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대발표 >
평창동 차 회장의 저택 주차장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것은 첫째 아들 내외였다.
첫째 며느리는 툴툴댔다.
“모양 빠지게 우리가 제일 먼저 왔나 봐. 제일 나중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됐어. 누가 먼저 도착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첫째 며느리가 남편을 샐쭉하게 노려봤다.
“당신은 체면이란 것도 없어요?”
“동생들 앞에서 체면 차려 뭐 하게?”
“당신이 이러니 내가 아랫동서한테 번번이 업신여김 당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먼저 도착한 것도 잘못이야?”
“어휴, 내가 속 터져서!”
첫째 며느리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때 또 다른 차가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탁.
막냇동생 부부였다.
차대준이 동생 부부를 보고 활짝 웃었다.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좌우로 크게 내저었다.
“여어, 성준아, 여기다!”
“대준이 형님,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어이고, 안 그래도 어여쁘신 우리 제수씨는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지셨······큭!”
첫째 며느리가 남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형님 체면 안 챙길 거예요?”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아부는 동서가 떨어야지, 왜 당신이 등신처럼 손바닥을 비비고 있어요? 짜증 나 정말!”
첫째 며느리가 남편을 흘겨보더니, 막내 동서의 인사도 받지 않고 몸을 홱 돌렸다.
주차장 문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렇게 첫째 며느리는 혼자 먼저 들어가버렸다.
차대준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성준아, 네가 이해해라. 제수씨, 저 사람이 나쁜 뜻으로 저러는 건 아닙니다.”
막냇동생 부부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대준은 허허 웃으며 동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성준아, 요즘 지하철 공사랑 터미널 공사가 한창이라지? 어려움은 없고?”
“괜찮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다.”
형이 어깨동무를 한 채 아우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아우는 형의 말에 순순히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내와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차대준은 빙그레 웃었다.
“듣자 하니 고속버스 교통량이 그리 많다면서? 오가는 사람도 미어터져서 공사하기 퍽 까다롭겠다. 애로사항이 많지?”
“태성건설 사람들이 워낙 잘해주고 있어서 걱정 없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봐라. 너라면 잘해낼 거다.”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형님은 요즘 좀 어떠세요? 보니까 중장비를 ‘태성중기’로 따로 계열 분리한다고 바쁘시다면서요?”
“어. 바쁘기야 한데······.”
차대준은 곤란한 듯 웃었다.
“안팎으로 잡음이 끊이질 않아서 골치가 아파. 역시 난 사업가 체질은 아닌가 보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형님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손대는 것마다 죄다 마이너스야. 야심 차게 우광정유와 묶어팔았던 자동차 정비 서비스도 크게 적자 났고.”
차대준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다들 불만이 아주 많아. 차라리 일을 벌이지 말라더라.”
“누가 그런 얘길 했습니까?”
“내가 작은아버지 닮았다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인 듯싶어.”
차대준이 말하는 작은 아버지란 전(前) 태성건설 사장 차윤성을 말했다.
전 태성건설 사장은 눈치 없고, 생각 없고, 안목까지 없어서 맡은 계열사마다 적자만 냈었다.
그 뒤처리는 전부 형인 차 회장의 몫이 되었다.
“아버지 팔자도 참. 작은아버지에 이어 내가 아버지의 또 다른 짐이 됐더라고.”
“짐이라뇨?”
차성준은 형의 손을 꽉 잡았다.
“형님은 우리 집안의 든든한 대들보이자, 다음 대 그룹 총수가 되실 분입니다.”
“성준아.”
“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하셨죠. 사업을 하다 보면 작게 시작해서 크게 키울 때도 있고, 크게 시작해서 작게 말아먹을 때도 있다고.”
“······.”
“석유파동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됐잖습니까. 점점 괜찮아질 겁니다.”
몇 년 전 석유파동이 닥쳤을 때 가장 크게 휘청거렸던 게 바로 석유를 기반으로 하는 중공업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시 태성자동차와 중장비의 타격이 가장 컸다.
“이번에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를 합병한다면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차대준은 팔을 두르고 있던 동생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웃었다.
“지하철 공사랑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태성건설이 우리나라 최고의 건설사로 우뚝 설 거라지?”
차대준이 동생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너라도 얼른 커서 이 형님 좀 도와다오.”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
“그건 그렇고, 어제 술자리에서 슬쩍 들은 얘기가 있는데 말이다.”
차대준이 동생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성준아, 너 혹시 JH투자회사라고 들어봤냐?”
“그런 투자회사가 있던가요?”
차성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중동에 몇 년 다녀와서 뭘 잘 모릅니다. 어느 재벌그룹에서 새로 낸 투자회삽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고.”
차대준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요즘 굵직한 은행들을 전부 돌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투자를 따내고 있다는 소문이야.”
“흐음.”
“문제는 그 무시무시한 영업력을 자랑하는 인간들이 바로 태성건설 전(前) 임원들이라서.”
차성준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차대준은 동생의 어깨를 다시 한번 작게 두드렸다.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은 없나 싶어서 물었다. 너 누구한테 원한 진 일 있냐?”
원한 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약혼 파기.
“원한이 아니고서야 굳이 태성건설 전(前) 임원들을 모아다가 그리 요란하게 날뛸 이유가 없다고 본다만.”
차성준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우광의 김 회장이 대놓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태성아, 넌 아들 덕분에 사업을 망치게 생겼구나.
-넌 반드시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거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깨달았다.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아내가 미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차성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씩 웃었다.
“그저 태성건설 전 임원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일 뿐, 태성을 향해 악의적인 수작을 부린 일도 없잖습니까.”
“그런가?”
“제가 따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마침 주차장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또 다른 고급 세단이 있었다.
둘째 내외였다.
“다들 안 들어가고 여기 모여 있었네?”
차기준이 실눈을 휘며 웃었다.
“무슨 할 말이 이렇게들 많을까? 식구끼리 저녁 한 끼 먹자는 자리인데, 멀리서 보면 꼭 작당하는 것 같잖아.”
둘째 며느리가 막냇동생 부부가 꼭 잡고 있는 손을 발견했다.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동서, 태성화학은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그랬지? 기대할게.”
뾰족한 음성이었다.
“성준 서방님이 미련 없이 버린 태성화학인데, 세운 공도 없이 되찾아올 수 있을까 궁금해지네?”
“그러게. 과연 아버님께서 태성화학을 누구에게 주실지 그건 나도 궁금한데?”
둘째 내외가 서로를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차기준이 팔을 벌리자, 둘째 며느리가 차기준의 팔짱을 꼈다.
“형, 듣자 하니 미국의 GM사와 협약을 추진 중이라면서?”
“노력 중이야.”
“흐음.”
현재 세계 자동차 업계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GM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차기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응원해드리겠습니다. 파이팅.”
차대준은 차기준의 웃음이 뜻하는 바가 ‘마이너스’임을 알아챘다.
그러자 막냇동생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에서 급격히 힘이 빠졌다.
툭 떨어지려는 큰형의 팔을 막냇동생이 탁 잡았다.
“형님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이만 들어가시죠.”
차대준은 제 팔을 단단히 붙드는 막냇동생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깨동무가 어느새 부축의 모양새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짜식. 그래, 가자. 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차대준은 웃으면서 막냇동생의 어깨에 체중을 실었다.
든든했다.
* * *
“정혁이는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날 데리고 온 곳은 서재였다.
“김 비서, 잠시 정혁이 좀 봐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김 비서의 옆구리에는 서류가 끼워져 있었다.
내 눈높이에 딱 맞는 높이였던지라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우광자동차와 우광조선!’
군침이 절로 흘렀다.
김 비서가 날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슬쩍 옆구리에 낀 서류를 툭툭 치는 건 덤이었다.
‘역시 김 비서! 내가 이걸 궁금할 줄은 또 어떻게 알고 극비 자료를 가져오셨대?’
저절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건 김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할아버지 혼자만 퍽 곤란한 듯 입매가 축 처졌다.
“아까 할머니 말씀하시는 거 들었지? 동심은 지켜줘야 한다는구나.”
할아버지가 ‘애 앞에서 밥상머리 엎는 꼴은 보여주기가 좀 그렇지.’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혁아, 전에 약속했지? 할애비가 가족과 태성그룹 임원들을 설득하는 일을 맡겠다고.”
“네.”
“오늘 그것과 관련해서 가족들에게 중대 발표를 할 생각이다.”
오?
“반발이 꽤 심할 텐데요.”
태성그룹이 날로 먹을 줄 알았던 우광의 계열사를 내게 넘긴다는 발표를 들으면?
헛물켜던 자식들이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을 텐데.
“이건 사업이야. 집안일이라면 또 모를까. 지분과 경영권에 관해서라면 자식놈들이 내 눈치를 봐야지.”
할아버지는 자신만만했다.
“정혁아, 이참에 경영권 휘두르기 편하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주마.”
구실?
할아버지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러니 나 또한 우후훗, 웃을 수밖에.
“제 투자회사를 갖다 붙이시려고요?”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이미 합의 끝난 사안인데요 뭐.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했다.
“잘됐네요. 덕분에 대통령 측근들에게 우광계열사 지분 상납하는 일까지 알차게 써먹으면 되겠고요.”
“아니, 그것까지?”
“물론 제가 투자회사 사장이란 것은 안 밝히시겠죠?”
“당연하지! 다시 말하지만, 난 여덟 살짜리 어린애를 경영 일선에 내세우고 싶지 않다.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난 그 꼴 못 본다!”
“그렇게 해요.”
나는 씩 웃었다.
“대신 태성화학은······.”
“당연히 네 몫이지.”
“에이, 태성화학은 우리 엄마 혼수로 들고 갈 거라니까요.”
“쌈짓돈도 없는 네 엄마가 친정 한번 찾아간 적도 없는데 덜컥 150억짜리 지분을 어떻게 인수해서?”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태성화학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경영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며느리에게 날로 넘길 생각은 없다만?”
“할아버지는 공을 세운 만큼 포상하신다면서요?”
“그건 네가 세운 공인 걸 내가 뻔히 아는데!”
“그러니까요.”
“음?”
“할아버지와 심 사장님, 김 비서님만 아시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우리 엄마 공으로 둔갑시켜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겠네요?”
“뭐야?”
나는 씩 웃었다.
“세 장의 계약서를 쓴 사람이요. 우리 엄마로 해주세요.”
까짓것 어머니께 내 공을 좀 넘겨주지 뭐.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 엄마 체면을 세워주는 일인데.
김 비서가 안타까워했다.
“도련님,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할 거 있나요?”
나는 웃었다.
“우리 엄마를 아들인 내가 챙기는 건데요.”
내가 어머니의 배경은 못 되어드려도, 물주는 되어드릴 용의가 있다 이거야!
아들 덕 좀 보면서 사시라 그러지 뭐!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 앞에서 내 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여덟 살짜리의 공이라고 믿어줄 리 없으니까요.”
할아버지는 퍽 난처한 표정이었다.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일자로 꾹 다물어버릴 만큼.
“어차피 난 태성의 이름으로 앞에 내세울 생각도 없으시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우리 엄마는 달라요.”
“네 엄마를 경영 일선에 내세울 참이냐?”
“다른 며느리들도 태성의 계열사 하나씩은 맡았잖아요. 안 될 것도 없죠.”
“네 엄마는 경영 수업도 안 받아봤다.”
“그거야 전문 경영인을 붙여주면 해결될 일이고요. 중요한 건, ‘우리 엄마가 태성화학을 되찾아왔다!’는 거예요.”
내 목표는 심플했다.
“막내며느리 체면 좀 세워주세요. 네?”
“끄응.”
“능력 있는 후원자를 곁에 둔 것도 능력이라면서요. 네?”
“끄으으응!”
“우리 엄마가 계속 태성화학 때문에 괜한 트집을 잡혀서 구박받는 꼴이 보고 싶으신 거라면······.”
“그래, 좋다! 태성화학, 네 엄마의 몫으로 인정해주마!”
할아버지가 서재 책상을 탕탕 내리쳤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할아버지는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네 엄마한테는 태성의 익명 후원자가 쪽지 한 장 보내는 걸로 해!”
“예.”
김 비서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역시 김 비서!
긴말할 필요가 없다니까?
“참 쉽죠?”
“······.”
할아버지는 구시렁대면서도 서재 책상 서랍을 뒤져서 태성화학 인수 계약서를 꺼냈다.
그사이에 나는 쪽지를 써서 김 비서에게 넘겼다.
딱.
‘어이, 수호신.’
[나 지금 주말 드라마······.]
‘할아버지가 가족들 모아놓고 중대발표를 하시고, 할머니는 자식 며느리들 군기 잡겠다며 밥상머리를 뒤집어엎으실 작정이라는데.’
[난 막장 드라마가 취향이더라.]
한국 드라마에 맛들린 저승사자는 두 눈을 반짝이며 손바닥을 비볐다.
[어디로 가면 돼?]
‘그야 다이닝룸이지.’
나도 같이 우후훗!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우리 엄마한테 헛물켠 걸 들켰으니 쪽팔려서 죽고 싶을 거라고 했겠다?’
누가 헛물켜고 있었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 중대발표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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