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기교육의 꿈 (1) >
나는 저승사자와의 시야 공유를 껐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이 시절의 서울이 휙휙 지나갔다.
나는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경영 조기교육이라.’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다!
‘구미가 당기는데?’
재벌 기업의 경영 시스템에 관해서라면 이미 알고는 있다.
왜냐고?
신림동 개미지옥이던 시절, 난 함정을 파놓고 끌어들여 재벌 기업들을 먹어치우곤 했기 때문이다.
‘목표한 부실 재벌 기업을 무너뜨리고, 뜯어먹고,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키우고, 쪼개고, 팔아치우고.’
수익률이 아주 짭짤했었지.
‘쓸만한 알짜 기업이라면 주식을 왕창 뜯어내서 대주주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휘두르곤 했지만.’
태성그룹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 태성그룹 보고서를 작성해두고 꼼꼼히 이해득실을 따져봤던 거다.
‘결국 그뿐이었지. 회사 경영이란 것은 나 혼자 잘났다고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
함정에 빠뜨려서 회사를 말아먹는 건 혼자라도 가능하지만, 회사를 건실하고 튼튼하게 키우는 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째 나랑 얽히는 인간들이라곤 죄다 악연뿐이었던 박복한 인생이었던지라.’
배신, 협잡질, 수작질, 이간질, 횡령 및 사기 등으로 뒤통수 맞기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합심협력해서 기업을 이끄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음지의 인생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제대로 받아야 할 경영 교육이라면 이왕이면 유능한 사람을 붙여줬으면 좋겠는데. 김 비서, 아니, 심 사장 같은?’
김 비서와 심 사장 앞에서는 내숭 떨 것도 없으니 참 편하거든.
‘흠, 할아버지가 아끼는 유능한 최측근을 고작 내 경영 교육 선생으로 붙여줄 리는 없을 테니.’
심 사장은 10억짜리 공동출자한 태성화학을 7년 만에 300억짜리 대기업으로 만든 경영의 대가!
그런 엘리트 오브 엘리트인 유능한 전문 경영인을 고작 여덟 살짜리인 내 교육을 맡긴답시고 자원을 낭비할 리 없다.
‘아쉽군. 심 사장이라면 눈치 안 보고 온갖 일을 다 맡겨 잘 써먹을 텐데. 괜한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하느라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딱 질색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러자 운전하고 있던 유종태가 백미러를 힐끔 보며 웃었다.
“웬 한숨을 그리 쉬십니까? 혹시 임원회의가 많이 버거우셨습니까?”
임원회의가 뭐 별거라고.
“예전에 김 비서님을 수행하면서 임원회의에 몇 번 들어가봤는데 이거 정말 죽을 맛이더라고요.”
유종태는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입심들이 어찌나 매서운지. 입만 열었다 하면 구체적인 수치 가지고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데. 무슨 피라냐 떼가 달려드는 줄 알았다니까요?”
유종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임원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숙지해야 하는 자료만 산더미! 임원들이 철저하게 준비하고 들어가나 보더라고요. 회의 자료를 미리 검토한 다음에 외워가는 분도 여럿이고요.”
내 기준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라.
“총만 안 들었지 전쟁터가 따로 없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오가는 회삿돈이 수천만 원이고, 계열사의 흥망이 달려 있으니 책임이 무거워서 그렇겠지요.”
“맞는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유 팀장님께 맡긴 내 투자회사 또한 오가는 회삿돈이 수억 원이에요. 계열사의 흥망이 달려있으니 책임이 아주 무겁겠죠?”
“······.”
말문이 턱 막힌 유종태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지시한 사항에 대한 보고서는요?”
“거기 옆에 쌓인 서류 봉투 보이시죠?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두툼한 서류 봉투가 여럿 쌓여 있었다.
안에 담긴 서류를 꺼내서 파라락 넘기며 읽었다.
‘쯧. 보고서 작성의 기본부터가 글러먹었구만? 핵심만 간추려 딱딱 짚어내야지 구구절절 뭔 말이 이렇게 많아?’
태성그룹 임원회의 자료를 보고 난 뒤라서 그런가?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준비한 보고서를 마주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설프고 조악하군.’
믿을 만한 사람이라서 곁에 두고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 유능한 건 아니니까.
그나마 유종태가 제일 낫다.
‘하지만 딱 하나, 폭넓은 정보 수집에 관해서라면 웬만한 뒷골목 해결사나 정보상보다 나은데?’
김 비서가 이들을 직접 부렸다더니.
어디에 어떻게 써먹었는지 감이 온다.
‘뭐 이만하면 뒷골목 꼴통 새끼들을 굴려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어차피 얽히는 인연들마다 악연뿐이었던 더러운 인생!
아쉬운 대로 그런 돌머리라도 악착같이 데굴데굴 굴려가며 써먹었던 나다.
‘굴리고 또 굴리다 보면 좀 쓸만해질 테지. 여차하면 협박, 똥개훈련, 몽둥이찜질······ 에혀, 됐다! 이제 재벌가 사람이 되었는데, 아직도 뒷골목에서 사람 잡던 대로 굴리면 쓰나.’
나는 보고서를 탁 덮었다.
유종태가 핸들을 돌리면서 덧붙였다.
“거기 제일 얇은 결재서류는 심 사장님의 것이고요.”
그러고 보니 다른 서류 봉투에 비해 아주아주 얇은 서류 봉투 하나가 껴 있었다.
‘역시 심 사장! 저 많은 서류들을 전부 다 검토한 후에 핵심만 추려 간략하게 뽑아냈구나!’
고작 열 장 내외였다.
‘지하철역 근처 땅을 매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인데, 근처 역세권에 들어선 굵직한 관공서를 중심으로 입지하면 유리할 만한 사업체를 추천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시중에서는 얻기 어려운 고급 정보를 덧붙여가며 투자 기업을 물색해 우선순위를 매겨오기까지 했군.’
마음에 든다!
‘옛날엔 이걸 전부 나 혼자 떠맡아야 했는데. 유능한 엘리트를 곁에 뒀더니 이렇게나 편할 수가!’
그래서 다들 인재 양성, 인재 교육에 목을 매는 것인가!
뒷골목의 쓰레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능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 심 사장 하나만 있어도 일이 이렇게 쉬운데, 심 사장만 한 다른 인재들까지 얻게 된다면?’
좋은데?
‘나도 이제 재벌가 사람이니 재벌가의 룰에 따라 한번 인재를 뽑아 굴려볼까?’
이왕이면 합법적인 방법으로 유능한 인재들만 골라 굴려보자!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 * *
늦은 밤 자다가 눈이 떠졌다.
목이 말라서.
‘역시 치킨. 염분 덩어리라니까.’
물론 그래서 맛있는 거지만.
물 마시러 나왔는데 1층 주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에는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퇴근 후 야식으로 치킨에 맥주라니.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응? 이거 웬 사탕이에요?”
“정혁이가 나한테 이렇게 먹여줬어. 아빠 힘들다고.”
“하지만 선배는 사탕 질색하잖아요. 곤혹스러웠겠어요.”
“아껴 먹다가 마지막 한 알은 수진이 너 주려고 챙겨왔지. 넌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근데 이 치킨, 정말 정혁이가 만든 거야?”
“물론 옥분 아주머니가 도와주셨어요. 하지만 레시피는 우리 정혁이 게 맞아요.”
“진짜 맛있는데. 이거 돈 받고 팔아도 되겠다. 우리 아들, 천재인가?”
“치킨 하나에 천재 소리가 나올 일이에요?”
“물론이지. 고작 여덟 살에 세상에 없던 레시피를 개발하는 애가 천재지, 그럼 아닌가?”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터뜨렸고, 어머니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하게 사업화 방안을 구상해 봐야 하나 싶을 정도야.”
나는 사업화보다 다른 걸 먼저 할 생각이다.
‘좋은 건 먼저 특허부터 따놔야지. 역시 공문서로 권리를 인정받는 게 최고거든.’
아버지가 양념치킨을 한 입 뜯더니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치킨무도 포크로 콕 찍어 먹더니 허, 소리를 냈다.
“이건 서양식 피클과는 또 맛이 다른데? 단무지랑도 다르고.”
“치킨무래요. 정혁이 말로는 보급형 동치미라고 하던가?”
“우리 아들은 참 별걸 다 알아.”
“그러니까요. 이 집 등기도 우리 정혁이가 직접 한 거예요.”
“뭐? 등기를? 진짜로?”
“네. 법무사도 안 쓰고, 법원에 가서 직접.”
아버지는 마시던 맥주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게 말이 돼? 정혁이 이제 고작 여덟 살이야.”
“그땐 일곱 살이었어요. 심지어 이 집도 정혁이가 산 거예요.”
“뭐?”
“김 비서님 말을 들어보면 어디서 돈을 빌린 적도 없고, 할아버지에게 받은 돈도 없었다는데, 일곱 살짜리 애가 이런 대저택을 뚝딱 구해오더라니까요?”
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가르쳐주지도 않은 한글도 알아요.”
“응? 그건 네가 가르쳐준 거 아니었어?”
“전혀요. 시장에서 야채 팔아 먹고살기 바빴거든요. 일력 찢으면서 지나가는 소리로 숫자 몇 개 알려준 게 다예요.”
“숫자 몇 개 알려줬을 뿐인데, 나눗셈을 암산으로 한다고?”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준 형님이랑 만났을 때, 형님이 장난으로 지갑에 든 돈을 꺼내면서 짜장면 몇 그릇을 살 수 있는지 맞히라고 했는데.”
“했는데?”
“맞혔어. 정확하게.”
아버지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지갑에 들어있던 돈이 514,500원이었는데······.”
“300원짜리 짜장면 1,715그릇?”
“······!”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를 보았다.
“정혁이한테 들었어?”
“듣긴 뭘 들어요. 그냥 암산한 거죠.”
“······.”
“이게 뭐라고 그런 눈으로 봐요?”
아버지는 잠시 뻐끔대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인제 보니까 우리 정혁이가 수진이 널 닮았나 보다.”
“언제는 선배 닮았다면서요?”
“음, 그럼 외모는 날 닮았고, 머리는 널 닮은 거로 할까?”
아버지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면서 말했다.
“우리 아들은 진짜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 똑똑하고 배짱 좋고. 확실히 평범한 여덟 살짜리 어린애는 아니야.”
“선배, 보통 그런 걸 보고 팔불출 혹은 고슴도치 콩깍지라고 한답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것 같던데? 아버지도 정혁이 교육에 관심이 많으셔.”
“아버님께서요? 아, 올해 정혁이 국민학교 입학하는 것 때문에 그러신가 봐요.”
“진지하게 말씀하시더라. 심지어 태성그룹 임원들에게도 돌아가며 한마디씩 들었어.”
아버지는 몹시 흐뭇하게 웃었다.
“정혁이 잘 키워보라고. 영특하고 똑똑해서 미래가 기대된다고.”
“어머.”
“정혁이 우광재단의 사립학교로 보내면 어떠냐는데. 어때?”
우광재단 사립학교라면 들어본 바 있다.
아버지가 우광장학재단에 관해 입을 열었을 때 태성그룹 임원들이 말했다.
-우광장학재단이요? 매년 장학금이랍시고 수억 원이 들어가는데, 정작 학생들에게 주는 돈은 수백만 원뿐인 사학비리의 온상이잖습니까. 돈세탁처가 필요하십니까?
-안 그래도 양질의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인재 양성에 힘을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광장학재단이 보유한 사립학교라면 제법 괜찮습니다.
한마디로 우광사립학교에 들어가는 인재들은 쓸만한데, 재단을 운영하는 교육자들의 비리가 심하다는 것!
‘끝내준다! 내가 원하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야!’
특히 ‘재단을 운영하는 교육자들의 비리가 심하다’는 대목이 마음에 쏙 든다!
유능한 인재나 정재계 인사들의 자제와 안면을 트는 것은 덤이고.
‘계열사 인수 대상으로는 꽝인데, 내 뜻대로 활개 칠 수 있는 무대로는 딱이지!’
그럼 내가 교실에서 가나다라, 일이삼사나 배우고 있으리?
코흘리개 애들이랑 쉬는 시간에 숨바꼭질이나 하고 있어야겠냐고.
‘선생부터 매수해야겠군.’
강직하고 사명감 투철한 선생보다야 썩어빠진 인간을 다루는 게 백만 배는 쉽다.
그게 내 전문이거든.
‘차라리 담임의 비호 아래 교실에서 대놓고 업무를 보는 거지.’
꼼짝없이 공교육에 묶여 최소 6년이란 의무교육에 발목 잡힐 줄 알았더니.
이거 잘만 하면 일이 아주 쉽게 풀리겠는데?’
운이 좋아!
“아버지가 정혁이에게 한국대 다니는 과외 선생을 과목별로 붙여주시겠다던데. 한 열 명쯤?”
“무슨 국민학생 과외를 열 과목이나 붙여요?”
“한글, 논술, 수학, 한자, 영어, 호신술, 수영, 승마, 음악, 미술. 원래는 사격, 골프, 바둑까지 추가였어.”
“애 잡을 일 있어요?”
“다른 조카들도 그 정도는 받아. 다들 유치원 다닐 때부터 받는 교육이야.”
“미쳤어, 정말. 그 스케줄 전부 다 돌리면 정혁이는 언제 자고 언제 놀아요?”
“전 과목을 매일 받는 것도 아니잖아. 거기에 세 과목이나 뺐어. 대신 하나는 꼭 받기로 했지만.”
“그게 뭔데요?”
“경영 교육. 그건 심 사장님께 부탁드렸더라.”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이제 심 사장을 곁에 두고 마구 부려먹을 수 있겠구만!
“무슨 경영 교육을 벌써부터 시킨다고 그래요? 과외도 국영수, 딱 세 과목만 해요.”
아니지! 그게 아니죠!
어머니가 작정하고 반대하면 아버지도 귀담아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저 과외 받을래요!”
“정혁아?”
“할아버지 뜻대로 해요!”
이건 오히려 내가 먼저 청해야 하는 기회였다.
“열 과목? 열세 과목? 경영교육? 전부 좋아요.”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대신 과외 선생님은 내가 뽑아도 되죠?”
벌써부터 기대된다.
우리 회사 일을 거들 인재 양성!
장차 임원으로 키워나갈 엘리트들의 조기교육, 혹은 1 대 1 인턴 과외라 할 수 있겠군.
‘황금빛 나는 이력서로만 골라 뽑겠다!’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험악한 깡통들도 어떻게든 굴려서 알차게 써먹었던 나다.
곱게 자란 고학력 엘리트들이라면 두 손 벌려 환영이지!
‘악착같이 굴려 먹다가 우리 회사로 박아 넣어야지. 인재 영입 또한 먼저 골라가는 놈이 임자라고?’
아무렴 재벌집 과외 선생으로 듣보잡의 덜떨어지는 놈을 붙일까.
머리가 좋은 만큼 일도 잘하겠지?
이거 정말 만세 만세 만만세잖아!
< 조기교육의 꿈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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