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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36화 (136/189)

< 공갈로 때린 외통수 >

김대식은 아직도 회의장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취재진과 노조를 힐끔 보았다.

심 사장이 제안했다.

“회장실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홱!

김대식은 대답하는 대신 내가 들고 있는 종이를 낚아채려고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경호원 유종태가 한발 더 빨랐다.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서며 김대식의 팔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간도 크시네요. 취재진 앞에서 어린애를 폭행했다간 내일 아침 신문 기사는 죄다 우광으로 도배될 겁니다.”

“이거 안 놔? 때리긴 누가 때린다고.”

김대식은 팔을 빼려고 했지만, 유종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진술서라는 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지 않겠어?”

심 사장은 바로 등을 돌렸다.

“대화는 여기까지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유 팀장, 이만 회사로 복귀합시다.”

“잠깐! 이대로 떠난다고요?”

“김 회장님의 뜻은 이만하면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되도 않는 헛소리였나 봅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그럼 자세한 내용은 신문 방송에서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진짜 언론에 발표하겠다고?”

“안 될 이유 있습니까?”

심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론에도 발표하고, 청와대로도 올려보내고, 아예 대학교 벽보에 붙여놓든가, 신문 광고라도 뿌릴까 합니다만.”

“잠깐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어린애한테 이런 서류를 들려보냈을 적에야 당신도 언론 플레이를 노리고······!”

“언론 플레이?”

심 사장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 저걸 언론에 뿌려서 우광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단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큭!”

“우광화재 사건으로 민심이 떠나고, 각하께서 등 돌리셨을 때 저걸 내밀었다면 효과가 참으로 대단했겠죠. 아니면 청와대 신년 오찬이라든가.”

“······그걸 못 내민 이유가 있었겠지요. 차윤성 사장이 중정에 끌려가는 걸 원치 않기 때문 아닙니까?”

“그까짓 중정!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볼까요? 우리는 이미 해고 경질된 건설사 사장을 잃고 끝나겠지만, 우광은 바로 당신, 김 회장님이 끌려가시겠네요?”

“난 뇌물 장부 따위완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중정이 아무리 없는 죄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누가 중정으로 끌려간답니까? 당신이 끌려갈 곳은 청와댑니다!”

“······!”

김대식은 얼어붙었다.

“왜요, 태성이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습니까?”

심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가 청와대로 올라갔을 때, 우광의 김 전(前) 회장님께서 사재 출연과 총수직을 사퇴하고,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까지 벌여야 했을 만큼 각하께선 크게 노하셨습니다. 왜일 것 같습니까?”

어라? 이건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때 내가 했던 말인데?

그걸 토씨만 바꿔서 다시 읊을 줄이야.

“이런 게 공개된다면 청와대는 대대적인 숙청의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지 않습니까? 코라이 게이트라고 들어는 보셨는지요?”

미국 정관계 고위층에 한국 로비스트가 뇌물을 잔뜩 살포한 부정부패 사건이었다.

“그 사람들 전부 쳐내면 국정이 마비될 지경이라죠? 아이고 이걸 어쩌나. 이게 다 우광의 노사 협정에서 나온 서류 한 장 때문이군요. 각하께선 나팔수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우광을 퍽이나 어여쁘게 보시겠습니다.”

심 사장은 비웃었다.

“어쩌면 내일 신문 헤드라인 기사는 우광 노사의 극적인 협상 타결이 아닌, 대한민국 부패척결 관련 소식이 될 것 같군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진흙탕 싸움!”

“······회장실로 올라가시죠.”

“됐습니다. 내가 거기 가서 뭐 합니까?”

“우광 계열사 인수 협상 하자면서요.”

“그건 각하께서 이미 결정 끝난 얘기 아니었습니까? 김 회장님의 몫이라곤 인수 계약서에 도장을 언제 찍느냐일 뿐인데, 유세 참 엄청나게 떠시네요.”

“······.”

“유 팀장, 갑시다! 차라리 각하께 물어보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찍겠습니다, 도장!”

김대식은 뻑뻑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인해 아직 준비된 계약서가 없는 관계로 일단 대화부터······.”

“계약서라면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만?”

심 사장은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려 팡팡 쳤다.

김대식은 질린 눈으로 보았다.

“철저하시군요.”

“태성화학 인수할 때 이미 겪어보셨으면서 새삼스럽게.”

“심 사장님은 계열사 인수 협상 날치기 통과가 주특기이신가 봅니다.”

“왜요? 한국인답게 더 빨리빨리 진행해드려요?”

심 사장은 서류 가방을 열고 계약서 여섯 부를 꺼냈다.

“일단 계약서에 서명 날인부터 한 후에 대화하시죠.”

“항복.”

마침내 김대식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계열사 넘겨드리겠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우리 도련님께 사과도 해주셔야겠습니다.”

김대식은 몹시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꼬마야, 미안하다. 내가 좀 무례했다. 서류를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지, 널 때리려던 건 아니었다.”

“사과 받아들일게요.”

나는 심 사장에게 들고 있던 반성문을 내밀었다.

심 사장은 반성문을 서류 가방에 넣으면서 김대식을 돌아보았다.

심 사장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차피 각하께서 넘기라고 명하신 것, 차일피일 미뤄 봐야 미운털밖에 더 박히겠습니까.”

“우광이 어쩌다 각하께 미운털이 박히게 됐······! 하아, 됐고. 그만 올라가시죠.”

“좋습니다. 30분 내로 협상 마무리 짓죠.”

“우광의 여섯 계열사가 뉘 집 개 이름인······! 하아, 됐습니다.”

김대식은 비틀거리면서 회장실로 올라갔다.

나는 멀어지는 두 대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대한민국 재계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을 만큼 나름 한가락 하던 위인이었는데, 아직은 서른일곱 살짜리 애송이 회장 티가 나는군.’

김대식은 재계 9위였던 우광을 재계 4위까지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확인부터 제대로 하셨어야지. 아무리 지고 들어갈 싸움이라고 해도 이리 맥없이 꼬리를 내리면 쓰나.’

아까 당하고 또 속을 줄은 몰랐네?

그래서 물었다.

“유 팀장님, 김 비서님께 연락드린 건 어떻게 됐어요?”

“회장님께 보고드리고 바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탁드린 물건은요?”

“누구 부탁인데요.”

유종태는 씩 웃었다.

“우광의 계열사 여섯 곳을 오늘 내로 정리할 생각이라고 했더니, 모든 일정 취소하고서라도 가져오신다고 확답하셨습니다.”

유종태는 소매를 슬쩍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차가 안 막히면 태성그룹 본사에서 이곳까지 20분쯤 걸릴 텐데요.”

“흠.”

“협상이 이렇게나 빨리 마무리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거 어쩌면 우광의 계열사 6곳의 인수 협상이 끝나고 나서야 도착하시는 거 아닙니까?”

유종태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니 날치기 통과 전문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잖아요.”

“어차피 받아올 거라면 빨리 받아와야죠.”

그게 내 사채 회수의 원칙이었다.

“캬, 그간 심 사장님이 태성화학 때문에 내내 이를 가시더니. 우광으로선 예기치 않게 아까운 계열사를 몽땅 넘기게 됐군요. 악착같이 시간 끌고 싶었을 텐데.”

“태성화학을 급처분하면서 우리도 손해를 꽤 봤잖아요? 빚을 졌으면 그 이상으로 회수해야죠.”

그 또한 내 사채 회수의 원칙이었다.

‘태성화학이 물러나면서 자산 손해를 얼마나 봤더라?’

나는 고사리같이 오동통하고 작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산만 억 단위, 어음에 은행 및 사채 이자까지 계산해서 족히 십억 단위 손해를 감수했었죠.”

태성화학 화재를 막아 사람들을 살려보겠다고.

하지만 우광건설의 방화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참에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줬을 뿐이다.’

날 돌아보는 유종태의 눈에는 존경과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럼 우광은 계열사 여섯 곳을 한꺼번에 급처분하게 됐으니. 예상되는 이득은 적게 잡아도 몇십억 단위겠네요?”

“아마 동산과 부동산은 물론 직원들 빼돌릴 시간도 없을걸요?”

“이야, 우리 회사에 또 후임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오겠는데요?”

유종태는 손바닥을 비비며 우후훗 웃었다.

상당히 비열하고 음흉한 웃음이었다.

“미리 청계산에 구덩이 파놓을까요? 중동으로 비행기 띄울까요?”

“우후훗!”

“우와, 도련님. 방금 엄청 비열해 보이는 웃음!”

드디어 이 순간이 오는군.

‘내가 왜 우광침몰지계 3단계를 계획했는데.’

-첫째, 우광의 약점 잡기.

-둘째, 우광의 치부를 공개하여 침몰시키기.

-셋째, 우광의 계열사를 거둬들이기.

그간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이제 저 인수 계약서에 서명 날인만 끝내면 우광의 계열사가 내 손 안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혁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할아버지가 허겁지겁 회의장에 들이닥쳤다.

“아니, 여덟 살짜리 꼬맹이가 왜 노조 시위에 앞장섰다는 게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너무 반가워서 두 팔 벌려 달려갔다.

물론 김 비서가!

“김 비서님, 제가 가져오라고 했던 서류는 챙겨오셨겠죠?”

“물론입니다.”

김 비서가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헤벌쭉 웃으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던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지만 난 두툼한 서류철을 넘기기 바빴다.

‘지금 한가하게 할아버지랑 껴안고 우쭈쭈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요?’

무려 우광 계열사 6개의 인수가 달린 공갈 협박을 날렸거든.

“태성건설의 작은할아버지가 쓴 진술서 말고도 이것저것 엄청 많네요?”

“그때 도련님께서 호언장담하셨잖습니까. 진술서를 불태우는 조건으로 우광의 계열사를 뜯어내겠노라고.”

진술서를 불태운다는 대목에서 할아버지는 입을 떡 벌렸다.

아마 내가 전에 할아버지와 담판 짓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그걸 김 회장님의 손에 쥐여 주시려고요? 굳이 작은할아버지를 두고 협박받고 싶으시면 그러시든가요.

김 비서는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죠. 누구 솜씨인데요. 이거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겠는데요?”

역시 김 비서!

시키지 않은 일까지 이렇게 제대로 처리하다니!

작은할아버지의 진술서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도 잠시.

“이 정도면 대통령이 오늘 당장 우광 간판을 떼어다가 개집 명패로 쓰겠다고 날뛰어도 될 정도인데요?”

“오늘을 위해 공들여 준비해봤습니다.”

“김 비서님, 최고!”

“영광입니다. 도련님께 칭찬을 듣게 되다니요.”

김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도 종종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확실하게 서포트하겠습니다.”

“김 비서, 자네 누구 비서야?”

할아버지가 작게 툴툴댔다.

“나한테는 맨날 잔소리만 하면서 엄지 하나 들어줬다고 영광 소리가 나오나?”

“그러는 회장님께선 엄지 한 번을 안 들어주셨습니다만.”

“그까짓 것! 나도 들어줄 수 있어, 엄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엄지를 치켜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엄지를 받겠대? 양심이 있나, 김 비서?”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와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나는 김 비서가 건넸던 서류철을 할아버지 손에 쥐여 드렸다.

“됐다. 이런 건 김 비서나 주라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입술이 삐쭉거렸다.

“할아버지, 심 사장님은 회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우광 노조 시위에 심 사장은 또 왜 나와?”

“그야 여섯 개의 우광 계열사 인수를 오늘 내로 담판 짓기 위해서 오셨으니까요.”

“뭐? 인수 담판을 오늘 내로 지어? 아니, 어떻게?”

“······협박해서?”

뭐? 왜? 뭐!

“누가 뭐를 해? 협박을? 심 사장이 한 거야, 받은 거야?”

“계열사 빨리 안 넘기면 작은할아버지의 반성문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했더니, 젊은 회장님이 심 사장님을 회장실로 끌고 가시던데요?”

“반성문? 진술서가 아니고?”

“에이, 저한테 진술서가 있을 리 없잖아요.”

난 거짓말 안 했다.

“제가 아까 건넨 건 작은할아버지가 보내온 반성문인데요. 태성건설을 말아먹어서 여러모로 미안하게 됐다며 우리 아빠께 따로 전한 편지 말이에요.”

“뭐?”

할아버지는 눈을 껌뻑거렸다.

“허, 허허허. 허허허. 공갈로 우광의 외통수를 때렸구나.”

할아버지가 무릎을 탁 쳤다.

“지금 우광은 각하께 납작 엎드려 비는 처지다. 사소한 꼬투리 하나만 또 걸려도 폭삭 무너지기 일보직전이거든. 어떻게든 몸을 사려야 할 때야. 그러니 외통수다.”

“따지고 보면 딱히 공갈도 아닌데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억지로 쥐여준 서류철을 톡 건드렸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렸잖아요. 심증만 있는 것과 물증까지 확실한 건 엄연히 달라요.”

“하지만 이걸 언론에 공개하면 우광만이 아니라 우리 태성도 난처해지긴 마찬가지다. 윤성이까지 휘말리는 건 원치 않거든.”

“그러니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보는 앞에서 태워버리세요.”

얻을 수 있는 걸 다 얻었으면 증거 인멸은 필수!

“싫으면 마시고요. 저쪽은 우광그룹 총수가 나섰잖아요. 협상 대표로서 격을 맞추려면 제가 대표로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안 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겁도 없이!”

할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다.

“우광은 계열사를 일곱 개나 생으로 뜯겼어! 자칫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할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얼굴을 붉혀도 내가 붉히고, 담판을 지어도 내가 지으마!”

할아버지는 서류철을 단단히 잡고 흔들었다.

“물론 증거인멸도 내가 한다! 윤성이까지 중정에 끌려가지 않도록 책임지고 마무리 확실하게 처리해 놓으마!”

“우리 할아버지 최고!”

나는 양손으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김 비서, 봤나? 자네는 엄지 하나, 난 두 개야!”

* * *

할아버지가 우광그룹 회장실을 찾았을 때.

맞은편 복도에서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다, 차태성.”

전(前) 우광그룹 회장이었다.

< 공갈로 때린 외통수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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