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06화 (106/189)

< 태성그룹 임원회의 (3) >

태성그룹 임원들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해 쏟아졌다.

조용한 독촉이었다.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 제2의 석유파동 가능성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각하께 석유파동을?”

“설마 또 다른 오일쇼크가 발생한다는 뜻입니까?”

잠잠했던 회의실 전체가 술렁거렸다.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석유파동 지나간 지가 언제라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OPEC(석유수출국기구)가 그 꼴을 두고 보겠습니까?”

큰아버지가 물었다.

“네가 뜬금없이 허튼 말을 할 애도 아니고. 어디서 감 잡았냐?”

“중동 지역 전역이 시끄럽더군요.”

“중동은 항상 시끄러웠지. 예나 지금이나.”

“당장 중동 전쟁 혹은 이슬람 혁명이 다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합니다.”

둘째 큰아버지가 턱을 괴며 웃었다.

“각하께서 그걸 믿었다?”

“예.”

“일개 건설사 전무에 불과한 이의 사견을 각하께서 귀담아들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

둘째 큰아버지의 말에 태성의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여서 동조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엔 응당 납득할 만한 근거란 게 있는 법이지. 성준아, 그게 뭘까?”

“제가 중동에서 건설 수주를 따내고 공사를 진행했을 때 보고 들은 정황에 관해 물으시더군요.”

아버지는 자신이 중동에서 겪었던 일을 핵심만 간추려서 말했다.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많은데, 그 돈을 왕실과 일부 권력층만이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가 극에 달했습니다.”

다들 못살면 참고 살 수 있어도 쟤만 잘살면 꼴도 보기 싫은 법이다.

“폭동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특히 이란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제대로 짚었다.

중동에서 일어난 불만 세력이 이란 혁명을 일으켜서 제2차 석유파동을 초래했다.

“이란이라면 하루 6백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는 주요 산유국 중 하나잖습니까!”

“지난 석유파동으로 이란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았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70달러에서 몇 년 만에 2,300달러를 넘어섰죠. 그 막대한 부를 팔라비 왕조와 소수의 고위권력층이 독점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을 할수록 태성그룹 임원들의 표정이 굳어간다.

“한쪽은 소비력이 넘쳐나는데, 농촌은 몰락했고 중소상인들 역시 줄도산한 상황입니다. 유가가 안정되며 겪게 된 지독한 불경기로 왕정에 대한 불만이 치솟고 있죠.”

태성그룹 임원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를 돌아봤다.

“만일 이란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석유 공급이 마비된다면 석유 가격이 폭등할 수 있습니다.”

“이란에 호메아니라는 걸출한 이슬람 지도자가 있는 만큼 주변국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만일 이란에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중동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에 말이야. 또 한 번의 석유파동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몇 년 전 석유파동이 벌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겁니다.”

태성그룹 임원들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골랐다.

“대한민국에서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반면 태성은 석유를 기반으로 한 중공업 사업에 매진하고 있고요.”

“지금 태성의 연간 제조업 성장률이 20%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중공업에서 나옵니다.”

“몇 년 전엔 태성도 중공업 비중이 이 정도로 높진 않아서 어떻게든 허리띠 졸라매서 버텼지만······.”

“지금으로서는 석유 가격이 그때만큼 폭등하면 계열사 한두 개 매각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석유가 마르면 돈줄도 마릅니다.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고 달러가 마르면 수출길도 말라붙습니다.”

“최악의 경우 줄도산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태성그룹 임원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로 동요가 심해졌다.

“하하하, 아직 터지지도 않은 일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여기십니까?”

큰아버지가 임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태성은 줄곧 석유를 수입하는 중동의 정세와 메이저 정유사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가라앉은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석유파동의 낌새가 느껴졌다면 메이저 정유사부터 먼저 발을 빼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석유파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소리죠.”

“기우에 불과하다? 그럼 각하께서는 발생 가능성도 낮은 애송이의 음모론에 휘둘려서 청와대 오찬 초대장을 내어줬다는 뜻입니까?”

둘째 큰아버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위험을 대비한 대책 마련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월동준비를 단단히 해둔 자만이 길고 긴 혹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죠.”

탕탕탕!

할아버지가 단상을 내리쳤다.

“너희들끼리 싸우라고 한 소리가 아니야! 정혁이는 우리가 인수할 때 고려해야 할 위험 요소에 대해 상기시켜줬을 뿐이다!”

태성그룹 임원들이 퍼뜩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정혁아,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날 것 같으냐?”

할아버지의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 그만 피식 웃음이 났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전문가에게 물으셔야죠.”

“전문가?”

“다들 끈 하나씩은 있으시잖아요? 외무부, 중동대사관, 청와대 비서실과 기획실, 중동에 기자 파견한 언론사들, 외신 방송국과 중동 관련 대학교수 등등.”

내 나이 고작 여덟 살.

내 말의 무게를 주장하기엔 너무 어리지.

차라리 전문가의 권위와 견해를 빌리는 게 더 쉽고 빠르고 간단하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 기획실에서 석유파동 가능성에 관해 대학경제연구소와 협력하여 다각면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저도 중동 대사관 직원과 외무부 직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좀 들은 게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중동 쪽을 예의주시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고 하더군요.”

“한국대 교수진이 청와대에 불려갔다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경제, 아랍, 정치, 사회학과 교수진들이었댔나?”

어느새 태성그룹 임원들 사이에선 석유파동의 가능성을 주의 깊게 살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확실히 이 정도로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면 제2차 석유파동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청와대가 발 빠르게 움직일 정도면 조만간 일이 터질지도 모르겠는데요?”

“확실히 검토해볼 만한 사안인 것 같습니다.”

큰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석유파동이 계열사 인수 협상에 영향을 끼쳐선 안 되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태성화학처럼 최대한 빨리 인수해 오는 겁니다.”

큰아버지는 씩 웃었다.

“일단 태성의 계열사가 되면 쪼개 팔든 키워 팔든 아니면 합병하듯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이고! 그 정도로 경기가 나쁠 땐 팔려고 해도 똥값밖에 못 받거든요!

헐값에 사와서 똥값에 팔면 손해란 말입니다!

“한겨울 추위를 버틸 장작으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큰아버지가 실눈을 휘며 웃었다.

“마이너스. 또 계산 틀렸습니다, 형님.”

탕탕탕!

할아버지가 단상을 내리쳤다.

웅성대는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아직 우리 정혁이 발언권 안 끝났다! 정혁아, 이제 마지막 의문만 남았구나.”

에라이, 내가 원래 던지려던 질문은 다른 것이었는데!

이대로라면 큰아버지대로 서둘러 인수합병을 추진하게 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인수 시기를 좀 늦추면 안 돼요?”

“인수를 늦춰? 왜?”

“어차피 살 주식이 폭락장에 들어섰다면 지금 헐값에 사느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똥값에 사는 게 낫잖아요.”

내가 이러는 이유라면 별것 없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계열사를 인수할 수 있으니까.

‘석유파동이 닥칠 때 군식구까지 거둬먹이느라 세간 살림 내다팔 생각은 없거든.’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정혁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왜요?”

“사냥감이 쓰러지면 하이에나 떼가 달려들 테니까. 태성은 남들이 먹다 남긴 살점 부스러기만 먹을 생각 따윈 없다.”

“이상하네요. 전에 심 사장님께서 하신 말과는 전혀 다른데요?”

나는 일부로 고개를 갸웃하며 모른 척했다.

“할아버지가 태성화학를 넘겨주신다고 공언했어도 인수 협상에만 한세월 걸린다고 하셨거든요. 반년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른댔는데. 아닌가요?”

“······어?”

심 사장은 인수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태성화학의 물건을 팔아먹으며 뒤로 자산을 빼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건 태성이잖아요?”

태성에겐 돈이 있다.

우선협상권도 태성에게 있다.

반면 우광은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진다.

여론도, 자금 사정도, 내부 사정도, 뜯어먹겠다고 모여드는 하이에나 떼를 상대하는 것도.

“우광의 알짜 계열사를 찜해놓고 인수 조건을 조정하면서 똥값 되길 기다리면 안 되는 건가요?”

순간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미동도 없이, 소리도 없이, 모든 눈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씩 웃었다.

“석유파동 터질지 모른다면서요?”

석유파동까진 고작 1년도 채 안 남았다.

우광이 침몰해도 그 정도는 너끈히 버티고도 남는다.

이유는 또 있다.

“김 회장님보다는 그 아들이랑 인수협상하는 게 낫지 않나요?”

우광의 김 회장이 총수직에서 물러났다지만, 뒤에선 건재하게 활동할 게 분명하다.

능구렁이를 벗겨먹는 것보다 애송이를 벗겨먹는 게 더 쉽고 빠르고 간단해서 말이죠.

“갓 총수직에 오른 애송이 회장님이라면 내외로 시끌벅적한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실력을 증명해야 할 테니까요.”

벌떡!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이미 끝났고, 견학도 이쯤 하면 끝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정혁이는 할애비랑 쌍화차 한잔하고 가지 않으련?”

“아빠랑 먹을래요.”

나는 우광 계열사 인수 순위를 매긴 자료는 김 비서에게 떠넘기며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성큼성큼 걸어온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꾸벅 인사했다.

“정혁아.”

“안녕히 계세요.”

나도 두 손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뒤도 안 돌아보고 회의실을 떠났다.

* * *

웅성웅성.

회의는 이미 끝난 지 오래건만 태성그룹 임원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일리가 있습니다. 인제 보니 정혁 도련님, 굉장히 영특하신 분이시군요.”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직관적으로 핵심을 찌르시더군요. 미처 살펴보지 못한 것을 짚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거 태성의 미래가 밝습니다. 하하하!”

“통찰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시니 다음 임원회의에도 참석하면 좋지 싶은데. 한번 건의해 볼까요?”

태성그룹 임원들은 의욕이 넘쳤다.

“그럼 인수 협상을 끌 때의 장단점부터 짚고 넘어가 봅시다.”

“석유파동 대비책을 세우는 것과 함께 우광의 계열사 인수 문제도 결부해 검토해 봐야겠군요.”

“장단기 투자 전략을 세워 다각도로 따져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죠.”

“똑똑한 도련님 한 분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임원 자리에 앉은 게 쪽팔리지 않으려면 분발해야겠습니다. 허허허.”

펜을 꺼내 수첩에 메모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종래에는 아예 회의자료를 뒤적거리며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계열사별로 임원들과 사장들 사이에 의견 교환 속도가 더 빨라졌고, 그럴수록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뭣들 하고 있어? 회의 끝났다니까! 집에 안 갈 거야? 이대로 여기서 밤샐 거야?”

참다못한 차 회장이 단상을 탕 내리쳤다.

“다음 계열사 사장단 회의 전까지 임원들이랑 이에 관해 충분한 논의와 검토를 마치고 모인다.”

“이것만 마저 논의하고 알아서 챙겨가겠습니다.”

“몰라! 이상 해산! 논의를 하든 말든 그건 자네들 사정이고!”

할아버지가 단상에서 내려오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심 사장은 나 좀 보자. ······응?”

심 사장은 이미 튀고 없었다.

정혁이가 남긴 회의자료를 검토하며 나지막하게 연신 감탄하던 김 비서가 조용히 보고했다.

“심 사장은 정혁 도련님을 따라가셨습니다.”

“심 사장이? 성준이가 아니라 정혁이를 따라갔다고?”

“도련님께 쪽지를 하나 받았거든요.”

“쪽지?”

차 회장은 혀를 찼다.

“이거 아쉽게 됐군. 내친김에 심 사장에게 부탁 좀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부탁이라뇨?”

“정혁이 말이야.”

차 회장은 뿌듯하게 웃었다.

“그 뭐냐, 경영 조기 교육? 그걸 심 사장이 맡아줬으면 해서.”

< 태성그룹 임원회의 (3)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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