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모 노릇 딱 내 스타일 >
할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앉아라. 나도 할 말 있다.”
할아버지를 따라가려던 두 분 큰아버지 내외와 고모는 움찔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난처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한 게 다였다.
“죄송해요, 여사님.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우리끼린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해요. 이해하시죠?”
“아까 아버님이 뭐라 하시는지 들으셨잖아요. 어째 내내 깡소주만 드시더라니.”
“며느리 된 도리로 이 사태를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아픈 속을 달래드려야죠.”
다들 똥줄이 탄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내던진 발언은 범상치 않았다.
무려 태성그룹 차기 총수 자리에 관한 선언이었다.
“이것들이 대놓고 개무시를 하네?”
“태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에요!”
“너희들 미래가 달린 일이 아니라면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겠단 소리로구나?”
지금 식탁에 앉아 있는 건 할머니와 우리 부모님밖에 없었다.
“아직도 여사님이라 이거지?”
그러니 할머니도 표정이 저리 구겨질 수밖에.
“내가 진짜 이런 꼴이나 보자고 그간 계모 소리 들으면서 이 악물고 성질머리 참았나.”
식당을 박차고 나가려던 사람들이 피곤해하며 걸음을 멈췄다.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괜히 엄한 사람에게 발목이 묶였다는 듯.
짜증과 놀람, 답답함과 지루함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두 분 정말 왜 이러세요?”
“여사님까지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할머니는 이를 악물었다.
“태성그룹 총수 자리 때문에 이 난리라니. 이것들이 돈에 눈이 뒤집혀서!”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식탁을 움켜쥐었다.
“세상에 돈이면 단 줄 알아? 적당히 좀 해라, 이것들아! 누구는 돈 없어서 참고 사니?”
16인용 대리석 식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연 재벌집에서 사용할 만한 최고급 이태리제였다.
“앉아!”
“일단 서재부터······.”
“대한일보에 넣은 광고부터 전부 뺄까?”
“······!”
큰어머니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큰어머니의 팔을 붙잡아 말리던 큰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염문설 신문, 방송으로 뿌려줘? 국화그룹 주총에 참석하리?”
“······!”
둘째 큰아버지 부부도 놀라서 몸을 돌렸다.
할머니가 고모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고모는 똑단발을 찰랑이며 달려와 냉큼 의자에 앉았다.
“어우, 오늘 배춧국이 시원하네요. 성준아, 너도 갈비 한 대 뜯을래?”
다 식어버린 국과 반찬을 집어 먹으며 고모가 새침하게 머리를 넘겼다.
할머니는 쓰게 웃었다.
“진작 협박할 걸 그랬네. 앉아!”
“······.”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다들 놀란 눈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어차피 나도 처음부터 억지로 어머니 소리 들을 생각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쭉 여사님이라고 부르든가 말든가, 그거까진 모르겠고.”
할아버지와 비슷한 선언이었지만, 결이 조금 달랐다.
“나도 답지 않은 어미 노릇 대신 태성그룹 총수 안주인 노릇이나 할란다.”
“이번엔 여사님까지······.”
“내 새끼 아니라고 행여나 서러울까 쩔쩔매며 몸 사릴 생각 없다는 소리지.”
차별 대우 선언이었다.
“어차피 계모가 잘해봐야 결국 계모라지. 그래서 오늘부터 난 효도하는 자식새끼들만 자식 취급해주기로 결심했다.”
할머니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껏 무조건 너희들 편들어주던 내 지분, 앞으로는 내 맘대로 행사할 생각이다.”
“······!”
다들 입을 떡 벌렸다.
지금껏 할머니는 태성그룹 경영에 한 톨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성가 지분에 내 몫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하니? 차명과 가명 주식까지 전부 털어서.”
“······!”
“고작 시멘트 공장 하나 불하받아서 건설 공사 따낸다고 뛰어다니던 너희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계열사를 38개까지 늘렸을 것 같니?”
“······!”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앞으로 따박따박 말대꾸할 때마다 독촉장 하나씩 보낼 테니 그리 알아라.”
“네?”
“사채는 태성만 썼을 것 같니? 내가 사돈 우대는 안 해줬겠니?”
할머니는 스산하게 웃었다.
“친정집 룰에 따라 연리 67.8%로 회수할 작정이니까 계산기 잘 두드려 보렴.”
“······!”
지금껏 한 적 없던 돈지랄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돌려 고모를 바라봤다.
고모는 잡채를 먹다가 켁, 하고 사레들렸다.
“정혁이와 성준이 처에게 선물을 잔뜩 보냈다고?”
“크흠! 정혁이가 예쁜 짓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답례로 옷 예쁘게 입으라고 백화점 쇼핑을 좀······.”
“우광백화점 때문에 백화점 매출 적자를 많이 봤다고? 그래, 얼마면 되니?”
“네?”
“큰 거 열 장, 무담보, 무이자, 1년 거치 상환. 어때?”
“헉!”
고모가 잡채를 쥐고 있던 젓가락을 툭 떨어뜨렸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전 딱히 공을 세운 것도 없는데 포상···, 아니, 큰돈을 막 융통해주셔도 돼요?”
“내 맘이야.”
할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공 세운 만큼 포상해? 내가 왜 회장님 룰을 따라야 하니? 내 돈은 내 맘대로 써야지.”
“가, 감사합니다, 여사, 아니, 어머니!”
“어머, 만영이 국 다 식었네. 안성댁, 만영이 국이랑 잡채 좀 새로 내와요!”
대놓고 하는 편애였다.
속 보이는 차별이기도 했다.
주방 일을 보던 안성댁이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잡채 그릇을 가져왔다.
할머니는 고모 앞에 놓인 반찬을 슥 눈으로 스캔했다.
“갈비찜이랑 굴비, 새우튀김도 부탁해요. 만영이 좋아하는 과일 사라다도 한 접시 더.”
전부 고모가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그 모습을 다들 멍하니 바라봤다.
“왜? 불만 있니?”
“갑자기 이러시니까 좀 당혹스럽네요.”
“이렇게 대놓고 차별하듯 편 가르시는 분 아니시잖아요.”
할머니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어디서 개가 짖나?”
두 며느리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여사님, 갑자기 이리 심술을 부리시는 이유가 뭐예요?”
“그래요. 저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민망하게 화풀이를······.”
“화풀이?”
할머니가 쌍심지를 켰다.
“화풀이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먼저 했지 않니?”
“저희가 언제요?”
“태성화학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서 애먼 사람을 잡았어, 안 잡았어?”
“지금 막내 동서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며느리들의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어머니를 향하려는 찰나,
“내일부터 대한일보, 태성건설 광고를 뺄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여사님?”
“여사님? 태성화학, 태성시멘트 광고도 추가로 빼마!”
“어, 어머님!”
큰며느리 입에서 처음으로 ‘여사님’ 대신 ‘어머님’ 소리가 나왔다.
할머니가 둘째 며느리를 홱 돌아보았다.
“친정아버지가 태성화학 인수를 돕겠다고? 그 지분을 네 몫으로 달라고 했니?”
“그건······!”
“국화그룹이 요즘 돈이 썩어나나 보구나? 그럼 우리 친정집에서 빌린 돈부터 갚아야지.”
“어머님!”
“원금까지 일시불로. 어때?”
둘째 며느리 안색이 하얗게 질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네 시아버지는 며느리 애교에 넘어가 제 주머니 쌈짓돈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걸 어쩌니? 나는 며느리 애교에 내 주머니 쌈짓돈을 털어주는 사람인데.”
“어머님?”
“보다시피 내가 돈이 많아. 매우.”
할머니는 썩은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성질머리도 더럽지. 무척.”
수틀리면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여차하면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열받으면 돈지랄을 한다는 소문이 재벌가 사모님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건 꽤 오래된 일이었다.
* * *
큰어머니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동서, 내가 오해를 좀 했던가 봐. 미안하게 됐어.”
“아니에요.”
“새해 첫날에 면박을 준 일도 사과할게.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잘 지내봐.”
“네, 형님.”
유치원생이 나누는 것 같은 화해의 악수였다.
할머니는 며느리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큰며느리는 다음 주 식사 당번 제외.”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마워, 동서. 우광화학, 아니, 태성화학에 유리하도록 기사와 칼럼을 재주껏 뽑아내볼게.”
“봉사활동 제외 추가.”
“감사합니다, 어머니.”
큰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이달 말에 예정이라는 김장이요.”
시집살이 하면 역시 김장!
김장철도 아니건만, 시어머니의 말이 떨어진 순간 며느리들의 강제 동참이 결정되었다.
“회사 일이 바빠서 아무래도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
“그래라.”
“감사합니다.”
“대신 인경이 앞으로 증여하려고 했던 명동 상가는 없었던 일로 하자.”
“······어떻게든 스케줄 빼볼게요, 어머니. 일 년 먹을 김치인데 제가 더 신경 써야죠.”
지금껏 안성댁과 주방 도우미들이 알아서 하던 김장을 며느리들 불러서 하겠다는데.
아무도 싫다는 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둘째는 딱히 할 말 없지? 그럼 예혁이 몫으로 빼두었던 을지로······.”
“동서가 이미 태성화학 지분을 확보했던 줄 몰랐어. 알았으면 남의 것 넘본다고 그리 바쁘게 뛰어다니지도 않았을 거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태성그룹을 위해서······.”
“혓바닥이 길구나. 아무래도 예혁의 몫을······.”
“모욕한 거 미안해. 사과할게.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야.”
둘째 큰어머니는 할머니를 돌아봤다.
“그럼 저도 다다음 주 식사 당번은······.”
“친정아버지께 안부 전해드려라. 한우정에서 있었던 일은 몹시 유감이었다고.”
“······당연히 제가 식사 준비 맡을 거고요. 이달 말 김장도 안 빠질게요.”
“너도 봉사활동 제외.”
“감사합니다, 어머님.”
허리를 꾸벅 숙여서 인사한 두 며느리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외투를 챙겨 나갔다.
큰며느리는 얼떨떨해하는 남편을 끌고 나갔고, 묘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던 둘째 큰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아내를 따라나섰다.
“어머니, 그럼 저는······.”
“듣자 하니 만영이는 백화점 피부관리실에 성준이 처를 데려가 같이 마사지도 받고, 손톱도 다듬고, 차도 함께 마셨다지?”
“네, 그렇긴 한데요. 아무래도 이달 말엔 구정 대비 백화점 특별 세일 기간이라······.”
“넌 상반기 당번 다 빼주마.”
“네? 아까는 예외는 없다고······.”
“백화점이 이제 막 바빠지고 있다며. 이럴 때 더 열심히 굴려야지.”
“아, 네.”
“뭐, 앞으로도 그렇게만 사이좋게 잘 지내줬으면 좋겠고.”
고모는 활짝 웃었다.
“모르셨어요? 저 막내 올케 꽤 좋아해요. 올케한테 빚을 크게 진 일이 있거든요.”
고모는 들고 왔던 쇼핑 봉투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이건 어머니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이건 막내 올케 거.”
루이비똥 백과 프라더 백이 각각 하나씩 들어 있었다.
“만영이는 올해 당번 전부 빼주마.”
“어머!”
할머니가 대뜸 쇼핑봉투를 어머니에게 덥썩 안겼다.
“이거 너 가져라. 난 백 많다.”
“아니에요, 어머님. 형님께서 드리는 선물인데요.”
“그게, 그 돈 봉투는 말이다. 내가 정말 미안하게 됐어.”
“그 사과만 벌써 일곱 번째예요. 이미 털어내기로 얘기 끝났잖아요.”
뭐라고?
아니, 언제 둘이 화해했지?
왜 난 모르고 있었지?
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선배 따라다니던 여자애들 중 한 명인 줄 아셨다면서요. 그냥 선배도 제게 호감 정도만 가지고 있는.”
“어쨌거나 김 비서한테 돈 봉투 건네면서 떨어져 나가라고 말 전한 건 사실이니까.”
할머니는 우물쭈물했다.
“명동에 빌딩 하나 네 몫으로 봐뒀는데.”
“됐어요. 지금껏 보내주신 코코아랑 초코 쿠키도 넘쳐나서 주체 불가예요.”
“돈 봉투는 정말······.”
“여덟 번째예요. 돈 봉투 압수.”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족 식사가 끝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식당을 나가자 할머니는 휑하게 빈 식탁을 힐끔 보았다.
“식탁, 이참에 바꿔버려?”
할머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해보니까 가차 없는 계모 노릇이 딱 내 스타일이네?”
할머니는 후련한 듯 허리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역시 인생은 당근과 채찍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휘두를걸. 정혁이 말 듣길 잘했다. 우후훗!”
나도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를 끊으면서 개운하게 웃었다.
“역시 인생은 뇌물과 협박이라니까. 돈지랄이 최고야. 우후훗!”
저승사자도 나랑 똑같은 자세로 웃고 있었다.
[역시 재벌가 막장 드라마! 현실판이 최고야, 짜릿해! 우후훗!]
* * *
다음 날부터 태성그룹 임원진들은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 회장이 던진 폭탄선언의 여파였다.
-십 년 후. 총수 자리를 물려줄까 한다.
-태성의 식구라면 신분, 출신, 자격을 따지지 않겠다.
-태성을 이끌 만한 능력이 있는 자에게 넘겨주마.
차 회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임원들은 없었다.
‘지금껏 제 자식 밥그릇 챙겨주려고 칼같이 쳐내던 양반이 어디 쉽게 변할까.’
‘임원에게 총수 자리 넘기는 재벌이 대한민국에 있긴 한가? 그럼 결국 총수가 되는 건 아들 셋 중 하나란 거지.’
‘누구 밑에 줄을 서야 좋으려나? 여기에 내 인생을 걸겠다!’
바야흐로 차기 총수 자리를 두고 눈치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최측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회사는 혼자 못 굴리지! 제 사람이 끌어모은다고 혈안이 될 테니, 내 몸값을 가장 높이 쳐줄 때가 왔다!’
‘공을 세워 능력을 어필한다! 나도 계열사 사장 자리까지는 올라가 봐야지!’
안 그래도 능력을 중시하는 태성그룹.
능력 있고 야망 넘치는 임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공 세울 만한 일에 눈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우광그룹에서 뜯어온 계열사의 행방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뭐라고? 우광화학을 막내 사모님이 차지하셨다고?”
“태성화학은 당연히 심 사장이 다시 맡는 거 아니었어?”
“심 사장은 JH투자회사 사장 자리에 앉았다는데?”
태성화학을 맡아서 키워온 심 사장은 뛰어난 경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러니 차 회장의 눈에 들어 최측근 자리를 꿰어찼다.
그가 태성화학을 우광에 넘겼을 때, 차 회장의 네 자식 중 탐내지 않았던 자가 있던가?
없었다.
그런 심 사장이 선택한 곳!
그곳이 바로 JH투자회사였다.
“우광화학을 제외한 계열사 전부를 JH투자회사가 인수한다는 말은 또 뭐고?”
“심지어 JH투자회사 임원들이 쫓겨난 전(前) 태성건설 임원들이라는데?”
“이게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태성그룹 임원들이 JH투자회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 계모 노릇 딱 내 스타일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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