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12화 (112/189)

< 제가 커버해드리겠습니다 >

“할아버지에게 경영권을 뺏길 생각은 없어요.”

내 밥그릇이다.

“회사는 굴려야죠. 그러려고 경영 전문가 심 선생님을 여기에 모셨고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알아서 해야지!

내 몫은 내가 챙긴다!

“도련님은 이제 고작 여덟 살이십니다.”

“여덟 살짜리 애를 경영 일선에 올리면 태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까 봐 그러세요?”

“예. 태성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받게 될 겁니다.”

“오죽 인물이 없었으면 코흘리개를 임원으로 올려놓을까 하고요?”

“일반적으로 여덟 살이면 한글이나 떼었을까 싶은 수준이잖습니까.”

고정관념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다.

“거기에 재벌기업의 막무가내 인사라고 온갖 의혹과 악의적인 루머는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겁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금수저 물었단 이유로 여덟 살에 임원 명찰을 달면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교 나온 직원들이 게거품을 물고 일어날 거란 뜻이죠?”

심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한 살짜리 어린애가 10억짜리 빌딩을 보유하고 매년 1억 원의 임대소득을 올린다는 소식이 신문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를 이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했습니다.”

안다.

“반면 도련님께서 태성의 임원으로서 전면에 나선다면 손가락질이 향하는 방향이 고정되지요.”

나도 안다니까?

“청와대에서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것이 바로 민심과 여론입니다. 태성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서는 것은 물론 청와대의 제물이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알아요. 지금 이대로는 태성그룹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요.”

“알고 계시다니 천만다행입······.”

“하지만 그건 경영권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될 순 없죠. 그래서 미리 준비했어요.”

“······예?”

심 사장은 눈을 꿈뻑거렸다.

“아! 과외 선생들 말입니까?”

“그게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투자회사요.”

“아······!”

역시 심 사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들으니까 편하구만!

“돈세탁을 목적으로 설립했다는 투자회사가 설마······.”

“돈세탁이 가능하단 건 신분세탁도 가능하단 뜻이잖아요?”

그래서 준비했다!

“제가 왜 굳이 미국에 법인을 세우고 한국에 자회사를 뒀겠어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을 콕 찔렀다.

“우리 투자회사 대주주 이름이 제임스예요. 서류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작성되었을걸요?”

“도련님, 설마 미국 영주권도 가지고 계십니까?”

“설마 그렇겠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돈세탁, 신분세탁.”

나는 손가락을 비볐다.

“돈 찔러주고 안 되는 일이 어딨어요?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데란 건 똑같은데요.”

“그저 돈세탁 때문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한국계 미국인으로 신분도 하나 만들어 놓으셨군요!”

심 사장에게선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여간에 팔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게 계속 튀어나오시는 분이란 말이지.”

나도 심 사장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국가를 하나 우회할 때마다 신분세탁과 자금세탁이 훨씬 쉬워져요. 안 그래요?”

“그래서 홍콩에 사무실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까?”

심 사장의 웃음이 점점 진해졌다.

“국가의 감시와 규제를 덜 받기 위해 설립한 회사인 줄 알았더니.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일을 키우시려는 겁니까?”

“그게 여덟 살짜리인 제가 활동 반경과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어요.”

나는 우광의 41개 계열사 주식등락 그래프를 톡톡 두들겼다.

“저는 투자회사를 앞세워서 내 몫의 계열사를 직접 굴려보려고 해요.”

투자회사의 바지사장은 심 사장, 나는 대주주.

뒤에서 투자와 회사 운영 방침을 결정하지만, 경영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예? 뭐가 또 있습니까?”

“제 나이가 부족할지라도 능력은 부족하면 안 되니까요. 이참에 과외 선생님을 통해 제대로 실무 경험을 쌓으려고 해요.”

심 사장은 두 눈을 꿈뻑거렸다.

“도련님의 실무 경험과 과외 선생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간접경험을 쌓으려고요.”

“······예?”

“엘리트 20명분의 경험을 같이 공유하면서 서로 같이 배우고 이끌면서 성장할 생각이에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하고 덧붙이자, 심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밑바닥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 전부 꿰고 있어야 하잖아요.”

“예, 그, 그렇죠?”

“회사 돌아가는 시스템과 업무에 관해서는 얼추 파악한 상태예요. 하지만 실무를 직접 경험을 해본 적은 없어요.”

천벌 받아서 얽히는 인연마다 악연뿐이었던지라.

엮이는 놈들마다 밥 먹듯이 배신을 하는데 회사는 어떻게 굴리겠나.

회사는 나 혼자 잘났다고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

‘내 주특기는 스승님께 배운 안목을 가지고 투자로 돈을 불리는 거였지.’

투자의 종목과 규모가 점점 커진 덕분에.

기업 전문 투자가로 이름을 날리는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거물이 되었다.

적당한 기업을 물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게 사들였다.

‘괜히 신림동 개미지옥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아니었고.’

회사를 잡아먹기 위해서 함정을 파거나, 협박과 로비를 일삼는 건 기본이었다.

여차하면 여론전과 전면전은 물론 돈지랄도 불사해가며 기어이 고꾸라뜨린 후에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자르고, 불리고, 팔고, 버리고.

적당히 손 봐서 비싼 값에 회사를 난도질해 팔아치우곤 했다.

‘우광의 계열사도 그런 식으로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 하지만 그래 봐야 돈밖에 더 남아?’

돈? 좋지!

세상사 웬만한 일은 전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거든.

그만큼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대단하다니까?

하지만 돈만 있다고 다 이룬 것도 아니더라.

‘재벌가 일원이 되었으니, 이번엔 회사를 키워보는 일도 해봐야지. 회사를 굴리다가 영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쪼개 팔아도 늦지 않으니까.’

그쪽 분야는 내가 전문가이니 손해 볼 걱정은 할 필요 없잖아?

좀 말아먹으면 어때?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게다가 내 곁엔 경영의 귀재라는 심 사장이 있다구?

“깨지고 구르면서 뼈에 새기라는 심 선생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려는데, 왜, 마음에 안 드세요?”

“아뇨, 그럴 리가요.”

심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열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회사 경영에 뛰어드는 분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해야죠. 태성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심 사장은 뿌듯하게 웃었다.

“아무리 빨라도 몇 년은 현장에서 굴러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거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일반 사원들이라면 결코 제안하지 않을, 아주 터무니없이 황당한 소리지만요. 허허허!”

기뻐 보이는 웃음이었다.

“왠지 도련님이라면 거뜬히 해내실 것 같군요. 아무래도 도련님께선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종류의 인재가 아닌 듯싶습니다.”

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도련님이 가시는 길, 제가 함께 따르겠습니다!”

심 사장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왕 밑바닥을 구를 거라면 똑똑한 20명의 엘리트들과 함께하는 게 좋지요. 그들이 하는 실수와 판단을 지켜보며 같이 개선점을 찾다 보면 시간 대비 시행착오의 경험을 늘릴 수 있을 겁니다.”

심 사장은 말을 할수록 웃음소리도 함께 커졌다.

“정혁 도련님이시라면 신입사원부터 시작해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면 적어도 십오 년은 걸리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늦어요. 스무 살에 입사해도 십오 년이면 서른다섯이에요.”

“맞습니다. 사실 서른다섯에 임원을 달면 엄청나게 빠른 겁니다만, 그건 범인들의 기준이니까요. 도련님께 같은 잣대를 들이밀면 섭하지요.”

심 사장은 턱을 쓸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과외 선생들과 맺은 계약이 6년. 그 정도면 밑바닥 실무에선 완전히 졸업할 것 같고······.”

“그래 봤자 태성의 임원이 되기엔 한참 모자랄 거예요. 그래서 심 사장님이 필요한 거고요.”

“제가요?”

“제가 벌이는 일을 커버해줄 믿음직한 아군이자 유능한 전문 경영인이 여기 계신데요.”

“하하하, 인제 보니 도련님의 장대한 계획에 저도 포함이었던 겁니까?

“도와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도련님은 원하는 대로 뜻을 펼쳐 보십시오. 뒤는 제가 커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씩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곁에서 같이 보고 듣고 배우겠습니다.”

나는 두 손을 배꼽에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그런데 갑자기 심 사장은 퍽 안타까워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아무래도 요즘 제가 하는 일이 도련님을 데리고 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은 아닌지라 그건 좀······.”

“왜요?”

“음,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심 사장은 주머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빼곡하게 적힌 스케줄표였다.

“오늘 저녁은 장수은행장과, 내일 오전엔 삼무저축은행장과, 내일 점심은 신용협동조합장과, 오후엔 농협은행장과, 저녁엔 수협은행장과 술 약속이 있습니다.”

아니, 뭐가 죄다 술 약속이야?

게다가 낮술까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한 달 스케줄이 꽉 찼지요. 그런 이유로 도련님을 데리고 다니기 좀 그렇습니다.”

“웬 술 약속이 이렇게 많아요?”

“그야 회사를 제대로 굴리기 위해서죠. 일을 따내기 위한 영업이라면 역시 술 접대만 한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회사, 지금 사이즈가 코딱지만 한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한 회사라서 내 사람들만 집어넣어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투자회사에 그렇게 일거리 따내야 할 게 많았나요?”

“일은 찾아서 하는 겁니다. 회사는 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알아서 굴러간답니까?”

“쉬지 않고 술 접대와 식사 접대를 해야 할 만큼?”

“왜요? 그저 돈세탁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니까 대충 굴려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심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업을 따고 투자 제안서를 돌리고 그에 따른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않고 제가 직접 처리해야죠.”

이렇게 일해야 10억짜리 회사를 7년 만에 300억으로 키울 수 있는 건가?

“단지 그걸 저 혼자 다 처리하느라 지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뿐입니다. 술 접대는 그걸 가장 빠르게 달성할 방법이니까요. 학연, 지연, 혈연까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봐야죠.”

아니, 그래서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술 약속을 잡아가며 일했다고?

“거기에 태성화학 재인수는 덤이고요.”

심 사장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가 술이 꽤 센 편이긴 한데도, 요즘 진짜 죽을 맛입니다. 잠깐, 실례.”

심 사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구취제거제를 꺼내 칙칙 뿌렸다.

그러고 보니 심 사장의 한숨에 술 냄새가 살짝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돈세탁하려고 만든 회사를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경영해야 할 일이에요?”

“그러면 나 몰라라 내버려 둡니까? 일을 맡았으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회사를 맡았으면 열심히 키워야죠.”

투철한 사명감이었다.

“제가 도련님을 위해 앞으로 회사를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스무 배는 더 크게 키워놓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심 사장은 제 가슴을 팡팡 쳤다.

“제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태성에서도 사장 자리까지 기어 올라왔지요. 이게 제 자부심입니다!”

마음에 든다, 심 사장!

이거 기대를 받았으면 부응해주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좋아요. 그럼 그 문제는 제가 커버해드릴게요.”

“예?”

투자회사는 작게 운영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임원급 엘리트들은 따로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 사장이 홀로 고군분투했던 모양이고.

“도련님이 제 커버를···, 아니, 어떻게요?”

“손발이 부족한 게 문제라면 수족을 붙여주면 해결인 거잖아요?”

“허, 저 풋내 나는 애송이들을 붙여주겠다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암만 똑똑한 놈들이라고 해도 임원 노릇 할 때까지 키우려면 안 그래도 고생길이 훤합니다.”

심 사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도련님께서 붙여주셨던 태성그룹 경호원만 해도 그렇습니다. 수족으로 쓰기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그러니까요. 심 사장님을 적극적으로 보좌해 줄 경영 쪽 고급 인력으로 붙여주겠다니까요?”

“예?”

나는 씩 웃었다.

“안 그래도 남아도는 고급 인력이 있잖아요? 제가 책임지고 수급해 올게요.”

“허, 도련님께서 뭘 모르셔서 그러는 것 같은데. 임원 자리를 꿰찰 만한 고급 인력이 어디 흔한 줄 아십니까?”

심 사장은 체념 섞인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남아도는 고급 인력들이 없긴 왜 없어요? 백수가 된 태성건설 임원들이 있는데요.”

< 제가 커버해드리겠습니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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