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99화 (99/189)

< 무엇으로 보답할까? >

할아버지는 서류 봉투를 술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장은 서류 봉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두둑한 성의라기엔 두께가 너무 얇지 않나?”

실망을 넘어 화가 난 목소리였다.

“실장님,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바쁜 사람이야. 알 만한 사람이 이거 왜 이래?”

청와대 경호실장은 손을 들어 할아버지의 말을 막았다.

“각하의 대선이 코앞인 걸 몰라?”

10월 유신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단일 후보만 출마해서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말 그대로 관제 간접 선거가 되었다.

제9대 대선 일정은 이렇다.

올해 5월에 대통령 후보 등록을 받으며, 같은 달 대의원 선거를 치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한다.

이후 7월에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 투표를 실시한다.

‘물론 제9대 대통령 후보는 단독일 테고, 2,578명 대의원 투표 중 단 1개의 무효표로 99.9% 득표율로 당선됐었다.’

이 사실을 청와대 경호실장이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을 들먹이며 할아버지를 압박하고 있다.

의도라면 뻔하다.

“이리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낼 때엔 발걸음이 섭섭지 않을 만큼 두둑한 후원을 준비했어야지. 각하 앞에 내 면을 세울 정도쯤은 되는.”

돈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기대와 다른 선물을 꺼내놓았다는 타박이었다.

“누굴 고작 저녁 한 끼나 얻어먹자고 달려오는 거지새끼로 아나?”

“거지새끼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뭐야? 날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늦은 밤 사람을 불러내서 이깟 서류 봉투부터 꺼내놓을 리가 없지.”

탁.

못마땅한 심기만큼이나 빈 도자기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커졌다.

할아버지를 노려보는 눈이 매섭다.

“태성이 준비한 성의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될 줄이야.”

“이런, 제가 실장님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결례를 저질렀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 주차장으로 모실 것을 그랬습니다.”

할아버지는 차 키를 술상 위에 올렸다.

“대선이 코앞입니다. 각하께 올릴 사과 박스라면 트럭에 쌓아뒀습니다.”

“어흐흠! 그랬나?”

“단지 남들의 이목을 다 끄는 호텔까지 나르기엔 실장님 체면에 조금 껄끄러울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크흐흠! 하기야 사과 박스를 날라대는 모습을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긴 하겠어.”

“누가 감히 오해를 하겠습니까? 이게 다 각하에 대한 실장님의 충심인 것을요.”

“그렇지. 대한민국 하늘 아래 나보다 더 각하께 충심이 깊은 이가 또 누가 있다고.”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도자기 주전자를 다시 들었다.

“실장님께서 이곳까지 걸음 해 주신 것도 전부 각하를 위해서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귀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회장이 내 뜻을 이리도 잘 헤아릴 줄이야. 하하하.”

청와대 경호실장이 몹시 기꺼워하며 크게 웃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던 도자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술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울 수 있었다.

“직접 몰고 가시렵니까? 아니면 저희가 배달까지 맡을까요?”

“장충동으로 보내.”

청와대나 청와대 경호실장의 저택이 아니었다.

서울시 곳곳에 따로 안가를 두어 은밀하게 정치자금을 나누어 받는 것이다.

“사과 박스는 장충동으로. 그럼 경호실장님께 드릴 배 박스는 어쩔까요?”

“배 박스? 설마 내 몫까지 준비했나?”

배 상자가 사과 상자보다 조금 더 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면 곤란해.”

“각하께 올릴 사과 박스만큼은 못 됩니다. 그래도 새해인데 빈손으로 인사를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배는 세 박스밖에 준비 못 했습니다.”

“세 박스나? 하하하, 딱 좋다! 새해 인사라니 이거 안 받을 수도 없고. 자, 자네도 한 잔 받아.”

청와대 경호실장이 무척 기꺼워하며 할아버지의 손에서 도자기 주전자를 빼앗았다.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고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각하와 365일, 24시간을 붙어있는 것은 바로 나야.”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자네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두란 뜻이야.”

청와대 경호실장은 그런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대로 술잔을 꺾었다.

확고한 서열이 눈에 보이는 만큼 청와대 경호실장은 만족을 숨기지 못했다.

“태성의 충심과 애국심에 대해 각하께 말씀을 잘 올려보지. 보내준 성의만큼 내 애써볼 것이야.”

“감사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경호실장의 빈 잔을 도로 채우며 슬쩍 운을 뗐다.

“요즘 각하께선 우광 때문에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시겠습니다.”

“말해 무엇하나? 안 그래도 대선에 집중하셔야 하는 때인데. 우광이 쓸데없이 여론과 민심을 어지럽히는 바람에 근래 각하의 심기가 영 좋지 못하시다.”

“그거 큰일이로군요.”

“우광의 김 회장은 대체 왜 저렇게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 친동생과 계열사 사장들이 연행되었는데도 모른 체 외면하다니.”

“혹시 우광건설 김 사장이 중정에 연행된 까닭에 관해 짐작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떠드는 소리처럼 우광화학 방화에라도 얽혔나 보지.”

“또 있습니다.”

“또?”

할아버지가 술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 봉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청와대 경호실장은 그제야 내내 방치했던 서류 봉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저건 뭔가?”

“우광건설 김 사장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린 뇌물 명단과 치부책입니다.”

“뭐야? 각하께서 정관계 부정부패에 질색하신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뒤로 몰래 장부를 만들었단 말이야?”

청와대 경호실장이 분노하는 핀트는 살짝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정부패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뒤로 몰래 뇌물 장부를 만들어서’였다.

“이건 죽은 우광건설 직원이 작성했고, 현재 우광건설 김 사장을 취조하는 중정 요원이 얻어낸 것입니다.”

뭐? 왜? 뭐!

중간에 뭐가 좀 많이 생략됐어도,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철구 아저씨가 얻어낸 것은 맞지!

“실장님께 드리는 태성의 선물입니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다급하게 서류 봉투를 뒤적였다.

혹시나 제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거슬리는 자를 치워버리는 데 보탬이 되고자 준비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청와대 경호실장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청와대 경호실장의 표정이 느긋해졌다.

“육군 보안사령관과 중정 부장의 명단은 없고?”

청와대 경호실장이 눈에 불을 켜고 견제하는 정적이라면 그 둘을 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장이 아무리 뒤적여도 그 둘의 이름이 적힌 뇌물 명단은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잔챙이들뿐이로군. 이걸 어따 쓰라고?”

나와 할아버지는 두 사람의 뇌물 장부를 꺼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작 뇌물 몇 푼 받아먹었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3인자와 4인자를 숙청할 리 없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선물은 어디까지나 선물로 그쳐야 하는 법.

후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고작 이런 것이 없어도 이런 잔챙이들을 쓸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다. 육군 보안사령관과 중정 부장의 치부 정도는 되어야지. 선물이라며?”

“마저 계속 읽어보십시오.”

행여 뒷장 어딘가에서 정적들의 약점이 섞여있지 않을까 싶었던 청와대 경호실장은 마저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청와대 경호실장은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지 않나?”

아무리 넘겨도 끝이 나오지 않는다.

점점 더 자세해지는 고위 인사들의 치부가 넘겨도 넘겨도 계속 나오니까.

청와대 경호실장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우광건설이 이렇게 뇌물을 많이 뿌렸다고? 일개 건설사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닌데?”

그러니까 말이다.

그동안 태성의 금고를 제 집 금고처럼 꺼내 쓰면서 뇌물을 많이도 처먹였더라.

‘청와대 경호실장이 눈독 들이는 거물의 이름을 빼겠다고 결심한 이상 디테일을 조금 바꿀 수밖에 없었지.’

거물의 명단을 빼돌리는 대신 정관계 고위직 인사들의 명단이라도 잔뜩 채워 올려야지.

질이 떨어지면 양으로 승부해야 하는 법!

그래서 성의였다.

“많이도 받아 처먹었군. 이놈들을 전부 잡으면 단번에 대한민국 국정이 마비될 지경이야.”

당연히 그럴 테지.

아예 우광의 뇌물 장부를 통째로 복사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김 비서가 뒷조사하여 입수했던 온갖 인사들의 비자금 내역까지 꽉꽉 눌러 담았다.

‘이참에 전부 우광건설에 뒤집어씌우고 태성은 깨끗하게 손 털어도 상관없고.’

이럴 땐 뇌물 받아먹은 놈이 많을수록 좋고, 액수가 커질수록 좋으며, 뒤가 더러울수록 좋다.

‘어차피 독박은 우광이 쓸 테니까.’

그래서 더 준비했다!

지하금융계 전대 거물 네 명을 통해 얻은 뒷거래 뇌물 장부는 물론이고, 정관계 인사들의 지저분한 치부까지 모아서 전부 저기에 쑤셔넣었다.

우리 음지쪽 거물들의 주특기가 바로 남의 치부 캐기거든.

힘 있고 돈 있는 놈들치고 뒤가 구리지 않은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내 신조였다.

“기가 차는군.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야!”

청와대 경호실장이 서류 봉투를 내던졌다.

“정작 내가 원하는 놈들의 서류는 없는데, 쓸모도 없는 잔챙이들만 한가득 준비해서 뭘 어쩌라고?”

“실장님, 혹시 호랑이 사냥을 어찌하시는지 아십니까?”

“뜬금없이 여기서 호랑이 사냥 타령은 왜 하나?”

“아무리 유능한 사냥꾼이라고 해도 혼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건 위험합니다. 실장님께서 굳이 홀로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내가?”

청와대 경호실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리 함정을 파놓고, 사냥개를 이용해 몰고, 창꾼을 여럿 준비해 돌아가며 던져 죽이는 게 더 확실하지요.”

“그렇지.”

“여기에 실장님께서 원하시는 이의 명단은 없지만, 여기 있는 이들을 몰이꾼과 창꾼으로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놈들의 목줄을 내게 바치겠다는 뜻인가?”

청와대 경호실장이 눈을 빛냈다.

“왜? 태성이 잡고 있으면 아주 유용하게 부렸을 놈들일 텐데?”

“저는 일개 장사치일 뿐입니다. 제가 목줄을 잡고 흔들어봐야 눈이나 한 번 깜빡하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청와대 경호실장이 내던진 서류를 주워 모았다.

그걸 공손히 봉투에 담아 다시 건넸다.

“원래 목줄은 실장님처럼 힘 있는 자가 흔들어야죠. 그래야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히는 법입니다.”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바라보는 청와대 경호실장의 눈이 점점 탐욕스러워진다.

이제야 저걸 어떻게 쓰면 되는지 깨우친 것이다.

“각하께서는 부정부패 척결을 기치로 삼으셨지.”

“이것이 없어도 저들은 실장님의 말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일이 훨씬 쉬워지겠지요.”

“목숨줄이 잡혔으니 찍소리 없이 내 말을 따를 테고.”

“이들을 일거에 쳐내면 단번에 대한민국 국정이 마비될 만한 숫자입니다. 국민의 여론에도 귀 기울이시는 각하께서 수족을 자처하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충언을 마냥 무시하실까요?”

한마디로 이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너 알아서 정적 제거의 빌미를 만들어보란 뜻이었다.

약점이 없으면 세력으로라도 밀어붙여보란 소리였다.

모로 가도 서울이면 그만인 법.

계획의 디테일은 조금 바뀌었으나, 뇌물 명단으로 ‘정적 제거를 위한 선물’이란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됐지.

“그래, 이렇게 많은 이들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면······.”

청와대 경호실장이 으스러질 듯이 서류 봉투를 구겨 쥐었다.

“하하하하!”

청와대 경호실장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성이 당근도 배 박스로 채워주더니, 채찍까지 내 손에 들려주는군.”

세력 만들기는 언제나 골치 아픈 법이며, 제 사람으로 포섭할 때는 당근과 채찍이 필수다.

“차 회장, 내 이 공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탁!

청와대 경호실장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제 무릎을 쳤다.

“이런 성의를 받고도 모른 척 입 닫으면 개새끼지. 내가 태성에 뭘로 보답하면 좋으려나? 까놓고 말해 봐.”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끼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 이것을 본 적도, 얻은 적도 없는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모든 공을 내게로 돌리겠다?”

“또한 우광화학 화재와 태성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운 공에 비해 욕심이 너무 부족하군. 결백을 주장해봤자 본전치기밖에 더 돼? 뭐가 그리 무섭다고 몸을 사려? 우광 따위가 다 뭐라고.”

청와대 경호실장이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각하께서 우광을 괘씸하게 보아 벼르고 계시다. 배 몇 박스로 내가 거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기엔 부족하니, 우광이라도 뜯어먹을 수밖에.”

쪼르륵.

청와대 경호실장이 할아버지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태성의 몫은 내가 책임지고 큼지막한 것으로 떼어주지. 계열사 한두 개라면 각하께서도 눈감아주실 테고.”

할아버지가 감사하단 소리를 내기 전에 청와대 경호실장이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야. 고작 그거 가지고 배가 차겠어?”

더 큰 것도 내어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 무엇으로 보답할까? > 끝

ⓒ 오소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