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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10화 (110/189)

< 조기교육의 꿈 (3) >

심 사장이 맡기로 한 경영 과목 수업은 일주일 후에 시작되었다.

태성그룹 임원회의 이후 우광화학 재인수가 가시화되면서 근래 심 사장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정혁 도련님, 오늘 이 시간만큼은 ‘JH투자회사 바지사장’이 아니라 ‘과외 선생’으로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 봐라?

JH투자회사는 내 이름 이니셜을 따서 만든 투자회사였다.

‘지금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가 아니라 과외 선생과 학생 사이임을 상기시키려고?’

의도는 뻔했다.

‘주도권과 권위를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군.’

그 속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심 선생님.”

원하는 대로 ‘심 사장’이란 호칭 대신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자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자리에 앉으세요, 정혁 학생.”

“네.”

“앞으로 꽤 어렵고 힘든 수업이 되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열과 성의를 다해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엄포이자 선전포고였다.

그래서 나도 준비했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공문을 보내주셨어요.”

“예, 회장님께서 먼저 꺼내신 제안이었죠. 제게 도련님의 경영 교육을 부탁하셨습니다.”

심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전 원래 성준 도련님의 경영 수업을 돕기로 내정되어 있었습니다. 성준 도련님 대신 그 아드님이신 정혁 학생을 도와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이라 받아들였습니다.”

“선생님께서 할아버지의 제안을 승낙하셨다는 건 최소한 제가 경영 일선에 나서기 전까지는 책임지고 지도하시겠다는 뜻이겠죠?”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임원으로 자리 잡으실 때까지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임원이라. 좋아요. 그럼 서명 날인하세요.”

나는 미리 준비했던 계약서를 훅 들이밀었다.

“이건 뭡니까? 회장님과의 약속만으로도 충분할 듯싶습니다만.”

“심 사장님은 지금 태성그룹에서 퇴사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내 투자회사의 바지사장으로 앉아 있지.

“제가 쪽지로 전한 제안, 생각해 보셨어요?”

“쪽지로 태성화학, 투자회사, 정유회사 중의 하나를 결정하셨냐고 물어보신 일을 말씀하는 거라면······.”

새해 첫날에 나는 심 사장을 영입하면서 약속했다.

태성화학을 되찾아오면 심 사장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정혁 도련님께 달렸다는 말을 해야겠군요. 그만큼 경영 수업에 만전을 기해달란 제 뜻을 부디 새겨들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계약서를 준비할 수밖에요.”

“······예?”

“회사에 고용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은 이상 할아버지와의 약속은 그저 구두약속으로 끝이잖아요. 저는 심 선생님께 아주 제대로, 오랫동안, 확실하게, 잘 배우고 싶거든요.”

나는 방긋 웃었다.

“돈과 시간은 물론 노력과 수고까지 달린 일인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죠. 아시다시피 저는 말보다는 문서를 더 믿는 사람인지라.”

“그럼 과외 계약은 아버님이신 성준 도련님과······.”

“이 공문서 보이시죠? 할아버지께 과외에 대한 전권 일임받았어요. 또한 과외 받을 사람은 저예요. 당사자.”

조금 놀란 표정으로 심 사장은 계약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숙고했으나, 같은 말만 벌써 21번째 반복하는 나로서는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런 계약서는 언제 다 준비하시는 겁니까?”

“원활한 수업을 위해 예습은 필수죠.”

“아니, 어떻게 계약서에 임원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돕겠다는 조항이 미리 들어가 있는 겁니까? 이건 방금 제 입으로 꺼낸 제안이었습니다만?”

그야 심 사장이라면 그런 제안을 꺼낼 것이라 예상했으니 그렇지.

“그게 중요한가요? 심 선생님이 저를 돕겠다는 각오가 섰고, 저는 기꺼이 심 선생님과 함께 경영 수업을 받을 결심을 내렸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 조항도 상당히 걸리는군요.”

“경영 수업의 참여 인원과 장소는 물론이고 수업 방식도 당사자의 합의하에 자율로 정할 수 있다는 대목 어디가 거슬려요?”

“당사자의 합의라는 대목이 거슬립니다. 이건 제가 주도하는 수업임에도 마치 정혁 도련님의 의견을 반영해야 진행할 수 있다는 권리 주장으로 보여서 말입니다. 선생이 갑이거든요.”

“학생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게 과외 수업 아니었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여기가 회사인 줄 아세요? 전 심 사장님이 부리는 부하직원도 아닌데, 위계질서 상명하복을 주장하시겠단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죠? 말을 물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지금은 경영이 아니라 교육이 목적이란 점, 숙지해주세요.”

순진했던 엘리트 대학생들과는 달리, 심 사장은 계약서 조항을 조목조목 따져들었다.

“그럼 이 비밀유지 조항은 다 뭡니까? 수업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외부에 흘릴 수 없다는 것은 왜 붙습니까?”

“수업은 수업으로 끝내잔 말이에요. 할아버지께 보고할 사항은 수우미양가란 평가 보고뿐이라는 뜻이에요. 문제 있어요?”

“음, 그렇다면 문제없을 것 같군요.”

그제야 심 사장은 순순히 서명 날인했다.

심 사장 또한 엘리트 대학생들처럼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그럼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심 사장은 흠흠, 목소리를 다듬었다.

“경영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행위요. 한마디로 회사를 굴리는 일이죠.”

심 사장이 흠칫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흠흠 목소리를 다듬으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회사란 무엇인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어, 상행위 혹은 그 밖의 영리 행위를 하는 사단 법인이요.”

“그렇다면 회사 경영이란 건 어떤 일을 말하는가?”

“보통 영업, 홍보, 조직, 인사, 생산 관리, 재무 관리 등으로 나누어 말하지만, 결국 시장의 니즈를 읽고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일이라 할 수 있죠.”

심 사장은 작게 ‘예습을 아주 철저하게 해오셨구만. 역시 만만치 않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회사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무엇인가?”

“시장에 팔 물건을 파는 것, 상품을 선정하고 개발하는 것, 상품을 홍보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것, 회사를 굴릴 사원을 뽑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어요.”

“······.”

“즉, 경영은 결국 사람을 어떻게 굴리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심 선생님, 저는 경영 이론이나 배우자고 과외를 부탁드린 게 아니에요.”

헛웃음을 터뜨렸던 심 사장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실전과 경험으로 쌓은 심 선생님의 판단과 식견을 곁에서 보고 배우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거예요.”

“맞습니다.”

“우리가 학자도 아닌데 이론 따위 깊게 파고들어서 뭐 하겠어요?”

“그럼요. 우리 같은 실무자는 회사 잘 굴리고 사람 잘 굴려쓰는 게 최고입니다.”

심 사장이 서류 가방을 열고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래서 준비해 봤습니다.”

“······이건 내 투자회사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감이네요?”

그러니까 심 사장이 직접 해야 하는 일거리를 나한테 가져왔다는 말이네?

내가 심 사장을 고용한 이유가 뭔데?

이런 일 하라고 비싼 월급 주면서 계약서 받아놨구만.

“수업 자료라고나 할까요?”

심 사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실전을 통해 깨지고 구르면서 몸으로 새기며 배우는 게 최고죠.”

그러니까 날 데굴데굴 굴리면서 뼛속 깊이 가르침을 새겨 넣으시겠다?

“그럴 줄 알고 저도 한번 준비해 봤어요.”

나는 책상 위에 미리 올려놓은 두툼한 서류뭉치를 가리켰다.

“이건 또 뭡니까?”

“회사 경영은 결국 사람 뽑아서 굴리는 일이랬잖아요? 일주일 동안 쓸만한 사람들을 뽑아서 굴린 결과예요.”

과외 선생들이 제출한 과제였다.

“예? 제가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랬어요. 구구절절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예요. 따라오세요.”

나는 얼떨떨해하는 심 사장의 팔을 끌고 옆방으로 향했다.

* * *

벌컥.

옆방에는 오늘의 과외를 기다리는 스무 명의 과외 선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책상과 의자 하나씩 배정받아서 과제를 붙들고 끙끙대는 사람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억! 난 아직 다 못 끝냈는데. 시간은 촉박한데, 과제량은 한도 초과야!”

“정혁아, 오늘 수업은 간단히 토론만 하고 끝낼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니, 과외 수업에 외부인까지 초대해서 거창하게 토론회를 열 줄은 몰랐지······.”

과외 선생들의 항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는 심 사장을 가리켰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태성화학 사장님.”

“뭐?”

과외 선생들이 비명같이 외쳤다.

“태, 태성화학 사장님이 이 자리에는 왜 나와?”

“그야 전문가를 모시고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죠.”

“겨, 경영 수업?”

나는 손뼉을 짝짝 쳤다.

“주목하세요. 심 사장님께선 10억 원의 사업 자금으로 7년 만에 시가총액 약 300억, 지난해 연매출액 31억, 영업이익 19억 원, 순이익 16억 원에 달하는 기업으로 태성화학을 키우신 분이에요.”

과외 선생들이 입을 떡 벌리며 심 사장을 바라보았다.

“선생님들을 위해 7년 만에 회사를 30배나 키워서 경영의 성공신화를 쓰신 분을 어렵게 모셨는데, 환영이 영 시원찮네요.”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전 한국대 경제학과 3학년인 조필두라고 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과외 선생들이 박수와 환호로 크게 반겼다.

저마다 자기 소속과 이름을 대면서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심 사장도 얼떨떨할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심 사장은 날 보면서 입술로는 ‘정혁 도련님, 경영 과외에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를 뻐끔댔지만, 난 일부러 모른 척했다.

“태성화학의 심 사장님이라면 태성그룹 총수 차태성 회장님의 최측근으로도 유명하신 분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선생님들 중에 심 사장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

“계약서를 떠올려 봅시다. 6년 전속 계약 조건과 함께 태성그룹 입사 조건도 붙지 않았던가요?”

“······!”

이들은 다들 대기업의 굵직한 계열사 사장 자리를 꿰어차는 위인들이다.

가진 야망과 포부가 범인들보다 클뿐더러, 의욕과 열정 또한 남달랐다.

“잘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평생 과외만 하고 살 수 없잖아요? 다들 졸업하면 대기업에 입사 안 할 거예요?”

“입사해야죠!”

“심 사장님께서 눈독 들인 사원이 된다면? 어때요? 앞으로 회사 생활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지 않나요?”

갑자기 과외 선생들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듯했다.

“집안과 뒷배 없으면 낙하산 못 타나? 능력으로 쟁취하면 되는 거지. 자기 출셋길을 자기 손으로 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랄까요?”

다들 주먹을 꽉 쥐고 상기된 표정으로 심 사장을 바라봤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경영에 관해 배우게 된다면 앞으로 임원까지 초고속 승진하는 데 무척 유리할 것 같지 않나요? 스타트 라인부터가 달라지는데요.”

나는 유종태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눈치 빠른 경호원인 유종태가 과외 선생들에게 거둬들인 과제를 복사해서 회의자료로 돌렸다.

“그럼 심 사장님 앞에서 지난 일주일간의 과제를 보고하기로 하죠.”

“예!”

스무 명의 과외 선생들이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야심만만하게 외쳤다.

‘인생은 역시 당근과 채찍이라니까!’

심 사장은 허, 소리를 흘리면서 내 귀에 바짝 붙여 속삭였다.

“도련님, 저 사람들은 다 누굽니까?”

“제 과외 선생님들이요.”

“절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과외 선생들을 조련해보겠다는 겁니까?”

“경영은 결국 사람 다루는 법이라면서요? 그거 하는 건데요? 이런 게 바로 실전이잖아요?”

“······.”

“문제 있어요?”

심 사장은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무 명의 과외 선생들은 눈을 번뜩이며 열정적으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수학 과외를 맡은 한국대 경제학과 3학년 조필두입니다. 과제 발표하겠습니다.”

심 사장과 나도 자리에 앉아 파라락 넘기며 검토했다.

나는 조 선생이 제출한 회계 장부와 보고서를 탁 덮었다.

“엉망진창이군요. 누가 대차대조표를 이렇게 멋대로 작성하랬어요?”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 건데. 회계가 워낙 어려워서 보기 편하게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누가 보면 이중장부 쓰면서 자금 횡령한 줄 알겠네요.”

“회, 횡령이요?”

“장부만 보면 그런 의심을 살 만하잖아요. 장부 작성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이 장부, 본인 이름으로 책임질 수 있어요?”

조 선생은 하얗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차대조표를 어디에 쓰는지 몰라요?”

“기업의 재무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주식 시장에서 활용한다는 건 알지만······.”

“수학 문제를 풀려면 수학 기호를 사용해야죠. 시장에 통용되는 대차대조표를 멋대로 바꿔 쓰면 되겠어요?”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모르는 건 유 팀장님께 물어보라고 알려드렸는데요. 유 팀장님이 X으로 보이시나······.”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 대차대조표를 분석하는 방법만큼은 제대로 확실하게 배워 숙지해 오세요.”

“예.”

심 사장도 같은 의견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치 않은 기색이 역력하자, 조 선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변명을 붙인다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지적당한 사항을 메모하면서 별표와 밑줄을 치고 있었다.

‘근성이 좋아! 마음에 든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심 사장의 눈빛이 번뜩거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과제 발표를 망친 조필두가 아니라 날 향해서.

“이게 고작 여덟 살짜리의 수완이라고? 아니, 세상천지에 누가 과외를 이렇게 받아?”

나지막한 감탄과 깊은 탄식은 덤이었다.

“이거 제대로 코 꿰였구만······. 이러다 과제 성적순으로 이름 써서 벽에 붙여놓는 거 아냐?”

아니, 어떻게 알았지?

연봉이 동결이라면 성과금 차등의 이유가 명확해야 하는 법.

인생은 역시 당근과 채찍이라니까.

< 조기교육의 꿈 (3)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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