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노리는 것 >
황금빛과 붉은빛이 섞여 있는 서류는 육군보안사령관의 것.
황금빛과 검은빛이 섞여 있는 것은 중정부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서류들을 할아버지 앞으로 슬쩍 들이밀었다.
“이번 청와대 신년 보고회는 아마도 엄청 살벌할 거예요.”
정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신년 오찬 모임이라면 군부와 중정의 주요 인사들에겐 신년 보고회란 게 있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가 청와대에 보고된 직후잖아요.”
지금 정부는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자 부정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뒷돈을 받아먹은 군 장성과 고위 관료들의 명단이 보고되었을 텐데, 청와대의 주인이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요?”
“각하라면 분명 기강을 잡으려 하실 테지.”
“분명 오른팔이라는 경호실장이 날뛸 거예요.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물론 각하께서는 이를 묵인하실 테고.”
“그러라고 준비한 자리일 테니까요.”
우광건설은 전방위로 뇌물을 살포했다.
“뇌물을 받아먹었단 빼도 박도 못한 증거가 나왔어요. 그 명단에 오른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각하께 걸렸으면 죽었다고 복창해야지. 아마도 불안해서 밤잠도 설치고 있을걸?”
그래서 살생부였다.
우리는 그걸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의 손에 쥐여 줬다.
그래서 뇌물이었다.
“그렇다고 그놈들을 전부 숙청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줄줄이 코 꿰인 수뇌부가 어디 한둘이야? 국가 행정이고 군부고 마비가 될 게다.”
“청와대에서 바라는 바가 아니겠군요.”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하진 않을 게야.”
“대신 죽었다고 복창할 때까지 갈구겠죠.”
나는 할아버지 앞으로 황금빛이 섞인 서류를 더 가까이 슥 밀었다.
“살벌함이 예정된 상황에서 할아버지가 이걸 중정부장과 육군보안사령관에게 미리 건네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선물로.”
뇌물은 청탁을 위해 건네는 성의지만, 선물은 마음으로 전하는 호의랬다.
“빼도 박도 못할 약점을 숨겨줬네요?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눈 밖에 나지 않게 되는 데다,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지 않도록 챙겨준 선물이라면? 엄청 고마울 것 같지 않아요?”
절대 권력자의 의심만 피해도 그들로서는 충심을 증명한 것과 똑같다.
할아버지가 선물하는 호의는 그런 것이었다.
“오호라, 사막에서 조난당한 이에게 건네는 한 모금의 물은 목숨을 구한 은혜처럼 취급당하는 법이지. 같은 의미로 우리 태성 또한 중정부장과 육군보안사령관에게······.”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청탁할 생각이라면 넣어두세요.”
“왜? 각하의 최측근이 전부 우리 태성을 밀어준다면······.”
“각하의 의심이 태성으로 향하겠죠.”
“······!”
귀까지 걸려 있던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돌연 굳었다.
“이미 우광이 어떤 식으로 뇌물을 뿌려 이 나라의 수뇌부들을 구워삶았는지 목격한 상황이에요.”
의심이라는 놈은 한번 싹을 틔우면 좀처럼 죽질 않는다.
의심받는 대상이 죽거나, 의심하는 대상이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난다.
“그럴 때 최측근 전원이 지지하는 기업이 나타나요? 어떻게 보일 것 같아요?”
“끄응.”
“그깟 계열사 하나 날로 먹자고 최고 통수권자의 눈 밖에 나면 쓰나요.”
“······그래, 네 말이 맞다.”
할아버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에게 약속을 받아내셨다면서요. 그럼 나머지 둘의 묵인만으로도 충분해요.”
“알았다. 그리하마.”
“어차피 태성은 우광정유를 두고 삼황이랑 진흙탕 개싸움을 벌일 것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도 그걸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2’라고 적힌 쪽지를 꺼냈다.
“난 솔직히 이참에 우리 태성이 우광정유를 인수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할아버지가 눈짓하자, 김 비서는 심 사장이 직접 작성한 서류를 꺼냈다.
<석유파동이 발생하는 경우를 상정한 우광정유 인수 계획안>
“최측근을 간신히 구워삶아 놓고도 왜 물러서야 하지? 기회는 달려들어서 먼저 잡는 것이 임자야.”
“득보다 실이 많아요.”
나는 씩 웃었다.
“청와대의 주인이 왜 우광을 뜯어먹도록 놔두겠어요?”
“그야 측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려면······.”
“태성이 각하의 측근이랄 수는 있고요?”
“······!”
할아버지는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이득이 걸린 싸움 앞에서 인간은 추해져요. 그 싸움을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셔야죠.”
“그 말은······.”
“측근들의 세력 각축장에서 위험의 낌새를 살펴보기 딱 좋지 않겠어요?”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흥정을 붙이세요.”
“흥정?”
“이왕 남에게 내어줄 우광정유라면 더 높은 값을 치르도록 유도해야죠.”
“곳간 주머니가 텅 비도록?”
“바로 그거죠!”
정치싸움이라면 이골이 난다는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가 돈 얘기만 나오면 혈색이 돈다.
“정혁아, 넌 진짜로 석유파동이 터지리라 보는구나?”
“물론이에요. 우리 아빠가 왜 청와대 오찬 초대장을 받았겠어요?”
청와대의 주인에게 제2의 석유파동 가능성을 점쳤기 때문이었다.
“석유파동이 터지면 피 보는 건 정유회사니까 그리도 몸을 사리는 게냐?”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더 큰 걸 노리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정혁아. 안 그래도 이 일을 청와대 오찬에서 보고하기 위해 내 딴에 꽤 신경 써서 자료를 모았다.”
안 그래도 이건 태성그룹 전(全) 임원이 달려들어 궁리하는 문제였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었고, 외국 시장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고, 중동의 사정에 귀를 기울여봤지. 하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그 확률이······.”
“낮아 보이겠죠.”
“그래.”
하지만 천재지변 같은 세계급 이벤트가 언제 징조가 뚜렷해야만 발생했던가?
“청와대 오찬에서도 그렇게 보고하세요.”
“응? 그걸로 될까?”
“아빠는 정계 거두들에게 석유파동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초대된 역할은 충분히 해낸 거잖아요.”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하께 눈도장을 찍으려면 보다 강하게 주장해야 하는 거 아니었더냐?”
“석유파동이 일어나봤자 선견지명이란 눈도장을 조금 찍는 데 반해, 안 일어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니 덤텅이만 왕창인데요?”
“그건······.”
“미래 일을 다 맞히면 그게 무당이지, 장사꾼이에요?”
“······그건 맞지. 그래, 알았다.”
할아버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우광정유 인수 쟁탈전에서 빠지마.”
“고마워요, 할아버지.”
“석유파동이 터졌을 때 적자가 쌓인 정유회사를 싸게 인수할 기회를 노린다 치자!”
할아버지는 ‘3’이라고 적힌 쪽지를 책상 위에 올렸다.
“대체 어떤 계열사를 노리고 있기에?”
“우광제약과 우광병원이요.”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성준이가 골랐던 계열사로구나.”
“네.”
우광병원과 우광제약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우광병원은 접근성이 좋은 자리에 위치한 데다 일본 와세다병원과 연계하여 국내 1위 항암전문병원으로 거듭나는 곳이다.
또한 우광제약은 일본의 요우기제약과 기술협약 로열티를 지급하며 제약 쪽엔 히트 상품을 여럿 보유했다.
“좋다. 이왕 말 나온 김에 톡 까놓고 말해보자. 150억의 후원금으로 지분을 주장하겠다는 계열사는 어디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
“우광장학재단과 우광연구소요.”
반면 우광연구소와 우광장학재단은 시커먼 똥색이었다.
“이 역시 성준이가 인수하자고 주장했던 계열사로구나.”
“네.”
“효도도 정도껏 해야지.”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광병원과 우광제약은 그렇다 쳐도 우광장학재단과 우광연구소는 영 마뜩지 않아. 너 역시 나와 같은 의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김 비서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내가 우선순위를 매겼던 임원회의 자료를 건넸다.
“봐라. 이 둘은 네가 평가를 아주 박하게 내렸던 계열사였다.”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광장학재단과 우광연구소를 원한단 말이지?”
“네.”
“왜?”
할아버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단일 계열사로만 보면 똥색이라서 나도 처음엔 영 수지맞지 않는 장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난 똥색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걸 봤다.
똥색이었던 우광정유가 심 사장의 보고서엔 황금색이었거든.
뭐가 달랐는가 하면,
‘연계된 계열사 간에 시너지가 생기더라고?’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석유파동이 발생하는 경우를 상정한 우광정유 인수 계획안>을 힐끔 봤다.
이 보고서 사이에 유독 황금색이 번쩍거리는 서류가 끼워져 있었거든.
‘그래서 준비해봤지. 우광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연계 그룹을.’
내가 우선순위를 매겼던 임원회의 자료를 쏙쏙 뽑기 시작했다.
“사업에 효심 따위를 끼워넣으면 쓰나. 사업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누가 사업을 효심으로 해요?”
나는 진지했다.
“그러는 할아버지는 큰아들에 대한 사랑만으로 인수합병을 결정하셨어요?”
“뭐?”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를 인수하실 생각이잖아요.”
“······그래.”
이유라면 간단하다.
장자인 큰아버지를 밀어주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는 그저 똥색에 불과하다.
“태성그룹 차원에서 인수하고 싶은 계열사라면 우광조선일 테고요.”
“맞다.”
우광조선 역시 황금색이었다.
“이건 석유파동의 가능성을 높게 점쳤을 때 할아버지가 계산한 최고의 조합인가요?”
“그래.”
우리는 서로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혁아, 석유파동이 터지면 석유 의존율이 높은 자동차와 중장비는 된통 한파를 맞아 잔뜩 쪼그라들 게다.”
그래서 과거에 태성자동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어차피 한겨울 찬 서리를 맞아야 한다면 쭉정이들이 죄다 죽어나갈 때 제일 덩치 큰 놈만 버티는 법이야.”
할아버지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를 인수하려는 이유였다.
“장남을 지켜 경영권 싸움을 뒤로 늦추기 위해서겠군요.”
“그, 그건······!”
차남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석유파동에 크게 휘청거릴 장남에 비해 차남의 계열사는 비교적 내수에 중점을 둔 덕에 버틸 만할 테니까.
“거기에 우광조선을 인수하면 중장비를 맡은 장남은 물론, 유통과 물산을 맡은 차남까지 숨통이 트이게 될 테고요.”
“크흠!”
“석유파동이 터지면 연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자동차 공업만 살아남을 거예요. 중장비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씩 웃었다.
“석윳값이 무지막지하게 치솟았는데, 민간용 자동차와 중장비를 팔아서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기름으로 움직이는 배는 뭐 다를 것 같아요? 조선소 인수해서 수출입 물류에 쏟아붓는다고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겠어요?”
“크흠!”
나는 우광자동차, 우광중장비, 우광조선소, 우광병원, 우광제약 서류 위에 우광화학까지 겹쳐 놓았다.
“여기에 우광연구소를 얹어서 인수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똥색과 황금색이 섞인 서류임이 분명한데.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밝은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쉽군. 할아버지는 이 황홀한 광경을 보지 못하실 테지.’
그러니 이리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계신 거겠고.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돈만 잡아먹는 우광연구소는 구제할 길 없이 쫄딱 망하는 거지.”
할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연비 개선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느냐? 연구소에 일감 던져 놓으면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내듯 바로 결과가 나온다더냐?”
“아니죠. 발상을 전환해 보세요.”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가 지금 뽑아놓은 산업을 한데 묶으면 시너지가 발생할 만한 산업이 뭐가 있을 것 같아요?”
거기에 태성식품과 태성패션이란 글자를 쪽지에 적어 넣어 올렸다.
화아아악!
유례없는 황금빛이 폭발했다.
할아버지는 입으로 몇 번이나 굴려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듣자 하니 청와대에서 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더, 미사일 등 각종 병기를 생산할 것이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하겠단 발표를 할 예정이라면서요?”
“방산!”
빙고.
지금은 중동 전쟁이 수시로 터지고, 군부 쿠데타가 기승을 부리는 데다.
미-소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자원무기화를 천명한 탓에 중동의 산유국들이 앞다투어 자주국방 강화를 부르짖고 있는 상황이었다.
< 내가 노리는 것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