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 사장의 선택 >
열린 문틈으로 아버지와 심 사장이 보였다.
심 사장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어떻게 태성화학에 문제 생긴 줄 알고 달려왔습니까?”
“어라? 아닙니까?”
“맞긴 한데······. 우리 사무실 방음이 이렇게까지 부실했던가요?”
“그게 아니라 보스가 아까 말하기를, 행여 잘리지나 않을까 일자리 걱정에 화학 공장 사람들이 우광의 이름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오정섭은 눈알을 굴려 심 사장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역시 심 사장님이시군요.”
“······.”
심 사장은 ‘보스는 당신 아드님이란 말입니다!’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 소리를 내었다.
심 사장이 손짓하자, 오정섭이 후다닥 달려가서 바짝 붙어 섰다.
심 사장은 오정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혹시 문에 귀 대고 엿들은 건 아니겠지?”
“미쳤습니까? 보스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실 분입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진짜 태성화학 문제로 성준 도련님께서 찾아오신 겁니까?”
“보다시피.”
“보스 진짜 괴물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까 신기한데요? 대체 어떻게 때려맞췄지?”
심 사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오 전무,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태성화학이 뭐가 어떻다고요?”
“인력 충원하러 갈 생각입니다. 후임 잡아와야죠.”
“······.”
행간을 뛰어넘는 결론에 심 사장은 관자놀이를 더욱 세게 꾹꾹 눌렀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는 찰나, 오정섭은 씩 웃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결과로 능력을 증명해내겠습니다.”
“허?”
“저도 얼른 외근 나갔다가 조기 퇴근하고 싶습니다!”
“허어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성준 도련님.”
성질 급한 오정섭은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굳이 발로 문을 뻥 걷어차며 달려나갔다.
밖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사무실 식구들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인력 충원하러 가자!”
“와아아아!”
“후임 잡아오자!”
“갑시다아아아!”
전 태성건설 임원들은 물론이고 과외 선생들까지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무실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심 사장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버지는 부드러운 눈으로 빙그레 웃었다.
“놀랍군요. 이래서 한 회사의 우두머리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봅니다.”
“부, 부끄럽습니다. 제가 부하직원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불민한 모습을······.”
“제가 그동안 봐왔던 태성건설 임원들 같지 않습니다. 열정과 의욕이 넘치고, 기쁨과 야망에 불타오르는 모습, 처음 봅니다.”
“······예?”
“아시다시피 작은아버지 밑에서 그간 임원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습니까?”
“아!”
심 사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손대는 일마다 적자가 나니 차라리 일을 벌이지 말고 현상 유지만 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죠. 오정섭 전무와 임원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랬습니까?”
“경영의 대가라는 말이 어째서 붙었는지 인제야 알 것 같습니다.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
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심 사장은 ‘우리 보스는 댁 아드님이라니까요!’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 소리를 내었다.
“어쨌거나 오 전무를 비롯한 임원들이 자청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으니, 한번 믿고 맡겨 보시렵니까?”
“물론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성화학 사장직도 부디 숙고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공용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고 있었다.
“정혁아, 사무실에서 놀지 말고 아빠랑 같이 갈까? 집에 바래다주마.”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심 사장님과 할 말이 있어요.”
“바쁘신 분이다. 중요한 용건이 아니라면 방해하면 안 된다.”
“······경영 수업?”
뭐? 왜? 뭐!
태성화학과 관련된 일이라면 실전 경영 수업이 맞지!
나는 심 사장을 돌아보았다.
“여기 아저씨들의 단체 외근과 조기 퇴근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
아버지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이따 집에서 보자. 오늘은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같이할까?”
“좋아요!”
안 그래도 오늘 업무량이 많지 않아서 조기 퇴근이 가능할 것 같단 말이지.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아버지를 배웅했다.
* * *
심 사장이 뜨끈한 쌍화차를 내게 내밀었다.
본인은 둘둘둘이란 황금 비율의 밀크 커피를 마시면서.
크, 커피향 죽이네!
“도련님, 인력 충원은 뭐고, 후임은 또 뭡니까?”
“숙청해야 할 우광화학 임원들을 잡아다가 굴리려고요.”
“허······!”
“군기 잡는 건 태성건설 임원들이 맡아줄 거고, 교육은 실전에서 개같이 갈구며 시켜야죠.”
우광의 임원들 역시 엘리트 과정을 밟은 우수한 인재!
뒷골목 깡통들도 요령껏 굴려먹던 나로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다.
“도련님의 비밀을 우광 출신 임원들이 알아도 괜찮겠습니까?”
하지만 심 사장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약점을 잡고 있다고 해도 태성건설 전 임원들과는 다릅니다.”
나도 안다.
“태성건설 임원들은 권력과 돈에 취해 꾀를 부리며 타락하기는 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태성과 역사를 같이한 충신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광의 임원들은 그렇지 않다.
“똑같이 약점을 잡았다고 우광의 입까지 틀어막긴 어려울 겁니다. 행여 이 비밀이 우광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그놈들을 왜 내 투자회사나 태성화학에서 굴려먹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예?”
심 사장은 두 눈을 꿈뻑거렸다.
“구조조정은 왜 하고, 숙청은 왜 하는데요?”
“······?”
“태성에 충성하는 임원들이 돌아오려면 빈자리가 나야 한다면서요?”
“······!”
나는 씩 웃었다.
“이만하면 좌천이 아니고 영전에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서, 설마!”
빙고.
“중동에 나갔던 태성화학 임원들을 불러와야죠.”
우광의 임원들은 중동 공사 현장에서 굴릴 작정이다.
심 사장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베일 산업항 도시 건설은 무려 1억 달러짜리 대공사라면서요. 그걸 나 몰라라 내버려둘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가 아닙니까? 태성화학 임원들이 빠진 자리에 우광 임원들을 밀어넣는다면 지켜보는 눈도 없는데, 누가 태성을 위해 일하겠습니까?”
심 사장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놈들은 건설의 전문가들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놈들로 거친 사막의 대공사를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다!
“잊으셨어요? 공사 전문가라면 우리에게도 있잖아요.”
“어······?”
“전(前) 태성건설 임원 중에서도 오정섭 전무님 깡다구가 제일이라죠?”
오정섭은 깡패와도 맞짱 떠서 공사를 강행하던 자였다.
할아버지의 별명이 ‘화염 불도저’였는데, 오정섭의 별명은 ‘칼 박은 로드롤러’였다.
“게다가 아직 이 비서님도 중동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다면서요?”
“이 비서라면 설마 김 비서가 후계자로 점찍었다던 태성건설 이경석을 말하시는 겁니까?”
“네.”
이경석은 훗날 태성의 브레인이라 불리며 태성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태성전자 사장이 되는 남자다.
중동에 인맥 꽉 잡아 중동시장 개척에 큰 공을 키웠는데, 중동의 실세들과 격 없이 어울리며 친교를 나누고 사업을 성사시키는 수완가로 유명했었다.
중동의 왕자들 중에서도 사업적 감각으로 두각을 드러낸 만수르가 종종 이경석 사장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걸 보면 말 다 했지.
“이참에 아빠의 최측근이라는 분을 승진시켜주는 것도 좋잖아요?”
“확실히. 이 비서는 그저 비서로 썩히기엔 아까운 인재이긴 합니다.”
심 사장은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했다.
“이 비서가 중동의 거물 무함마드 빈 부티 알하메드의 귀빈이 되었다더군요. 중동 전역 행사에 참석해서 닥치는 대로 공사를 따냈다는 말을 방금 아버님께 들은 참입니다.”
인력 충원하자고 꼬드기느라 저승사자와의 시야 공유를 끊은 탓에 엿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딴 공사거리 덕분에 준공 기한을 맞추려면 단내 나도록 사막을 뛰어다녀야 할 거라던데요.”
“잘됐네요.”
고생길이 훤하단 소리였다.
심 사장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면서 웃었다.
“보스, 아버님께서 절 태성화학 사장 자리를 도로 맡아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심 사장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태성화학 사장님으로 돌아가려고요?”
“가고 싶다면 고이 보내주시려고요?”
“물론이죠.”
애초에 심 사장은 아버지를 돕기 위한 사람이기도 했고.
나도 쌍화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웃었다.
“잊으셨어요? 내가 새해 첫날에 제안했잖아요.”
나는 심 사장을 영입하면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에게 제안을 했다.
나는 그때와 똑같은 자세로 심 사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러면 훗날 심 사장님께 선택권을 드리겠어요.
“유공 인수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투자회사, 정유회사, 태성화학, 셋 중에 원하는 곳으로, 따르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심 사장의 손을 꽉 잡았다.
내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다 덮지 못할 만큼 크고 거친 손이었다.
“섭섭합니다, 도련님.”
“네?”
“아직 유공 인수를 성공적으로 끝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저를 내보낼 생각을 하시다니요.”
심 사장은 악수를 멈춰 세웠다.
“제가 맡아 인수하기로 한 우광의 계열사가 무려 일곱, 아니, 시발 여섯이나 됩니다.”
“······.”
“이리 중요한 때에 제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태성과 도련님의 미래가 달린 이런 막중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길 바라십니까?”
“한 달 내내 이어지는 야근과 철야에, 해도 해도 끝없이 쏟아지는 일거리가 지긋지긋하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지옥 같은 업무 강도이긴 합니다만.”
“술 접대하면서 영업 뛰는 것보다는 태성화학 사장 자리가 훨씬 안락하고 명예롭잖아요. 원래 심 사장님의 자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거기엔 도련님이 안 계시죠.”
심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이 태성그룹의 경영 일선에 나서기까지 제가 곁에서 보필하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걸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태성화학이 아니라 내 곁에 남겠다는 건가요?”
“예, 아버님께는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힐까 합니다.”
심 사장은 아버지가 아닌 날 택했다.
할아버지의 뜻이 아닌 내 뜻을 따르겠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태성화학 사장 자리를 내내 공석으로 비워둘 수 없으니, 이 역시 난감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경영이 어디 뉘 집 개 이름이던가.
경영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 엄마가 덥석 맡아 이끌기엔 태성화학은 무려 300억짜리 기업이었다.
21세기 시세로 치면 대략 1조 5천억 원짜리 회사에 딸린 직원만 2천 명이 넘는다.
“심 사장님이 뜻을 굳히셨다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 설마 우광에서 꽂아넣은 사장을 그대로 쓰시겠다는 건······.”
“전에 내가 영전과 금의환향을 약속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럼 거기엔 당연히 승진도 포함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아!”
“중동 건설 총책임자를 맡아 나가셨던 태성화학 부사장님께 전보를 보내야겠군요?”
심 사장은 활짝 웃었다.
“이것 보십시오. 이게 어떻게 여덟 살짜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발언이냐고.”
심 사장이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태성화학 임원들을 챙겨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기뻐 보이는 눈이었다.
“전 새해 첫날 전 태성그룹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태성의 미래를 위한 대계의 포석을 깔기 위해 몸 바칠 겁니다. 도련님이 태성의 미래이십니다.”
어느새 심 사장의 대계는 사업이 아닌 내가 된 모양이었다.
“심 사장님도 인생 참 고달프게 사시는군요. 아무래도 과로사 면하긴 어려우실 듯해요.”
“이왕 과로사를 해야 한다면 대한민국 재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만한 바지사장 자리가 어디 흔합니까? 제 야망을 우습게 보시면 곤란합니다.”
난 야망 있는 사내가 좋더라!
“약속할게요. 지금 제 손을 잡은 걸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해서 크게 키워볼게요.”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발언입니다만, 이 역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부디 과로사하지 않도록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에 힘써주셔야겠는데요?”
“······일을 덜 시킨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지금도 심 사장님 연세를 생각해서 덜 시키고 있잖아요. 일부러 황금색 라벨이 붙은 상자만 넘겨주고 있는데요?”
“······.”
심 사장은 내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산을 바라보다 말문을 잃었다.
딱 봐도 심 사장이 맡아 처리하는 업무량보다 내 몫이 열 배는 많았다.
“까짓것! 전 계속 황금색 상자만 맡으면 되는 거죠?”
“그럼요. 나만 믿어요.”
우리는 맞잡은 두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심 사장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
내가 잘못 봤나?
순간 심 사장에게서 황금색 후광이 은은하게 서린 것을 언뜻 본 것도 같은데.
< 심 사장의 선택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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