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이 양반이? >
가족이 전부 모인 저녁 식사 자리.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이 저녁을 먹는 동안 할아버지는 홀로 자작했다.
깡소주였다.
“청와대 오찬에서 가져오신 우광의 계열사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라면 당연히 태성자동차와 중장비에 인수 합병하실 거죠?”
“어머, 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아버님이 차린 밥상을 날로 드시겠다는 소리예요?”
“동서, 말이 좀 그렇다? 날로 먹다니? 그럼 태성자동차와 중장비를 두고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를 따로 놀려?”
“자동차와 중장비를 아주버님만 맡으란 법 있어요?”
두 며느리들이 애교 있게 웃으며 은근히 졸랐다.
“아버님, 저 요즘 정말 힘들어요. 도와주실 거죠?”
“장남이 왜 장남이겠어요. 도와주세요, 아버님. 네?”
막내며느리인 우리 어머니만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할아버지는 탁 소리가 나도록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너희들은 어째 밥 먹으면서 할 말이라곤 죄다 사업 얘기뿐이야? 내가 식당으로 불렀지, 언제 회의실로 불렀어?”
할아버지는 벌써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간다.
“아버님도 참.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태성의 미래가 달린 문제잖아요. 우광의 계열사를 집어삼킬 기회가 어디 흔합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뭐 얼마나 중요한 발표기에 뜸을 이렇게 오래 들이십니까? 아버지답지 않게.”
“태성그룹 임원들을 불러모으시기 이전에 우리만 따로 부르신 거잖아요?”
할아버지는 다시 소주병을 기울여 소주잔에 쪼로록 술을 따랐다.
“막잔이다. 이것만 비우자. 그것도 못 기다려?”
평소와 달리 착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두 며느리들은 이때다 하고 나섰다.
“태성화학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광화재 사상자 때문에 노조 파업하고, 시위하고, 여론 안 좋고. 난리 났잖아요.”
“이래서 집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건데. 괜히 멀쩡한 화학만 날려서는. 어휴!”
“우리 그이한테 맡겨주세요. 친정아버지도 도와주신다니까 깔끔하게 문제 해결할 수 있어요.”
“저희는 많은 거 안 바래요. 자동차랑 중장비만 인수 합병해주신다면······.”
고모가 딱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짜 못 봐주겠네. 욕심만 많아 가지고. 누가 보면 새언니들이 태성화학 주인인 줄 알겠어요?”
“왜요? 아가씨도 관심 있어요?”
“태성화학은 원래 성준이 몫인 거 몰라요?”
“막내 서방님은 이미 포기하셨잖아요. 그럼 이젠 임자 없는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가족 식사 자리에 사업 얘기는 그만하래도?”
그제야 조용해진다.
다들 묵묵히 밥만 먹었다.
큰아버지가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큰어머니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둘째 큰아버지는 기민하게 눈치만 살피고, 고모는 불만인지 입술을 삐쭉이며 반찬을 헤집었고, 아버지는 원래 과묵하셨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밥 먹자고 둘러앉았는데, 사업 얘기를 빼면 딱히 서로 간에 할 말도 없는 모양이구나.”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내 인내의 결과라니. 이러니 내가 욕을 들어도 싸지. 역시 난 어줍잖게 아비 노릇 하려 드는 것보단 차 회장으로 사는 게 나은가.”
할아버지는 한참이나 소주잔만 내려다봤다.
“내가 너희들 이름을 왜 ‘대기만성’에서 따왔는지 말해줬었나?”
“알죠. 그걸 왜 몰라요.”
큰아들인 차대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렵고 야박하던 시절에 우리를 얻으셔서 ‘나는 못 먹고 고생해도 좋으니 내 자식들만큼은 잘 먹여서 잘 키워보자!’ 하고 다짐하면서 지으셨다면서요.”
“그래, 그럼 내가 왜 손자들 이름은 ‘인의예지신’이라고 짓도록 했는지는 알고?”
“먹고살 만해졌다고 사람 노릇의 기본조차 잊으면 안 된다고요. 겸손하게 살라고요.”
“그랬지.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듯싶다. 차라리 ‘가화만사성’으로, 아니,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지을 걸 그랬다.”
할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밖에서 싹퉁바가지 없게 굴지 말라고 당부하려던 말이었는데, 정작 나부터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야.”
자식과 며느리들을 보는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죽은 너희들 어미를 볼 면목이 없다.”
이 집안에 금기시되던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자식들은 일제히 할아버지와 그 옆에 앉은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손에 쥔 소주잔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할머니는 모른 척 국을 후루룩 마셨다.
“내가 시멘트 공장 하나 불하받고 건설사까지 만들어서 돈 번다고 바빴었다. 밤낮없이 일만 하느라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했었지. 전국으로 시멘트를 배달하고, 지방 공사를 맡아 뛰느라.”
어느새 수저가 그릇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죽은 애들 엄마는 셋이나 되는 애들을 홀로 맡아 키우면서 고생 참 많이 했을 거야.”
할아버지가 술잔을 손아귀에서 굴렸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달에 한 번이나 겨우 집에 들어가면 나더러 돈 버는 기계가 될 셈이냐고, 아비 노릇은 안 할 거냐고 따져 묻더라. 애들은 어떡할 거냐고, 자긴 이렇게는 못 산다고.”
자식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땐 너희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죽도록 고생하다가 이제야 좀 숨통이 트여 가는데, 조금만 더 열심히 뛰면 곧 살만해질 것 같은데, 왜 이해를 안 해줄까.”
할아버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뼈 빠지게 죽도록 고생해서 돈 벌어오는 사람을 잡고 별거 아닌 일로 쥐 잡듯이 잡냐고, 고생했다, 고맙다, 수고했단 소리 대신 비난밖에 못 하냐며 난 목소리를 높였었다.”
할아버지는 손에 쥔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남편이 되어서 아내가 그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그런 몸으로 홀로 애들을 키우고 있던 줄도 모르고.”
씁쓸한 입매를 달싹거리며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돈 버느라 바빴다. 사업한다고, 처자식 호강시킬 거라고, 회사 크게 키운다고. 전부 내 욕심이었지.”
자식들의 한숨도 나지막하게 흩어졌다.
“애들 엄마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서 부랴부랴 지방에서 올라와 보니, 그제야 집안 꼴이 눈에 들어오더라. 면목이 없었지. 변명할 말도 없었고, 용서를 구할 염치도 없더라.”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열두 살밖에 안 된 큰아들이 죽은 엄마를 물수건으로 곱게 닦아 제일 예쁜 옷으로 덮어줬다는데. 동생들을 데려와 작별 인사를 시켰단 소리를 들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거야.”
할아버지가 애틋한 눈으로 큰아들을 바라봤다.
“어린 동생들 먹인다고 라면을 끓이다가 크게 데였다지. 아픈 엄마를 돌본다고 약을 지어 나르고, 겨울 찬물에 손을 담가 동생들 입을 옷을 빨고,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고······.”
목소리가 떨려오기 시작하자, 할아버지는 단숨에 소주잔을 들이켰다.
“너희들 몫으로 일찍이 굵직한 계열사를 몇 개나 떼어줬다. 때마다 회삿돈을 지원해줬고, 이때껏 손자들 학비를 책임졌고, 틈틈이 부동산이며 주식까지 남부럽지 않게 쥐여줬어.”
할아버지는 빈 소주잔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자식들 밥그릇을 그만큼 챙겨줬으면 아비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애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게 뒷바라지 책임지면 되지 않겠냐며 스스로 위안하곤 했었는데.”
탁.
“그래, 인정하마! 지금껏 내가 자식 잘못 키웠다! 자식들 보기에도, 손자들 보기에도 부끄럽다! 난 사업가로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아비로서도, 남편으로서도 꽝이다.”
오늘 깡소주를 마신 이유였다.
“내 가정도 제대로 못 돌본 주제라 자식들 가정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주제가 못 된다며, 그저 전전긍긍 제 자식 허물 덮기에 바빴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지경이로구나.”
할아버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식탁 위에 올린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깟 태성화학 좀 날리면 어떠랴 싶었다. 내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데, 처자식을 책임진다는데, 아비가 그것도 못 이뤄줄까 싶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차례로 돌아봤다.
“너희들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동생이 행복해지면 그만이라고 여길 줄 알았다.”
자식들을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퍽 서글퍼 보였다.
“태성화학을 날렸다고 아랫동서에게 눈치 주고, 계열사를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형제끼리 아귀다툼을 할 줄도 모르고.”
며느리들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족이라면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과 관용으로 이해해주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순서마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인정하마. 아비가 되어서 자식들 버르장머리조차 제대로 잡아주지 못했는데, 누굴 탓하겠느냐? 다 못난 내 탓이지.”
할아버지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태성은 한 식구? 정작 내 식구조차 건사하지 못하는데, 그런 구호를 외칠 자격이 있나? 그것마저도 글러먹었군.”
할아버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비로서 이를 어떻게 풀어서 이해시킬까 끙끙댔던 그간의 고민이 참 쓸데없고 부질없다고 느껴지는군.”
나지막한 탄식이었다.
“그간 물색없이 돈돈거린 죄로 난 이제부터 아비 노릇 대신 태성그룹 총수 노릇이나 잘하려 한다.”
“예?”
“앞으로 집안일 건사한다고 쩔쩔맬 생각 없다는 소리야. 집안일은 네 어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건 할머니였다.
“삼십 년 다 됐다. 죽은 너희 엄마가 너희들을 돌본 세월의 갑절 이상으로 너희들을 키웠으니 어머니 소리 듣기엔 충분해. 정 여사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불러라.”
“회장님?”
“당신도 앞으로 날 회장님이라 부르지 말지.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당신이 우리 회사 직원인 적도 없는데. 남편, 여보, 자기야 등등 좋은 호칭 많잖아?”
할아버지의 선언이었다.
“싫으면 말아. 강요하진 않겠다만 대신 내 유언장은 달라질 게다.”
“유언장이요?”
“아까 말했다. 못 미더운 아비 대신 차 회장으로 살겠다고. 회장이면 회장답게 돈과 지분으로 유세나 떨어야지.”
두 며느리들은 아연실색했다.
“며늘아가들아, 내가 자식새끼들을 제대로 못 키운 죄로 그간 고생시켜 미안했다.”
“아버님?”
“정 싫으면 이혼하고 나가도 좋다. 이젠 안 말리마.”
“이, 이혼이요?”
“그래, 사람을 고쳐 쓸 수도 없는데 어쩌겠느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
두 며느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동안 입이 닳도록 ‘못 살겠다.’, ‘이혼하고 싶다.’, ‘힘들다.’ 소리로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 바람을 지어왔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 집안에 붙어살고 싶으면 아내 노릇, 어미 노릇 외에도 지금껏 모른 체했던 며느리 노릇이란 것도 해야 할 게다. 다른 집구석도 다 그렇게 하며 살아.”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당신도 눈치 보지 말고 시집살이시키고 싶으면 해.”
며느리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할머니만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고깝게 굴면 성질도 부려. 상 뒤집어엎어도 좋고, 머리채 잡고 흔들어도 좋고, 무릎 꿇려서 물싸대기 때리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할아버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차 회장으로서 네놈들이 그리도 궁금해하는 사업 얘기를 하겠다. 막내며늘아가야.”
“네, 아버님.”
“약속대로 태성화학은 네 몫으로 인정하겠다.”
“네?”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하지만 그건 다른 자식과 며느리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갑자기요?”
“아니, 왜요?”
할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공을 세웠으니 포상했을 뿐이다.”
“포상이요?”
“대체 동서가 뭘 어떻게 했는데, 태성화학을 덥석 안겨줘요?”
할아버지는 식탁을 탕 내리쳤다.
“회사 일이다. 내가 너희들 허락을 받고, 일일이 납득시켜야 하나?”
“······.”
자식과 며느리들은 자꾸만 경악성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손에 쥔 쪽지와 할아버지 얼굴만 번갈아 봤다.
<놀랄 것 없습니다. 차 회장님께서 하자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태성을 돕는다는 익명의 후원자가 보내는 쪽지.
내가 김 비서를 통해 전달한 거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보다가 쪽지를 발견하고 눈매를 좁혔다.
“태성화학 인수 조건에 포함되었던 우광건설과 우광증권은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그걸 왜요?”
“각하의 뜻이다.”
“각하께서 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회사 일이야. 내가 너희들에게 보고해야 할 군번이야?”
“······.”
평소 밥상머리에서 나누던 대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우광조선, 자동차, 중장비, 연구소, 병원, 제약. 태성이 아니라 JH투자의 몫이다.”
“예?”
“정부와 태성 간에 맺어진 협약이라 치자.”
“그게 무슨······!”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아버지만 바라봤다.
보다 자세한 경위를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어림도 없었다.
“십 년 후. 총수 자리를 물려줄까 한다.”
폭탄선언이었다.
“태성의 식구라면 신분, 출신, 자격을 따지지 않겠다. 태성을 이끌 만한 능력이 있는 자에게 넘겨주마.”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능력껏 뜯어먹고, 재주껏 끌어들여서, 한껏 키워 봐.”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 가족이란 걸 잊는 놈에겐 못 준다. 제 식구한테 칼 들이미는 놈을 어떻게 믿고 태성을 맡겨? 태성은 한 식구야!”
할아버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버지!”
“아버님, 잠깐만요!”
깜짝 놀란 자식과 며느리들이 다급하게 벌떡 일어나 뒤따라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오늘 누가 소집했는지는 까먹은 거니, 무시하는 거니?”
할머니가 소집했다.
할머니는 손가락을 붙여 세모꼴을 만들면서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X으로 보이니?”
< 아니, 이 양반이?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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