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24화 (124/189)

< 각자의 사정 >

둘째 큰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태성화학을 혼수로 가져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무슨 수로? 친정 덕을 못 보니까 결국 남편 덕이나 시부모님 덕을 보겠단 뜻 아니니?”

둘째 큰어머니는 혀를 찼다.

“동서, 설마하니 이번에도 자식 덕에 얹어 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만 봐도 어린 자식을 앞세워서 몰래 아버님께 부탁했을 거면서.”

“네? 그건 정말 오해예요.”

“그럼 우광의 혼사를 파투 낸 것도 오해야? 동서 한 명 때문에 두 집안이 얼마나 껄끄러워졌는지는 알고? 얽힌 사업이 몇 개고, 얽힌 사람이 몇 명인데.”

둘째 큰어머니가 내려다보자,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그저 가족끼리 저녁 식사나 한 끼 같이하려고······.”

“동서는 참 좋겠다. 성준 서방님이 없는데도 아버님이 나서서 챙겨주고. 난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친정아버지랑 같이 왔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파르르 떨리는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왜 지은 죄도 없는데 고개 숙여 사과하세요? 고개 들어요.”

“정혁아.”

“할아버지랑 같이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대역죄라고요.”

나는 어머니 손을 꽉 잡았다.

“남편 덕, 시댁 덕 보는 게 뭐 어때서요? 난 우리 엄마가 내 덕에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는데요?”

“정혁아, 그만해.”

“우리 엄마 그렇게 못마땅하게 보실 것 없어요. 우리 때문에 날렸다는 태성화학이요? 되찾아오면 그만이잖아요?”

나 역시 코웃음을 쳤다.

“두고 봐요. 우리 엄마가 태성화학을 되찾아오나 못 오나. 그때 가서 다시 따져 보자고요.”

“죄송해요, 형님.”

어머니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애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몰라 이러는 거예요. 제가 나중에 따끔하게 타이를게요.”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머니의 난처한 표정에, 난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표정으로 따졌다.

-둘째 며느리 단속 안 하실 거예요?

할아버지는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들 그만해라. 피곤하구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난 새해 첫날에 떡국 먹을 때도 느꼈는데, 왜 할아버지는 두 며느리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으실까.

며느리들에 대한 사랑이 워낙 깊어서?

자식들 밥그릇을 챙겨주는 것처럼 며느리들의 발언권도 챙겨주시는 건가?

“가족끼리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날을 세워?”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혁아, 엄마랑 먼저 들어가 봐라. 내 사돈과 잠시 할 말이 있으니.”

“그래, 너도 먼저 들어가 있어라. 애들 배고프다잖냐.”

노신사는 중절모를 들어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말을 저리 심통 맞게 해도 속까지 심통 맞은 애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안팎으로 시끄럽다보니 속이 시끄러워서 저러는 겁니다. 사돈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

“우리 애가 요즘 태성화학을 되찾아 오기 위해 각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나섰겠습니까.”

“아빠!”

“태성화학은 사돈께서 오래 공들여 키운 기업이란 걸 잘 압니다. 이대로 놓치기에 아깝다는 것도, 지금 나서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잃게 될 거란 것도 압니다. 그래서 큰맘 먹은 겁니다.”

노신사는 쓰게 웃었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게 가족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태성화학을 되찾는 일이라면 기꺼이 한 손 보태야죠.”

“아닙니다, 사돈. 태성화학은······.”

할아버지는 난색을 표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만, 태성화학이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혁이 말마따나······.”

딸랑.

식당 문이 열렸다.

훤칠한 키와 세련된 블랙 롱코트, 회색 목도리를 매고 있는 모델 같은 남자였다.

“아빠!”

“선배?”

아버지가 우리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정혁아. 수진아.”

아버지가 긴 다리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버지, 사돈어른, 형수님과 조카들도 함께로군요.”

아버지는 나를 덥썩 안아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 목을 꽉 끌어안았다.

나지막하게 웃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우린 먹고 나오던 참이었고, 둘째네는 아직이야.”

할아버지가 대답하자, 아버지는 지갑을 꺼냈다.

“조카들, 오늘 저녁은 삼촌이 책임질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잔뜩 팍팍 시켜. 알았지?”

“네에!”

“삼촌, 아니, 작은아빠! 사이다도 시켜도 돼요?”

“엄마가 뼈 삭는다고 자꾸 못 먹게 해요.”

“음, 계산은 해줄 수 있는데, 형수님께 허락받는 건 삼촌도 자신 없다.”

아버지는 지갑에 들어있던 지폐를 통째로 꺼내 사촌 형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너희들 용돈 해.”

“나이스!”

“삼촌, 최고!”

“작은아빠라니까!”

사촌 형들은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좋아했다.

“그걸 왜 네가 계산해? 당연히 계산은 내가 해야지! 내 새끼들 먹이는 일인데!”

할아버지도 지갑을 열었다.

“돈도 너보단 내가 더 많다!”

“아버지, 이번엔 저한테 양보하시죠. 저도 이참에 형수님께 점수 좀 따려고요.”

“네가 둘째네한테 점수 딸 일이 뭐 있다고?”

“이 사람 앞으로 예쁘게 봐주십사 부탁하려고요.”

“뇌물이란 소리야?”

“가족끼리 뇌물이 다 뭡니까?”

“금품과 청탁이 오갔으면 뇌물이지. 뇌물이 별거야?”

“그럼 뇌물이라 치죠 뭐.”

한 팔로는 나를 들고, 나머지 다른 팔로는 어머니를 살폿 끌어안으며 아버지는 웃었다.

“조카들과 형수님께 저녁 한 끼 사는 것뿐인데, 그게 선물이냐 뇌물이냐를 따져봤자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아버지는 내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했다.

“정혁아, 맛있게 잘 먹었어?”

“네.”

“그런데 왜 그렇게 인상을 팍 쓰고 있었어? 속이 안 좋나? 아빠가 소화제 사올까?”

“체한 거 아니에요.”

“그럼 열이라도 났나?”

아버지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더니 작게 이마를 비비며 빙그레 웃으셨다.

“졸려서 그러나?”

동시에 사촌 형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부러움과 놀람, 그리고 약간의 시무룩함과 씁쓸함.

삼형제 중 막내라는 신혁이 형이 눈을 내리깔면서 ‘진혁이는 좋겠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첫째인 예혁이 형이 막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진혁이가 아니고 정혁이래잖아.’ 하고 속삭였다.

“사돈총각은 바늘 들어갈 틈도 없는 목석인 줄 알았더니, 내 여태 잘못 본 모양이군요.”

우리 세 식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신사가 쓴웃음이 섞인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가족이 단란한 게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허허허.”

둘째 큰어머니는 묘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니, 서방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억울? 뭐가요?”

아버지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 수진이와 정혁이랑 떨어져 지냈던 건 좀 억울하긴 합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요.”

아버지는 난처한 듯 웃었다.

“만일 태성화학을 두고 하신 말이라면, 그건 전적으로 제 탓이라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튼소리! 네가 태성그룹 총수야? 우광에 넘기기로 결정한 사람은 나야!”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을 떠밀었다.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 봐라. 멀리 안 나가마.”

“예, 그럼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뵈어요.”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리자, 아버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머니를 돌아봤다.

“잠깐만.”

아버지는 목에 둘렀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 어머니 목에 둘러주었다.

찬 바람이 들지 않도록 꽁꽁 여며주고 나서야 어머니 손을 잡고 제 주머니에 쏙 넣으셨다.

“밖에 추워. 감기 들어.”

다정한 말에 어머니는 작게 웃었다.

“정혁이는······.”

“그럼 난 아빠 목도리!”

나는 아버지 목을 꽉 끌어안았다.

세련되고 묵직한 남자 향수가 훅 흘러들었다.

아버지 어깨 너머로 흔들리는 시야에 잡힌 것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선 채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둘째 큰어머니였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딸랑.

우리는 그렇게 음식점 문을 나섰다.

한겨울 밤바람이 코끝을 싸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따뜻한 곳에서 있다가 맞는 된서리에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것 봐. 춥다고 했잖아.”

“음식점 안이 따뜻해서 이렇게 추울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얼른 가자. 히터 빵빵하게 틀어줄게.”

그렇게 주차장까지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쉿.”

둘째 큰아버지는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을 막았다.

그는 짙게 화장한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냥 호텔 레스토랑 가자니까요. 태성호텔 스테이크보다 맛있는 거 진짜 확실해요?”

흐트러진 옷차림, 구겨진 와이셔츠에 찍힌 립스틱 자국, 찢어진 여자 스타킹.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싸구려 여자 향수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나왔다.

문득 태성그룹 보고서에 한 줄로 처리됐던 정보가 떠올랐다.

<태성그룹 2대 총수 차기준은 사생활이 난잡하여 가정 내 불화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 * *

차 안은 빵빵하게 틀어놓은 히터로 따뜻했다.

등 따시고 배 부르니 나도 모르게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선배, 어떻게 거기까지 오셨어요?”

“김 비서님이 연락하셨나 본데, 난 그때 현장에 나가 있느라 확인이 좀 늦었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아버지랑 저녁을 다 먹고.”

“그러게요.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는데요.”

어머니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아버님께서 사과하셨어요.”

“음?”

어머니가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있어서 노랫소리 같았다.

“신기해요. 섭섭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아버님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그랬어?”

“아버님께서 우리 부모님도 찾아뵙고 용서를 구하며 설득하시겠대요. 우리 결혼이요.”

“용서라면 내가 빌어야지. 설득도, 결혼 허락도 내가 받을게.”

어머니가 두 손을 꽉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집을 뛰쳐나오던 때요. 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대들었어요.”

“네가?”

“네. 내 딸 인생 이렇게 망치는 꼴은 못 본다며 차라리 애를 떼자는데. 전 죽어도 우리 아이는 포기 못 한다고 대들었어요.”

“······.”

“당장 선배를 불러오라는데, 그럴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낮게 탄식했다.

“날 부르지 그랬어. 맨발로 달려갔을 텐데.”

“돈 봉투 받을 때 들었거든요. 선배는 우광그룹 따님이랑 약혼했다고. 혼사가 파기되면 동업도 파투 날 거라고. 남의 집안에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만 떠나달라고.”

“말하지 그랬어. 내 얼굴 보면서 직접. 따져 묻지 그랬어.”

“그래서 몰래 찾아갔었어요.”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

“매일매일. 학교랑 선배 집 앞을 오가며 온종일 기다렸었어요.”

“······몰랐어. 전혀.”

“나중에 알았어요. 선배 군대 갔더라고요.”

“아, 약혼식 피한다고 급하게 자원입대하느라. 편지 남겼는데, 못 받았어?”

“편지?”

“못 받았구나.”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선배가 일부러 나를 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들켰죠.”

입덧 때문에.

어머니가 덧붙인 말이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애를 가졌다고 당장 병원으로 끌고 가려 하지 뭐예요. 너무 놀라서 추리닝 바람으로 뛰쳐나갔어요.”

아버지는 왼손으론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은 파르르 떠는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등 뒤에서 ‘수진아, 가지 마!’ 하고 어머니가 부르는데도, 동생이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부짖는데도, 달려오는 아버지를 피해서 난 택시를 잡아타고······.”

어느새 어머니의 목소리엔 물기가 섞였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요. 모든 걸 다 버리더라도 지키고 싶었거든요, 우리 아이.”

< 각자의 사정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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