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와 담판 짓다 (1) >
태성그룹 본사 회의실.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태성그룹 전(全) 계열사 사장 및 임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뉴스 봤습니까? 우광그룹 김 회장이 총수직에서 물러난다는군요.”
“갑작스럽게 임원회의가 잡힌 건 아무래도 우광 계열사 인수에 관해 보다 심도 깊게 논의하기 위해서일 테고요?”
“태성화학 심 사장이 그래서 이곳에 불려온 거로군요.”
태성의 계열사 임원들은 전(前) 태성화학 사장인 심 사장을 힐끔거렸다.
심 사장의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물어봤다.
“심 사장, 태성화학 재인수에 관해 미리 궁리해 둔 계획은 있고?”
“전에도 말했듯이 보안상 비밀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심 사장은 귀찮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다른 계열사 사장들이 몇 명 합세해서 은근히 물었다.
“지금 이런 기회를 노리고 미리 계약서에 재인수 협상 조건을 걸었던 거 아니었어?”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말자고. 자네의 계획을 알아야 우리도 같이 한 손 보태지.”
“아이디어도 보태고, 회장님을 설득할 때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더 낫고. 안 그래?”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심 사장은 끝내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심 사장이 태성화학을 다시 되찾아온다면 그야말로 금의환향이 따로 없겠어. 미리 축하부터 하지.”
“그렇군! 성준 도련님께서 혼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손도 못 써보고 날린 태성화학을 계약서 하나로 되찾아오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회장님께서 태성화학 인수합병에 관한 전권을 선뜻 내어주는 이유가 있다더니. 이런 순간까지 꿰뚫어봤던 건 아니겠지?”
그때 김 비서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심 사장님, 회장실로 올라가 보셔야겠습니다.”
“그럽시다.”
심 사장은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 문 앞에 도착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역시 태성화학 재인수 때문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쩌면 더 큰 일로 부르셨을지도 모릅니다.”
“더 큰 일?”
심 사장의 표정이 확 굳었다.
“김 비서,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데, 난 우광화학 공장 방화와는 전혀 상관없어. 결백해.”
“알고 있습니다.”
“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도 좋은 일일 테니까요.”
“좋은 일?”
김 비서는 빙그레 웃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회장님께 직접 들어보면 되겠지.”
심 사장 회장실 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김 비서가 팔을 들어 막았다.
“아직입니다.”
“왜? 회장님께서 날 부르셨다며?”
“회장님께선 지금 독대 중입니다. 태성그룹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사안이니 방해하지 마십시오.”
“대체 누구와 독대하시기에 태성의 전 계열사 임원회의까지 내버려두시는 거지? 그럼 나는 왜 부른 거고?”
“그건 들어가 보면 아실 겁니다.”
* * *
태성그룹 본사 회장실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독대했다.
할아버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내게 보냈던 친필 감사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래 봐야 바뀔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정혁이 네가 이걸 왜 들고 있는 게냐?”
“할아버지께서 보내놓고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설마 정혁이 네가 여태 태성을 도와줬······ 도저히 못 믿겠다!”
이게 그렇게 못 믿을 일인가?
“그건 지하철 노선도를 그려주고, 석유파동이라는 정보를 쪽지로 알려준 것에 대한 감사 편지였어요.”
“······!”
“아빠가 대통령과의 술자리에서 술 석 잔과 함께 청와대 신년 오찬 초대장을 받았을 때 보냈던 세 장의 쪽지. 그게 고맙다면서요.”
“······!”
“전 말보단 문서를 더 믿거든요.”
할아버지는 한숨을 깊이 내쉬더니, 편지를 응접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좋다. 말해 봐라. 태성을 위해 공을 세운 만큼 내 확실한 포상을 약속하마.”
“우리 엄마가 결혼할 때 태성화학을 혼수로 들고 갔으면 해요.”
재벌집 혼인에서 따지는 건 결국 집안과 돈 아니던가.
내가 어머니 집안까지는 어떻게 못 해줘도, 남부럽지 않은 혼수는 넉넉하게 마련해서 꽃가마 태워드릴 생각이다.
“아빠가 엄마와 나를 택하는 바람에 우광과의 혼사가 깨어졌어요. 그 일을 가족들은 물론이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어요.”
새해 첫날 떡국을 먹을 때 이미 겪은 일이었다.
내가 미리 고모를 구워삶아서 지원사격을 받아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할아버지가 딱 잘라 일단락시켜버렸음에도 계열사 사장들의 입은 다물었을지언정 눈빛은 변치 않았었다.
-누구 때문에 7년간 공들여 300억짜리 회사로 키운 태성화학을 허무하게 날렸다!
우리 세 식구를 향한 무언의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였다.
우리 모자는 아버지의 앞길을 막은 짐덩이 취급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 흠은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게 될 터였고.
그래서였다.
‘내가 왜 우광침몰지계 3단계를 계획했는데.’
첫째, 우광의 약점 잡기.
둘째, 우광의 치부를 공개하여 침몰시키기.
셋째, 우광의 계열사를 거둬들이기.
‘난 지금 마지막 단계인 계열사 수확을 코앞에 두었다. 반드시 담판 지어야 할 일이지.’
나는 동전 지갑에서 세 장짜리 계약서를 꺼내 할아버지 쪽으로 슥 밀었다.
“태성화학을 넘길 때 특약사항을 몇 개 걸어놨어요. 기억하세요?”
태성화학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였다.
“우광은 지금 태성화학 지분 인수를 위한 단기 어음을 갚을 여력이 없어요.”
우광은 침몰하고 있다.
“남의 떡이었던 화학을 챙기기 위해 없는 돈을 쥐여 짜가며 총력을 기울이진 않을 거예요.”
“그래, 차라리 우광건설을 고의로 부도시켜서 어음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면 또 몰라도.”
“그래도 상관없어요. 부도 역시 어음 지급일 불가능할 때로 간주해 태성화학을 도로 가져오면 그만이니까요.”
나는 씩 웃었다.
“오히려 그럼 더 좋죠.”
“왜?”
“그렇게 되면 재인수 협상까지 갈 것도 없이 계약서대로 태성화학과 우광증권을 날로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부도난 우광건설까지 헐값에 사들이는 건 덤이고요.”
나는 할아버지 앞으로 계약서를 쭉 밀어 넣었다.
“어차피 돈 한 푼 안 들이고 도로 거둬들이게 되는 화학, 그거 우리 어머니 몫으로 주세요.”
“안 된다. 태성화학은 네 아빠 몫이야.”
할아버지는 딱 잘랐다.
“내 새끼 밥그릇을 뺏어다 며느리 손에 쥐여 줄 수는 없지.”
“아버지의 몫이었던 태성화학은 우광에 넘겼을 때 얘기 끝난 거 아니에요?”
나는 인수 합병 계약서의 인수 금액인 ‘150억 어음’이란 부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가 왜 세 장짜리 계약서를 만들었는데요?”
“뭐, 뭘 만들어?”
“굳이 재인수 협상 조건을 갖다 붙였잖아요. 이유가 뭐겠어요?
“설마······!”
“정 못 믿겠으면 심 사장님께 물어보세요. 지금 회장실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심 사장, 거기 있나! 있으면 들어와!”
할아버지가 버럭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회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심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태성화학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 누가 작성했어?”
“정혁 도련님께서 작성하셨습니다.”
“자네가 불러주는 것을 정혁이가 받아적은 것은 아니고?”
“회장님,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제가 타자를 직접 치면 쳤지, 국민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애에게 타자기로 받아쓰라고 시킬 리 없잖습니까.”
“······.”
“게다가 그건 150억이나 걸린 우광과의 인수합병 계약서입니다.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심 사장의 말에 할아버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참고로 재인수 협상에 관한 특약사항도 전부 도련님이 준비하셨습니다.”
“허?”
“제가 그 계약서에 덧붙인 건 거기 아래 친필로 적힌 마지막 특약조항 하나뿐입니다.”
할아버지가 세 장짜리 계약서의 맨 끝을 확인했다.
<태성은 만기까지 어음 체납에 대해 독촉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 담보인 우광증권도 재인수 협상 조건에 갈음하여 처리한다.>
할아버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정혁이 고작 여덟 살이야!”
“예, 저 계약서를 받아든 순간 저도 딱 회장님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현실인데요.”
“허······!”
“역시 회장님의 핏줄은 어려도 남다르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거야 원······.”
할아버지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날 빼닮은 손자라고 해도 그래도 고작 여덟 살짜리가······.”
“그러게 말입니다.”
“여덟 살짜리 애가 우광과의 인수 합병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게 말이 돼?”
“황당하지요? 제가 딱 이런 심정이었다니까요.”
“이렇게 핵심만 꼭꼭 짚은 제대로 된 계약서를 얘가 만들었다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쨌거나 전 사실만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심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새해 첫날에 떡국 먹으면서 발표했던 제 두 가지 소임 중 하나가 바로 태성화학을 되찾아오기였습니다. 그 또한 도련님의 청사진이었지요.”
“······!”
“사실 제가 생각했던 것은 우광과의 인수 협상을 어떻게든 질질 끌면서 그동안 태성화학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려 빈껍데기만 남기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그 말은······!”
“자칫 우광화학이 아니라 태성화학 화재가 날 뻔했습니다. 처음부터 회장님을 총수직에서 끌어내기 위해 계획했던 방화라지 않습니까.”
“으음!”
“제가 식은땀을 얼마나 많이 흘린 줄 아십니까? 태성화학에서 폭발사고가 터졌으면 회장님과 저는 우광 꼴 날 뻔했습니다.”
심 사장이 날 돌아보았다.
“도련님의 선견지명 덕에 재앙을 면한 셈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의 복이고, 태성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우리 정혁이가 복덩이긴 해. 정혁이 황룡 탄 꿈을 온 가족이 동시에 꿀 정도였다니까?”
미신 따윈 절대 안 믿는다는 할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화학은······.”
“그 계약서 덕분에 어차피 날로 먹게 된 태성화학입니다. 도련님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자네가 7년이나 공들여 키운 태성화학이야.”
“그걸 우광에 지분 정리하자고 던진 것은 회장님이셨고, 그걸 되찾아오신 건 정혁 도련님이십니다.”
심 사장은 딱 잘라 말했다.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나이를 트집 삼아 공을 폄하하는 대신 두둑한 포상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날 돌아보았다.
“며느님 이름으로 화학을 넘기고 싶지 않다면 정혁 도련님의 이름으로라도 넘겨주십시오.”
“정혁이 이름으로?”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광이 지분을 정리하겠다고 나왔다면 태성은 150억을 전부 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광의 지분 150억까지 전부 날로 먹게 됐지.”
“욕은 우광이 다 먹고, 태성은 직원도 공장도 지분도 안 잃고 50%라는 골치 아픈 공동지분만 싹 정리하게 됐습니다. 누구 덕분에?”
“크흠!”
“바로 정혁 도련님께서 작성한 이 계약서 덕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심 사장은 쐐기를 박았다.
“어디 그뿐입니까? 담보로 잡혔던 우광증권까지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심 사장은 내 옆자리 소파에 털썩 앉았다.
“주식이 폭락했다고 쳐도 우광증권은 족히 80억은 줘야 인수할 수 있는 알짜배기 기업입니다. 도련님 덕에 크게 이득 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반면 심 사장은 속 편한 표정으로 커피포트를 기울여 커피를 탔다.
커피를 호로록 마시기 시작할 때까지 할아버지는 침묵을 지켰다.
“좋다. 어차피 태성화학은 네 아비의 몫으로 예정했던 곳이니까.”
마침내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 사장의 말이 맞아. 돈 한 푼 안 들이고 150억짜리 우광의 지분만 정리하게 되었고, 그 공은 전적으로 이 인수 합병 계약서 덕이다. 그건 인정해야지.”
태성화학을 내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심 사장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커피를 마셨다.
한쪽 눈으로 날 향해 찡긋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럼 이제 용건은 다 끝났지? 그럼 이만 이 할애비는 계열사 임원회의에······.”
“아직이에요.”
“용건이 또 남았어?”
“이참에 우광에게 손해배상도 두둑하게 뜯어내 보죠. 계열사 하나만 더 날로 먹을까 해요.”
“손해배상으로 계열사를 뜯어내?”
할아버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혼약을 파기하자고 했던 것도 나고, 150억짜리 태성화학의 지분까지 날로 먹게 된 것도 난데, 무슨 구실로 손해배상까지 뜯어낼 수 있겠느냐? 어림도 없지.”
“구실이 없긴 왜 없어요? 김 비서님!”
내가 외치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비서가 들어와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공손히 바쳤다.
“이건 뭔가?”
“전(前) 태성건설 차윤성 사장님께서 친필로 작성하신 진술서입니다.”
“태성건설 금고에서 꺼내갔던 우광건설의 뇌물 20억!”
역시 우리 할아버지!
바로 감 잡으신 모양이다.
‘이건 우리 아버지 몫이지!’
어머니 몫만 챙기면 아버지가 섭섭해하실 거 아닙니까.
< 할아버지와 담판 짓다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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