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25화 (125/189)

< 선전포고 >

나는 팔짱을 낀 채 뚱하게 앉아 있었다.

토요일이라고 신이 나서 텔레비전을 끼고 살던 저승사자가 혀를 찼다.

[다리 좀 그만 떨어라. 복 떨어진다.]

‘복 떨어지는 거 확실해? 저승에서 정식으로 공증된 사항이야?’

[뭘 또 공증까지 따져.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미신이야, 관용구야?’

[그냥 정신이 사납다는···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뾰족하게 굴어?]

‘안 그래도 열받은 사람한테 누가 시비 걸래?’

[허어······!]

저승사자가 텔레비전도 마다하고 양반다리를 한 채 홱 돌아앉았다.

[과외 선생들한테는 산더미 같은 과제를 내주지 않나, 임원들에게는 온갖 잡무를 떠넘기지 않나, 심지어 멸치 똥 따는 일마저 유종태에게 미루더니······.]

저승사자가 방바닥을 탕탕 치며 말했다.

[여기 앉아 봐. 우리 대화 좀 해.]

‘짜증 나니까 여친 같은 발언은 삼가해 줄래? 우리끼리 사이좋게 마주 보면서 노닥거릴 게 뭐 있다고.’

[왜 답지 않게 굴어?]

저승사자가 미간을 씰룩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진즉에 이미 정리 끝냈을 일이면서.]

‘그건 그렇지.’

인정.

‘뭐랄까. 이건 평생 처음 겪는 문제라서 낯설다고 할까?’

[뭐? 평생 처음 겪는 문제? 너라면 웬만한 더러운 꼴은 전부 보고 살았을 텐데?]

그래, 나 전생에 천벌 받은 사람이다!

여기에 눈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누구 덕분에!

배신, 이간질, 뒤통수, 보복, 원한, 살해 협박, 협잡질, 사기 등 안 당해 본 게 없긴 하지.

하지만 말이야.

‘가족이란 게 있어봤어야 뭘 알지.’

[뭐?]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즉 캐묻든, 찌르든, 조지든, 덮든! 계획, 구상, 실행까지 끝냈을 일이었다고. 깔끔하고 간단하게 뒤처리까지 끝.’

[그렇게 하면 되잖아. 당장 계획, 구상, 실행해버려.]

‘가족이라면서. 진짜 찌르고, 조지고, 덮고, 캐물어도 돼? 내 식대로?’

[그, 그건······.]

저승사자가 곤란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좀 문제가 있을 듯.]

‘그것 봐. 그러니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말할수록 미간의 골이 깊어진다.

‘나한테 부모가 있었어, 형제가 있었어? 돌봐주는 친인척은 물론 하다못해 결혼을 약속한 여자조차 없었는데.’

[······그랬지.]

‘죄 날 뜯어먹으려고 눈에 불을 켠 사람들만 잔뜩이었으니,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면 됐단 말이야? 인간관계 자체가 심플했었다고.’

[······그렇지.]

‘하지만 가족이라잖아. 수틀리면 인연 끊고 다신 안 볼 사람들이랑은 달라. 어제 싸웠다가도 오늘 같이 밥 먹고 내일 모여서 제사 지내야 하는 사이란 말이지.’

[크흠.]

‘적당히 어떻게 봐줄 것이냐. 어디까지 봐줄 것이냐. 얼마나 참아야 하느냐, 언제까지 간 봐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우, 어렵다, 어려워!’

이보다 더 어려운 난제가 또 있을까 싶다.

[그치만 너한테도 가족이랄 게 있긴 했던 것 같다만?]

‘아, 강우?’

[그래, 네가 주워다 키운 양아들. 걔랑은 부대끼며 살았을 거 아냐. 그 경험을 빗대서 궁리해보면 되지 않을까?]

‘강우는 경우가 좀 다르지.’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우는 나한테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쩔쩔맸어. 목숨 빚을 진 사람처럼 굴었다고.’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한겨울 한밤중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내복 바람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강우를 따라 집에 들어가 봤더니 죽은 부모의 시체와 며칠이나 함께 살았던 건지, 집 안 꼴이 참 가관이었다.

뒷수습을 해주고, 안쓰러운 마음에 내 호적에 올려 키운 것이 강우였다.

‘강우는 한 번도 말대꾸란 것을 해본 적도, 내게 화를 내거나 원망이나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도 없어. 그저 기쁘다, 고맙다는 말밖에는.’

길러줘서 고맙다, 돌봐줘서 고맙다, 놀아줘서 기쁘다, 용돈 받아서 신난다 등.

긍정적인 피드백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것도 제대로 된 가족 관계랄 수 있을까?

‘난 친아들처럼 생각했었다만 강우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것까진 내가 어쩔 수 없잖아.’

상견례가 떠올랐다.

결혼하겠다던 여자가 원하는 것은 강남에 위치한 80평형대 아파트였으니, 그까짓 것 내가 못 해줄 것도 없었는데.

강우는 키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내가 준비한 통장과 한강뷰 펜트하우스를 거절하고 결혼을 파투 냈다.

강우가 상견례 자리로 돌아간 이유도 죽은 친어머니의 통장을 가져가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좋은 아들, 착한 아들이었지.’

그래서 더 안쓰러운, 내 아픈 손가락이었다.

‘한번 꼬인 인간관계 실타래를 푸는 건 참 어렵더라. 그렇다고 내버려 두니까 남모를 상처만 쌓이더라고. 그래서 반성했지. 어차피 곪아 터질 속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째는 게 나아.’

나까지 손 놓으면 우리 어머니가 계속 이렇게 시집살이할 거 아냐!

손윗동서라고 찍소리도 못 하고 수그리는 걸 볼 때마다 답답해 죽겠다!

[사실 가족이래 봤자 별거 없다.]

‘음?’

[혈연으로 이어졌다고 배신 안 하고, 이간질 안 하고, 뒤통수 안 치는 줄 알아?]

‘······어?’

[인간관계라는 게 다 똑같지, 가족이라고 다를까. 너 사채왕 하던 시절에는 회사 식구들을 어떻게 다뤘는데?]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했다.

나는 씩 웃었다.

‘오호라, 요컨대 서열정리와 선 긋기가 문제다, 이거지?’

[······어?]

‘간단한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 수호신. 고맙다.’

저승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말거나.

‘뭔가 결론이 좀 이상하게 난 것 같은데, 우리 대화를 좀 더······!’를 외치거나 말거나.

나는 외투를 집어 들고서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계획, 구상 끝났으니 지금부턴 실행할 차례다.

“오늘 할아버지 댁에 가는 날 맞죠? 다녀올게요!”

“정혁아, 잠깐만! 너 신발이 짝짝이야!”

뒤에서 누가 부르거나 말거나.

“유 팀장님, 부탁드려요.”

“예, 저 유종태에게 맡겨 주십시오!”

눈치 빠른 경호원이자 내 수족을 자처하는 자칭 넘버 투 유종태는 이미 외투와 차 키를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 * *

벌컥!

“할아버지!”

“아이고, 깜짝이야! 내 새끼 왔구나?”

할아버지는 안방 티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신문과 돋보기안경을 내려놓으며 껄껄 웃었다.

“한달음에 달려왔나 보구나? 할애비가 그리 보고 싶든? 아니면 역시 사업······.”

“사업은 무슨 얼어죽을 사업이에요? 지금 한가하게 사업 얘기나 하고 있을 때예요?”

“음?”

“전 오늘 직접 할아버지 얼굴 보고 따지러 온 거예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쌍화차 마실래, 꿀물 마실래?”

“쌍화차요. 계란노른자 두 개 동동 띄워서.”

손톱을 다듬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 제가 내올게요.”

할머니는 작게 “우리 정혁이는 쌍화차. 계란노른자 두 개 동동 띄워서. 메모.” 하고 중얼거렸다.

“쌍화차에 곁들여서 먹을 만한 주전부리도 챙겨 와!”

“주전부리라면 역시 초코쿠키와 버터쿠키가 좋겠죠?”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뻥튀기나 백설기로. 없으면 말고요.”

“없기는. 있어! 무조건 있어! 뻥튀기, 백설기. 메모······.”

할머니가 치마를 휘날리며 방을 나가셨다.

‘우와, 방 안이 온통 황금색이야.’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거실이나 주방 등은 세련되고 화려한 재벌집 그 자체인데, 안방만큼은 인테리어 스타일이 좀 많이 달랐다.

가구와 침구는 물론 웬만한 소품이 전부 다 번쩍번쩍한 황금빛이다.

커튼 장식에까지 커다란 금구슬이 달려 있고, 중간중간 커다란 보석이 알록달록 요란하게 박혀 있으면 말 다 했지.

‘이건 완전 내 스타일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취향을 보면 기겁하고 도망가던데.

알고 보니 이 취향마저 가풍이었던 건가.

나는 황금색 티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따질 거라니. 뭐가 문제냐?”

“할아버지의 처신이요.”

“응? 내 처신?”

“며느리들 싸움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자꾸 싸움판을 깔아주고 계시잖아요.”

“내가?”

짜증이 나는데, 욕은 못 하겠고.

나는 씩씩대며 볼을 부풀렸다.

“할아버지 체면 생각해서, 가족끼리 얼굴 붉히기 싫어서, 여태 참고 또 참았는데요. 이젠 안 참으려고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가 불만인데?”

“두 큰어머니들이요. 처음부터 우리 엄마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던데요? 아주 대놓고 면박 주고 말이죠.”

“그건······ 며느리들 사이의 흔한 기싸움이라······.”

서열 다툼이란 소리였다.

“할아버지가 이 집안의 어른으로서 교통정리는 제대로 해주셨어야죠.”

“그래서 큰 싸움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막았잖느냐.”

“싸움은 말리는 게 아니라, 싸울거리를 차단하는 게 먼저고요. 서열정리랍시고 개싸움이 나든 말든 방치할 게 아니라 규율을 세워서 기강부터 잡아주는 게 먼저예요.”

나는 콧방귀를 꼈다.

“며느리들이 시아버지 무서운 줄 모르고 앞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던데요?”

“내가 무슨 독재자도 아니고······.”

“시아버지한테 솔직하게 말하는 거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한대요? 괜히 아랫동서를 쥐 잡듯이 잡으려고 드니까 문제인 거죠. 상처는 있는 대로 주고 나서 ‘거기까지만 후벼 파라.’ 하고 뒤늦게 말리는 시늉만 하면 끝이에요?”

할아버지는 헛기침했다.

“내가 말했었죠? 호적정리만 하면 다가 아니라고. 말로 낸 상처도 가만히 두면 곪아 썩는다고. 그건 평생 간다고.”

“크흠! 내 나중에 따끔하게 타이를······.”

“나중에 언제요? 어디까지 어떻게 참아야 하는데요? 우리 엄마 곪은 상처가 터지고 나서요? 그건 제 쪽에서 먼저 사양할게요.”

할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딴에도 입장이 있고, 사정이 있다는 거 알아요.”

“크흠!”

“다는 몰라도, 며느리들 눈치 보는 이유도 얼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 다 내가 자식새끼를 잘못 키운 탓이다.”

“그럼 그 잘못 키운 자식을 불러다 족쳐야지, 왜 엄한 우리 엄마가 족쳐지도록 내버려두세요?”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경찰이 12차선 교통정리를 제대로 못하면 교통혼잡에 사고 다발로 이어지듯이, 이 집안의 큰어른인 할아버지가 집안정리를 제대로 못하면 집안싸움으로 번진다고요.”

“정혁아, 집마다 나름의 사정이···.”

“집마다의 싸움은 거기서 끝냈어야죠. 왜 온 가족이 모였는데 남의 집 싸움에 죄 없는 우리가 눈치 보며 살아야 해요?”

“가족이니까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그놈의 가족! 그럼 우리 가족은 가족도 아니에요? 그럼 왜 우리 엄마 입장은 아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건데요?”

“크흠, 그 역시 내가 알고 있으니······.”

“우리 집도 집안싸움, 형제싸움을 일으킨 후에야 ‘아차, 이 집마저도 큰일 났구나!’ 하실래요?”

“······.”

“막말로 큰아버지네가 이혼을 하든 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라고요? 집안이 시끄러워서 속이 시끄러우면 만만한 우리 엄마한테 화풀이해도 무죄다, 이거예요?”

물주전자가 보이기에 냉수를 따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속이 탄다!

“선 제대로 그으세요. 자식 단속 똑바로 하시고요.”

나는 물잔을 티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진짜 가족이라면 잘못된 점은 딱 잘라 훈계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할아버지와 얼굴 붉히는 것을 감수하고 입을 열기로 한 까닭이다.

“가족이란 이름을 아무 데다 막 갖다 쓰지 마세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꾸 우리 엄마 건드리면 난 이제 진짜 안 참아요.”

“그래서 큰아버지네 식구들이랑 싸우겠단 소리야?”

“필요하다면요.”

난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는 주의라.

“할아버지가 나 몰라라 하시니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가족은 내가 지켜야죠.”

나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잘 생각하세요. 안쓰럽다고 마냥 오냐오냐 받아주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내가 해야 할 말은 여기까지였다.

‘후우.’

할아버지는 내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생전 처음 보는 큰아버지 식구들보다는 힘들게 날 키워주신 우리 엄마가 먼저니까.

‘아버지가 그때 왜 이런 표정을 지으셨는지 알 것 같네.’

문득 어머니와 나를 버릴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맞섰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때의 아버지도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벌컥!

“정혁이 말이 다 맞아요! 틀린 말 하나 없네요!”

할머니였다.

“내가 이런 꼴이나 보자고 그간 계모 소리 들으면서 이 악물고 성질머리 참았는 줄 알아요?”

할머니가 씩씩대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쌍화차와 뻥튀기가 올린 쟁반을 탁 소리가 나도록 티테이블 위에 올렸다.

“누군 뭐 며느리 시집살이 못 시켜서 여태 오냐오냐해 준 줄 알아요? 이것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할머니가 폭발했다.

“오늘 저녁 당장 전 식구 소집!”

“······!”

“내 며느리 구박받는 꼴은 내가 못 봐요!”

“여보, 임자!”

“말리지 마세요! 내가 지금껏 바깥일 가지고 회장님께 뭐라 한 적 있어요? 이건 엄연히 집안일이고, 이제부터는 내 소관인 줄이나 알고 있으세요!”

할머니가 탕 소리가 나도록 티테이블을 내려쳤다.

“내가 이 집안에 들어와 산 세월만 29년이에요! 그런 나도 가만히 있는데, 기껏해봐야 십몇 년을 함께 살았다고 며느리 유세를 떨며 텃세를 부려?”

할아버지는 움찔했고, 할머니는 씩씩댔다.

“듣자 하니 태성화학 때문에 이 난리라면서요? 태성화학? 그까짓 것 뭐 얼마면 되는데! 누군 돈 없어서 입 닥치고 사는 줄 아나? 이것들이 돈이면 단 줄 알고 있어!”

할머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돈, 돈 거릴 거면 태성가 지분에 내 몫은 얼마나 되는지부터 따져보자고요! 우리 친정집 룰에 따라 연리 평균 67.8%, 30년 복리로 한번 계산기 때려보자니까?”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익숙한 계산법이 툭 튀어나왔다.

< 선전포고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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