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제부터 틀렸다니까요? (1) >
김대식은 회장실을 가로지르며 왔다 갔다 빠르게 걸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가 왜 저런 꼬맹이 손에 들려 있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비서가 잔뜩 굳어서 말했다.
“큰일입니다. 지금으로선 속수무책입니다. 저 많은 눈과 귀를 가릴 자신이 없습니다.”
“나도 알아!”
“우광건설 뇌물 장부에 적힌 사람들이 누굽니까? 정계 고위직 인사들입니다!”
행정부 고위 관료들과 정계의 굵직한 정치인들.
거기에 언론인들은 물론 군의 장성과 중정의 요원까지 얽힌 일이었다.
“명단이 공개된다면 장부에 적힌 위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빌어먹을!”
“안 그래도 코라이 게이트 때문에 뇌물수수와 로비에 가뜩이나 예민한 때가 아닙니까.”
코라이 게이트.
한국인 로비스트들이 한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정치 공작의 일환으로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미국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보도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 행정부와 한국 정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치욕을 당한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도 안다고.”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가 드러난다면 정부의 부정부패가 뜨거운 감자가 되어 도마 위에 오를 겁니다.”
“알아! 안다고! 내가 그걸 왜 몰라!”
“어쩌면 취재진과 정치인들이 저리 눈이 벌게져서 몰려온 이유가 저 뇌물 장부 때문일지도······.”
“이런 빌어먹을! 그게 아니라면 우광의 체면을 무시하고 저리 막무가내 날뛸 리 없겠지!”
김대식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런데도 씩씩대는 숨소리는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저 명단이 공개되면 각하의 노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의실로 불렀잖아! 노사 협상을 받아들인 이유가 뭘 것 같아?”
쾅!
김대식은 참지 못하고 창틀을 내리쳤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저 빌어먹을 장부가 갑자기 왜 여기서 튀어나왔을까?”
환장하겠다.
“중정을 뒤집어엎어도 못 찾았던 장부라며? 구로동 판자촌에 불까지 질러가며 없애려다 실패했다던!”
우광건설 뇌물 장부는 태성을 은밀하게 후원하는 자가 가지고 있다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뇌물 장부가 밖으로 유출되는 바람에 송년의 밤에서 우광은 정계 및 언론의 고위 인사들에게 대놓고 눈총을 받았다던데.
“저게 어떻게 꼬맹이 손아귀에 들려 있지? 왜, 이제 와서, 무슨 목적으로?”
김대식이 아까부터 회장실을 바쁘게 서성인 까닭이었다.
“우광의 노조가 시위를 벌인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뇌물 장부가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 있어.”
김대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도 천지 분간 못 하는 코흘리개 어린애의 손을 빌려서 내보여야만 하는 까닭이라면······ 젠장, 모르겠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김대식은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누가 이렇게 일을 몰아가고 있는 거지? 이게 정말 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잔뜩 흐트러진 머리로 김대식은 씩씩댔다.
“한순간에 재계 서열 9위인 우광이 무너져 내린 일이야. 그게 고작 우광건설 뇌물 장부 하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란 게 말이 돼?”
믿기 힘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대체 작은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 벌인 거야! 남의 금고에 손대지만 않았어도! 뇌물 장부만 안 만들었어도!”
우광건설 김 사장이 태성건설 차 사장을 꾀어내 뜯어냈다던 돈이 20억이었던가?
“기껏해야 20억 때문에 우광이 이런 치욕을······! 빌어먹을!”
이 시절의 20억이라면 적어도 21세기엔 600억 이상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그러니 정치인들도 좋다고 버선발로 달려나와 넙죽 받아먹었겠지.
그게 제 숨통을 조여오는 목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그건 우광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저걸 어떻게 없애지?”
김대식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왠지 지금 수습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저 빌어먹을 장부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은데 말이야.”
골치가 아팠다.
“아버지는 저 장부가 이미 청와대에 올라가 보고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
그건 김대식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그리 순순히 총수직에서 물러나지 않으셨을 거다.”
그래서 더 믿기 힘들었다.
“아버지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치밀하게 설계된 판이라면······ 대체 어느 작자의 솜씨일까?”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기분이다.
모래늪에 빠진 전갈이 된 기분이다.
개미지옥에 떨어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야. 이 정도로 집요하고 세련되게 설계된 함정이란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저벅저벅저벅저벅.
신경질적인 걸음이었다.
“대한민국에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존재했던가?”
김대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런 거물이 있었다면 두각을 드러내도 한참 전에 드러냈을 거다. 이처럼 소리소문없이 암수를······ 후우.”
속이 타고 목이 탔다.
“그렇다면 더더욱 끔찍하군. 무서운 심계다.”
김대식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머리를 더욱 빨리 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광이 당면한 지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적이 우광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다.”
저벅저벅저벅저벅.
“생각해 보자. 지금껏 취재진이 눈 까뒤집고 몰려들어서 우광을 물어뜯고, 여야 정치인들이 합세하여 날뛰었던 적은 딱 한 번뿐.”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바로 아버지가 총수직에서 사퇴하도록 청와대가 압박했을 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만일 우광이 뇌물 장부의 주인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실이 신문과 방송을 타고, 분노한 정치인들이 우광의 발목을 잡겠다고 물고 늘어진다면······.”
김대식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시발, 이거 나까지 총수직을 내려놓고 물러나야 하는 거 아냐?”
그럼 우광은 어떻게 되는 거지?
우광에 아들은 오직 자신뿐.
아버지라면 딸에게 총수 자리를 내어주실 위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광이 발칵 뒤집힐 만큼 피바람이 불겠군.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야.”
김대식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로 각하께서 이것을 노리고······.”
청와대 신년 오찬 때가 떠올랐다.
대통령은 분명히 경고했다.
-살려만 달라며.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착각하지 마라. 재계 서열 1위부터 9위까지 모조리 무너뜨려도 대한민국이 무너질 일은 없어.
-개소리하지 말고 짖어.
김대식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나팔수 노릇 하려면 방송국과 신문은 있어야 할 테니, 그것은 남겨주마.
대통령이 우광의 계열사를 조각내어 태성에 넘기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
그 어느 대목에서도 우광의 의견은 없었다.
-왜? 싫은가?
-월월!
얘기는 그렇게 끝났었다.
“빌어먹을!”
김대식은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통을 집어삼켰다.
분했다.
치욕스러웠다.
“이게 경고에서 그치지 않고, 기어이 각하가 나서야 하는 상황까지 끌어내려진다면 진짜로 풍비박산 나겠는데?”
역시 넙죽 엎드리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가.
그래서 김대식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어뜯었다.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는 협상이었군.”
이가 갈리고 뼈가 시렸다.
분노가 치솟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겠다!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개에겐 죽음뿐이야!”
김대식은 이 악물고 참아냈다.
“팔다리를 내어주고, 목줄을 차고, 개처럼 짖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치욕을 되돌려주고 말겠다!”
김대식은 등을 돌렸다.
“박 비서, 아버지를 모셔오십시오.”
박 비서는 머뭇거렸다.
“명예 회장님께서는 총수직을 사퇴하시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우광재단의 일에만 몰두하신다는 뜻을······.”
“잔말 말고 호출 연락하세요! 우광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 빨리!”
“······예. 알겠습니다.”
* * *
우광그룹 본사 회의실.
양측의 의견을 타진할 수 있도록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나도 협상 대표단에 껴서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유종태는 혀를 찼다.
“이야, 우광은 정말 쪼잔하군요. 어떻게 간식으로 귤 하나 보리차 한 잔도 안 내놓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한겨울에 찬 바람 맞으며 여태 시위하던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노사 협정 테이블에 앉아보는군요.”
“두 달 가까이 개무시를 하더니. 벌써 내일이면 사망자 49재입니다.”
대신 무척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감격스러워하기 바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협상할 의사를 보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든 피해 보상금을 꼭 받아내고 말 겁니다!”
“경영권 싸움 때문에 일부러 공장에 불을 질러 사람이 죽었어요! 그런데 보상금이 꼴랑 30만 원?”
“깽값도 이보다는 더 받을 겁니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그들은 ‘우광노조’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지 않았다.
머리에 두른 빨간 띠 역시 ‘우광’이 아닌 ‘단결’이라는 글자가 오버로크로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고단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성건설 사장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태성엔 도움만 받게 되는군요.”
“병원 치료도 그렇고, 생활지원금도 그렇고, 고용승계는 물론 노조 활동까지 지원받았으니······.”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래서 더 면목 없고, 염치가 없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희 때문에 공장이 폐쇄되고 사업장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끼쳤는데도······. 이렇게 끝까지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신 만큼 어떻게든 오늘 이 협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래야죠. 동료들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다시 일터로 복귀합시다.”
“예!”
다들 의지와 각오를 다잡으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기, 사실은 번번이 사측과의 협상이 결렬된 이유 중 하나가······.”
“협상단의 심계에 휘말렸기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단순 노동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애초에 말싸움은 고사하고 신경전 상대도 안 되더라고요.”
말싸움이 안 되니 몸싸움으로 번지고, 경찰이 출동하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느라 단체 농성을 불사하게 되고.
그렇게 과격 시위로 변질되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협상이라면 우리도 질릴 만큼 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역시 전문가! 이래서 임원, 임원 하는가 봅니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고급 양복에 비싼 가죽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우광그룹 본사의 임원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임원들을 거느린 채 맨 앞에서 걸어오는 것은 차기 우광그룹 총수 김대식이었다.
우리도 그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대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심 사장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회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양측 대표는 악수했다.
김대식은 차가운 눈으로 심 사장을 노려봤다.
“이상하군요. 왜 우광 노조의 대표로 태성화학 심 사장님께서 앉아계신 겁니까?”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벌이는 기선 제압용 신경전이었다.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깔고 가는 심리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거 월권 아닙니까?”
“월권이라뇨? 엄연히 단체교섭권의 대표를 위임받고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만? 노동 3권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노동자가 보유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전부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법이 허용하는 정당한 권리였다.
“우습군요. 설마 심 사장님께서 노조(勞組)라는 단어 뜻조차 모르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 역시 엄연히 노동자라 할 수 있습니다만?”
“솔직히 심 사장님은 노동자보다는 사측 입장을 대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월급쟁이 사장이잖습니까. 봉급 받고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면 뭡니까?”
마주 보는 눈길에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김대식은 대놓고 입가를 일그리며 웃었다.
“이러시는 저의가 뭡니까? 우광그룹 소속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우광의 노조를 대표해서 협상 테이블에 나오셨냐 이 말입니다.”
“전제부터가 틀려먹은 것 같군요. 이들이 우광의 노조라고 누가 그럽디까?”
“······예?”
날카롭게 대치하던 중에 예기치 못하게 날아온 일격!
김대식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아니, 우광의 노조를 끌고 와서 단체 교섭의 대표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놓고 인제 와서······.”
“그러니까요. 우광화학이 인수될 때 고용승계까지 포함된 건 잊으셨나 봅니다?”
“그럼 지금 이 사람들은······?”
“우광의 노조가 아니라 태성의 노조입니다만?”
심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수록 김대식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그럼 태성의 노조가 왜 우광그룹 본사에 쳐들어와서 지랄인데요?”
“그야 태성은 한 식구! 태성의 가족이 겪고 있는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고 대동단결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김대식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애초에 노사 협정이 열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하단 말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니까요? 누가 노사 협상으로 쳐들어왔답니까?”
심 사장은 배를 쭉 내밀었다.
“우린 손해 배상 협상하러 온 겁니다!”
우광그룹 임원들은 단체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김대식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콕 짚어 말하면 내가 들고 있는 검은색 커버의 서류철에서 눈을 떼질 못한달까?
‘질 수밖에 없는 협상이란 걸 눈치챘나본데?’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 양반이로구만!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할지도?
< 전제부터 틀렸다니까요?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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