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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03화 (103/189)

< 할아버지와 담판 짓다 (2) >

“우광건설 뇌물 장부가 청와대로 올라간 이후예요.”

나는 슬쩍 덧붙였다.

“청와대의 분노를 우광의 김 회장이 사재 출연과 총수직을 사퇴하고,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까지 벌여서 겨우 잠재울 수 있었고요.”

그 기자회견을 나와 할아버지가 함께 봤다.

바로 여기 이곳 태성그룹 회장실에서.

나는 전(前) 태성건설 차윤성 사장의 진술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걸 우광의 김 회장에게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요?”

“안 된다. 윤성이는 네 작은할아버지야. 우광건설 뇌물에 관련되면 험한 꼴을 겪게 될 게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광 사장 중 몇이나 중정으로 끌려갔느냐? 고문은 물론이고 감옥행마저 예약된 상태다. 윤성이를 물고 늘어지면 어쩌려고?”

“그럼 우리는 김 회장님의 아들을 물고 늘어지면 되는데요?”

할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김 회장님이 자숙하는 의미로 총수직을 물러났으니, 외국에 차관 빌리러 다닌다는 아들이 귀국해 총수직에 오를 수밖에 없잖아요.”

김 회장에게 아들은 단 한 명뿐이다.

우광철강의 적자를 막아보고자 외국을 떠돌며 차관을 빌리러 다니고 있었다.

“지켜주던 아버지도 없고, 계열사들은 줄도산에 직면한 데다, 여론과 청와대마저 등을 돌린 상태예요. 고립무원의 처지.”

내 뜻을 깨달은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입이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청와대에 올라간다면 청와대의 분노가 방패막이 하나 없는 김 회장의 아들을 향하게 될 거예요. 김 회장님의 아들마저 무너지면 우광은 답이 없어요.”

그게 바로 김 회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일 터였다.

“만일 김 회장님이라면 태성에서 쫓겨난 작은할아버지와 앞으로 우광을 짊어져야 할 그의 아들, 둘 중 누구를 택할 것 같아요?”

“허······! 처음부터 우광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구나. 외통수 그 자체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은 못 보겠지.”

“그러니까 이 진술서를 불태우는 조건으로 우광의 계열사 하나를 받아오시면 되겠네요.”

“진술서를 불태워?”

“그럼 그걸 김 회장님의 손에 쥐여 주시려고요? 굳이 작은할아버지를 두고 협박받고 싶으시면 그러시든가요.”

“진술서를 태우는 조건으로. 알겠다.”

나는 씩 웃었다.

“우리 아빠가 중동에 나가 힘들게 벌어온 태성건설의 20억이에요.”

이제부터 본론이다.

“그 돈이 새끼를 쳐서 우광 계열사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 계열사는 누구의 몫으로 챙겨주는 게 좋을까요?”

그야 당연히 우리 아버지 몫으로 챙겨줘야지!

“······?”

“······!”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심 사장과 김 비서까지 입이 떡 벌어져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집 곳간을 몰래 털다 걸렸으면 응당 이자까지 쳐서 갚는 게 도리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에게 갚아야지!

“우광건설 뇌물 장부와 관련해서 우리 아버지 외에 다른 자식들이 세운 공이 있긴 해요?”

공을 세웠으면 포상을 하신다면서요.

“이왕 챙겨줄 내 새끼 밥그릇이라면 우리 아빠 밥그릇으로 챙겨주세요.”

“하하하하!”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도련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건 성준 도련님 몫으로 챙겨주시죠.”

“태성건설 금고에서 나온 돈이고, 성준이가 중동에서 벌어온 돈으로 뿌린 뇌물이니 수확 역시 성준이의 몫이어야 한다는 소리로구나?”

날 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은근해졌다.

“인제 보니 제 부모 몫을 챙긴다고 날 찾아온 게로구나.”

이만하면 우리 부모님 몫은 단단히 챙긴 것 같고.

그럼 지금부터는 내 몫도 좀 챙겨 볼까?

“자, 그럼 이제 용건은 전부 끝난 것 같은데. 할애비는 정말로 임원회의에······.”

“아직이에요. 아직 제 몫이 남았거든요.”

“뭐? 네 몫?”

나는 동전 지갑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곳 회의실에서 열릴 계열사 임원회의 말이에요.”

사직한 심 사장마저 불러들인 태성의 전 계열사 임원회의였다.

“우광의 계열사 인수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논의하기 위한 회의 맞죠?”

“그래.”

“태성이 인수할 우광의 계열사, 제 몫으로 챙겨주세요.”

“뭐야?”

“이건 우광건설 뇌물 장부의 세 페이지와 교환한 대가였어요. 기억하시죠?”

난 동전 지갑에서 할아버지의 친필 각서를 꺼냈다.

“태성건설 지분 대신 망한 회사 인수할 때 제 몫으로 지분 100%를 챙겨주신다면서요?”

심 사장은 고개를 홱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회장님, 그런 각서도 쓰셨습니까?”

“크흠, 뭐 좋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할아버지가 흔쾌히 인정했다.

“딱 하나만 골라 봐라. 한 1억 대 정도 하는 작은 계열사로.”

그건 안 될 말이다.

내가 고작 그거나 얻어먹자고 여기까지 담판 지으러 온 줄 아시나?

할아버지가 먼저 선수 쳤다.

“계약서 덕분에 날로 먹게 된 태성화학과 우광증권? 그래 그건 돈 한 푼 안 들이니 넘겨줄 수 있다고 치자.”

이건 우리 어머니 몫이고.

“윤성이 진술서를 태우는 대가로 날로 먹게 된 우광의 계열사? 그래, 그 역시 돈을 더 안 들이니 넘겨줄 수 있다고 치자.”

그건 우리 아버지 몫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인수해야 할 우광의 계열사는 헐값으로 후려쳐도 돈 주고 사와야 하는 것들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나는 동전 지갑을 열어서 곱게 접힌 종이를 또 꺼냈다.

“할아버지는 공을 세운 만큼 포상하신다면서요? 그럼 전 150억어치의 공을 주장하겠어요.”

“뭐? 150억?”

“송년의 밤에서 지하금융계의 네 거물을 초대해서 태성건설에 후원하도록 만든 게 누구일 것 같아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초대장을 받아낸 것도 나였고, 그들을 초대한 것도 나였고, 그들이 후원하도록 만든 것도 나였어요.”

전대 지하금융계의 거물을 만나 지하철역 정보를 팔아 후원금과 바꿨다.

그렇게 해서 받아낸 것이 바로 이 후원계약서였다.

“명동 송골매가 50억,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50억, 종로 금이빨이 30억, 까치산 방 여사가 20억!”

나는 후원금액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들을 바람잡이로 고용한 심부름값은 안 받겠어요. 이건 제 호의예요.”

그뿐인가?

“이들의 선동에 휘말려 태성건설에 후원한 정관계 인사들의 후원금도 포함 안 시켰어요. 이건 제 서비스예요.”

아마 그렇게 추가로 받은 후원금이 30억인가, 50억쯤 된다고 들었다.

“지하철 노선도를 그린 값과 석유파동 정보값도 포함 안 시켰어요. 그건 우리 아빠 몫으로 챙겼으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 비서가 슬쩍 보탰다.

“회장님, 정혁 도련님이 그린 지하철 노선도 덕분에 따낸 지하철 2호선 공사에,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도로 확장과 상가 건설 공사까지 다 포함하면 2천억이 훌쩍 넘습니다.”

“푸흡!”

심 사장이 커피를 마시다가 뿜고 말았다.

“쿨럭, 켁, 쿨럭! 정혁 도련님이 지하철 노선도도 그리셨습니까? 쿨럭! 아니, 이게 말이 돼요?”

심 사장은 콜록거리면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비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혁 도련님이 미리 건넨 쪽지 덕분에 청와대 신년 오찬 초대장까지 따로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커허헉! 쿨럭!”

심 사장이 숨을 들이켜다가 또 요상한 소리를 냈다.

“청와대 신년 오찬 초대장을 받아온 게 누구 덕분이라고요?”

“청와대 신년 오찬 초대장은 돈 주고도 못 사는 명예이자, 특혜를 얻을 기회입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굵직한 사업들을 따내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는 각축장이 아닙니까.”

김 비서는 딱 잘라 말했다.

“정혁 도련님의 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회장님께서도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작성한 감사 편지를 배달한 이가 바로 접니다.”

“회, 회장님의 감사 편지요?”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심 사장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을 들었다.

“혹시 우광 계열사를 인수할 돈이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저도 한 손 보탤게요. 심 사장님.”

“예? 예!”

“투자회사 이름으로 지하철 2호선역 근처에 사놓은 땅이요. 그거 지금 얼마나 하죠?”

할아버지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투자회사?”

“정혁 도련님께서 따로 만드신 회사입니다.”

김 비서가 슬쩍 부연 설명을 보탰다.

할아버지는 더욱 기함했다.

“정혁이 고작 여덟 살이야! 투자회사를 설립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운영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돼!”

“저기 회장님, 그건 제가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바지사장으로.”

“심 사장, 자네가?”

“태성을 위해서였습니다. 흠흠, 아시잖습니까.”

할아버지가 심 사장과 김 비서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알고 있었어? 정혁이가 투자회사 설립한 거?”

“제가 투자회사 설립을 도왔습니다만.”

“김 비서, 자네가?”

지금 그까짓 것 가지고 실랑이할 때가 아니었다.

“심 사장님, 그 땅을 담보 잡아 대출받을까 하는데요. 현금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을까요?”

“음, 10만 평 중에서 몇만 평이나 담보 잡힐 생각이신지부터 물어봐야겠군요.”

“그만하면 됐다!”

할아버지가 손사래를 쳤다.

“우광 계열사를 인수할 돈이 없어서 여덟 살짜리 손자의 뒷주머니까지 털 일 없다! 우리 태성은 그 정도로 가난뱅이 기업이 아니라서.”

할아버지는 별안간 헛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작 여덟 살짜리가 투자회사를 세웠단 말이지? 내 자식들 중 누구도 영입하지 못했던 심 사장을 빼돌려서 바지사장으로 앉혀 놓고?”

헛웃음은 어느새 호탕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한남동 집을 살 때만 해도 돈 빌리러 전당포에 갔다던 녀석이, 어떻게 지하철역 근처 땅을 십만 평이나 사들인 거지?”

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쳤다.

“그래, 이래야 내 손자지! 차태성이 핏줄이면 여덟 살에 이 정도는 되어야지!”

“회장님?”

심 사장이 미친놈 보듯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반면 김 비서는 눈꼬리를 휘어가며 뿌듯하게 웃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아니, 김 비서까지 동의할 일이야?”

심 사장은 고개를 홱 돌려서 김 비서를 보았다.

“아니, 나만 이 상황이 황당하고 기가 막혀? 진짜 나만 그래?”

심 사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정혁 도련님과 함께 있으면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든다니까. 이게 과연 내 새끼다로 끝날 일이냐고요.”

“하하하,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할아버지가 응접실 테이블에 늘어놓은 서류들을 보며 크게 웃었다.

“공을 세웠으면 그에 걸맞은 포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김 비서!”

“예, 회장님.”

“앞으로 태성이 인수하는 우광 계열사 중에 150억에 해당하는 계열사 주식은 정혁이 몫이다!”

“예.”

“정혁이가 화학 인수합병에서 세운 공을 인정해 태성화학과 우광증권 역시 정혁이 몫으로 인정하겠다!”

“예.”

어?

“할아버지, 화학은······.”

“네 어머니 혼수로 얹어 보내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 네 것을 네가 어떻게 처리하든 난 관여치 않겠다. 그러니 네가 직접 어미한테 지분을 증여하든가 말든가.”

할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정혁이가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온 공 역시 인정해 이와 관련된 것 또한 정혁이의 몫으로 인정한다.”

어? 이것은 우리 아버지 몫인데?

“청와대에서 약속한 우광 계열사와 진술서를 태우는 대가로 받는 손해배상용 우광 계열사 전부! 이 역시 네가 직접 네 아비한테 지분 증여하든가 말든가!”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할아버지가 더 빨랐다.

“이에 관해서라면 내 자식들 중 누구도 공을 세우는 데 보탠 바 없다! 공을 세운 놈이 포상을 받는다! 심플하게 가자!”

“맞습니다.”

김 비서가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쳤다.

단지 심 사장만 숨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회장님! 대체 계열사를 몇 개나······! 그것도 자식마저 건너뛰어서 여덟 살짜리 손자에게 주신다는 게······!”

마침내 심 사장이 정색했다.

“진심이십니까, 회장님?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자네 귀 멀쩡해! 나도 아직 치매 안 걸렸고!”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오늘 당장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면 하나밖에 안 남았네요.”

“과제?”

“태성의 전 계열사 임원회의에서 해결해야 할 내용 말이에요.”

“그거라면 우광의 어떤 계열사를 인수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를······.”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가 인수할 계열사라면서요? 그럼 제가 골라야지 왜 임원들이 골라요?”

“그렇다면 남은 과제란 건······?”

“태성의 전(全)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이 지금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느냐, 그게 할아버지의 과제죠.”

“······!”

좌우로 흔들던 검지로 나를 콕 짚어 가리켰다.

“저 여덟 살짜리 어린애예요. 이번에 제 몫으로 떨어지게 생긴 계열사가 몇 개라고요?”

“······!”

대충 숫자를 헤아리던 할아버지가 입을 떡 벌렸다.

심 사장은 턱이 빠질 듯이 떨어졌고, 김 비서마저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떨어뜨렸다.

“어떡할까요? 계열사 임원회의에 오늘부터 참관해요?”

< 할아버지와 담판 짓다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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