마침 저택 밖에는 특종을 건지려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으렷다?

우리 철구 아저씨, 내일 기자회견에 나기도 전에 스타 되겠네.

< 일석이조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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