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밥그릇 사수하기 >
과외 선생님들의 발표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심 사장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심 사장은 늘 결재라인을 거쳐 올라오는 보고서만 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신입사원만도 못한 애송이들의 과제를 보게 된 셈이니 눈에 찰 리가 있나.
“하암.”
심 사장이 노골적으로 하품을 했다.
지루함, 따분함, 짜증을 대놓고 표했다.
당연하게도 과외 선생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보다 못한 나는 슬쩍 거들었다.
“심 선생님, 기대치 좀 낮추시죠.”
“여기서 더 낮출 기대치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과외 선생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적당히 봐주세요.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 과제를 해왔잖아요.”
“회사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중요합니까? 최선이란 단어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에요.”
저들이 훗날 계열사 사장직에 오르는 유능한 엘리트라 할지라도, 지금은 신입사원 연수조차 받지 않은 일개 대학생에 불과하다.
“여긴 회사가 아니고, 선생님들은 신입사원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행인 줄 알아야죠. 여기가 회사였으면 임원부터 시작해서 사수까지 내리갈굼이 이어졌을 겁니다.”
심 사장의 박한 평가에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당연히 다음 발표자가 받게 될 압박감은 대단할 터였다.
“한국대 경영학과 4학년 하선우입니다. 저는 최근 3년간 주식가격 자료를 바탕으로 우광의 41개 계열사 주식 등락표를 그래프로 그려오란 과제를 받았습니다.”
“시작하세요.”
이번에도 심 사장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하선우가 그려온 그래프를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분기별로 그래프를 그려왔군. 각 계열사별로 그린 것은 물론이고, 비슷한 계열군을 묶어서 색이 다른 그래프를 작성하는가 하면, 우광의 핵심 계열사만 따로 추려서.”
처음으로 심 사장이 흥미를 보였다.
그러자 다른 과외 선생들은 일제히 놀란 눈을 보내왔다.
“자료를 따로 정리한 건 있나?”
“예. 이건 같은 자료를 표로 작성한 겁니다.”
“좋아.”
심 사장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휘리릭 주식등락표를 검토한다.
표 옆에 작게 전 분기 대비, 전년 대비 등락률이 기록되는 것은 물론 빨간색과 파란색을 사용하여 정리했다.
등락을 한눈에 보기 쉽게 작성한 것이다.
“제법인데?”
그 한마디가 뭐라고.
하선우는 뛸 듯이 기뻐했다.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한국대 경영학과 4학년 하선우입니다.”
“하선우. 기억해 두지.”
나는 유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경호원이자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가 재빠르게 스케치북을 가져왔다. 가로에는 이름이, 세로에는 날짜가 붙어 있는 표였다.
“도련님, 도장은 세 가지로 준비해봤습니다.”
‘최고예요!’, ‘참 잘했어요!’, ‘분발하세요.’라는 글자와 그림이 적힌 도장이었다.
나는 41개 계열사 주식 등락표를 그래프로 그려온 하 선생의 칸에 ‘최고예요!’ 도장을 찍었다.
“칭찬 도장? 그걸 도련님이 아니라 선생들이 받는 겁니까?”
“과제를 수행했으면 평가를 받아야죠. 칭찬 도장에 따라 다음 달에 지급될 성과금이 달라질 거예요.”
과외 선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렸다.
“이왕 하는 과제, 보너스를 얹어 받으면 좋잖아요?”
“허······!”
“참고로 이 칭찬 도장표는 분기마다 마감될 것이고, 그건 여기에 앉아계신 심 사장님께 보낼까 해요.”
나는 씩 웃었다.
“입사 면접 때 참고 사항이 될 테니까요.”
“좋습니다. 참고로 전 유능한 사원을 편애하는 스타일입니다. 싹수 보이는 인재들을 밀어주고 끌어주며 키우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그 말에 과외 선생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뜨거운 눈으로 칭찬 도장과 심 사장을 번갈아 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연봉은 성적순이지.’
저들은 경쟁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 끝에 말단 사원에서 계열사 사장 자리까지 꿰어찬 것이겠지.
* * *
과외 선생님들을 내보내고 난 후.
나는 심 사장과 독대했다.
“도련님,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제법 싹수가 있죠?”
“예, 잘도 골라 뽑으셨군요. 특히 우광 계열사 그래프를 발표했던 친구 말입니다.”
하선우 선생이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모양이었다.
“다들 고만고만해야 정상인데, 혼자 군계일학처럼 독보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만.”
심 사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도련님께서는 왜 그 녀석만 따로 챙기시는 겁니까? 이해가 안 돼서 말입니다.”
“눈치채셨어요?”
“우리 태성화학 대리도 며칠 만에 그런 보고서는 못 올리거든요. 그렇다고 가까운 지인 중에 팀장 혹은 과장급 인사가 붙어서 해줄 만한 양도 아니고.”
심 사장이 피식 웃는 이유는 명백했다.
“어떤 팀장 혹은 과장급 인사가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쏟아가며 잡무를 처리합니까? 안 그래도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심 사장이 손끝으로 내 앞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 자연히 그 친구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아주 유능하면서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이 돌아갈 수밖에요. 왜 도와주셨습니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나는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서요.”
“음?”
“다들 어떻게든 과제를 해보겠다고 끙끙대는 동안, 절 몰래 찾아온 사람이 그 선생님 한 분뿐이었어요.”
“음?”
“제 라인을 타겠다며 충성 맹세를 하더군요. 제발 자기 좀 키워달라던데요?”
“과외 하러 와서 충성 맹세를 바쳐요? 여덟 살짜리 과외 학생에게 키워달라고······. 허, 허허허.”
심 사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수족을 자청하는 사람을 남들과 똑같이 대할 수야 있나요. 하나라도 더 챙겨줘야지.”
“그래서 어떻게 챙겨주셨습니까?”
“족보 하나에 조언 하나를 건넸죠.”
“족보?”
나는 책상 서랍에서 노끈으로 묶은 서류를 하나 꺼냈다.
“태성화학과 태상건설의 주식등락표와 그래프로군요.”
“그걸 참고하라고 내줬어요.”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볼 것 없다.
아까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간추린 것이니까.
정작 중요한 정보는 내가 따로 장부로 정리하고 있으니, 그건 그저 가끔 참고자료 삼아 들여다볼 도식에 불과할 뿐이라 딱히 건질 것도 별반 없을 테고.
“이거 도련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까? 그런데 왜 달랑 이 두 회사밖에 없습니까?”
“그건 우리 아빠 몫이라던 회사였으니까요.”
심 사장이 기특하단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그럼 그 조언이란 건 또 뭡니까?”
“별거 없어요. 그저 회사 일 혼자 하란 법 없다고 알려줬을 뿐이에요.”
나는 과외 선생들과 작성한 계약서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과외비를 선불로, 그것도 과장급 월급을 떡하니 지급해줬잖아요. 그 돈으로 남들의 시간과 노력을 사라고 슬쩍 귀띔해 줬죠.”
“허······!”
“솔직히 이건 혼자 못 하는 일이잖아요. 시간 내에 처리해야 할 과제량이 너무 과하게 많았으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왜 굳이······.”
설렁설렁 계약서를 읽던 심 사장이 퍼뜩 놀란 눈으로 날 돌아봤다.
“설마 그놈이 도련님께 매달릴 거라고 예상하시고 일부러 과중한 과제를 내주신 겁니까?”
“과외 선생님들 중에서도 유독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잔머리를 잘 쓰는 타입인 것 같더라고요.”
난 뒷골목을 굴러다니면서 별의별 놈을 다 만났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빛이 야심만만하고 잔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는 타입이 있는데, 그놈들은 대체로 요령이 좋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서 어떻게든 목표를 완수해내곤 한다.
합법은 물론 편법과 불법을 오가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타입이랄까.
그런 인재는 흔치 않다.
“시간 내에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럼 그 일은 어떻게 해결하려 할까 궁금해졌거든요.
“그게 무능과 유능을,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기준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한 귀띔이에요. 한국대 4학년이라면 동원할 후배가 몇 명이고, 부탁할 인맥이 어느 정도 많을 거예요. 적당히 매수하여 잡무를 나눠맡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기도 하고.”
거하게 술 한잔 사면 기꺼이 도와줄 사람들이 꽤 됐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 도련님께서 수족을 거둬들이면서 제일 먼저 가르쳐준 일이 사람들을 매수해서 성과를 가로채는 일이었습니까?”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매수는 맞지만, 성과를 가로챈 건 아니었어요. 막말로 그들이 태성의 사원도 아니고, 같은 과제를 배당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흠, 그도 그렇긴 하군요.”
“아까 말씀하셨죠. 회사 일에 최선이란 단어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붙어야 한다고. 이건 불법도 아닌데요?”
“······.”
“약간의 요령과 일머리라고 봐야죠. 너는 술 얻어마셔서 좋고 나는 일손을 덜어서 좋은, 윈윈의 관계 형성.”
“······.”
“다들 주머니 가벼울 때 주머니를 풀어서 인심을 사두면 그게 다 호감이고 인맥이잖아요. 그러니 오히려 장려해야 할 만한 일 아닌가요?”
“······그렇죠.”
“한국대 졸업생이라면 사회에 나가 좋은 자리 꿰어찰 엘리트들일 텐데요. 이 나라에서 살면서 굳이 잘빠진 학연, 지연, 혈연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따로 있나요?”
“······없죠.”
심 사장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태성에 흥미를 느껴서 같이 라인 타겠다고 입사 의사를 밝혀온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일인데요. 전 인재 욕심이 좀 많은 편이거든요.”
21세기와 달리 지금 이 시절의 대한민국은 한창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국부가 팽창하고, 회사의 규모가 한창 커질 때.
위가 막혀있지 않아서 출세와 진급은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학벌만으로도 사회의 엘리트 지위를 보장받던 시대다.
“회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회사를 키우는 건 무능한 사원 열보다 유능한 사원 한 명이 더 나아요.”
“맞습니다. 사실 회사 일이란 게 공부만 잘한다고 다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머리가 있어야죠.”
“거기에 눈치도 좋아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할뿐더러, 윗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서 헌신을 바쳐 일할 수 있는 자. 제겐 그런 심복이 여럿 필요해요.”
잡무는 기업 시스템에 맡겨 돌아갈 수 있어도, 임원까지 시스템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키우고 싶은 건 태성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임원이지, 잡무를 맡을 사원이 아니라서.’
병사들이 노를 열심히 저으면 배는 앞으로 나간다.
하지만 선장과 조타수가 키를 아무렇게나 만지면 배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기 마련인 법.
“도련님,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심 사장은 진지하게 물었다.
“아무리 싹수 있는 놈들이라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풋내기들을 굳이 도련님께서 공들여 키우느라 시간을 낭비하십니까? 태성에 입사한 후 사수들더러 키우라고 해두면 그만일 텐데요.”
심 사장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까 라인이란 말씀을 하셨죠? 태성그룹의 직계인 도련님 라인을 잡으려는 놈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도련님께 충성을 맹세하며 심복이 되길 자청하는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란 소립니다.”
“맞아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나도 이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겠죠.”
“그럼 지금 도련님의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입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때 심 사장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으셨죠?”
“예.”
“제가 우광의 계열사를 몇 개나 받기로 결론이 났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제게 넘겨주기로 한 게 정확히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인수할 계열사의 지분이었습니다.”
“그럼 경영권은요?”
“······음?”
“할아버지는 제게 지분을 넘기기로 했지, 계열사의 경영권을 넘긴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심 사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할아버지께 제가 부탁했던 일은 뭐였는지도 기억하세요?”
“으음, 도련님께서 우광의 계열사 지분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태성그룹 임원들을 설득하기로······.”
“임원회의 시간에 할아버지가 그에 관해 일언반구라도 꺼냈던가요?”
“······.”
꺼낸 적 없다.
“할아버지는 태성그룹 임원들 앞에서 제 권리를 공표하는 대신 제게 임원회의 견학 소감을 물으셨을 뿐이에요.”
“으음.”
“그 말이 뭘 의미하겠어요?”
“지분은 내어줄 수 있어도 경영권은 줄 생각 없다는 뜻입니다.”
“왜일 것 같아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팍을 콕 찔렀다.
“내 나이가 고작 여덟 살이기 때문이에요.”
심 사장은 반박하지 못했다.
“대주주인 것은 인정할 테니 얌전히 배당이나 받아 챙겨라. 경영 일선에 앞세울 생각일랑 추호도 없으니 심 사장님께 경영이나 착실하게 배우고 있어라. 그런 뜻이잖아요?”
심 사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몫은 내가 챙겨야죠. 손가락만 빨다가 내 밥그릇 뺏길 생각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벌인 거예요.”
마침내 심 사장은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내 밥그릇 사수하기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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