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37화 (137/189)

< 우광의 결단 >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저승사자, 회장실로.’

[알았다!]

저승사자는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시야가 바뀌었다.

이곳은 우광그룹 본사 빌딩 가장 위층에 자리 잡은 회장실 앞이었다.

회장실 앞 복도에서 할아버지와 김우광 명예회장이 웃으며 악수했다.

“오랜만이다.”

“우광아, 안 본 새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냐? 밥은 챙겨 먹고 다녀야지.”

“너는 배 터지게 잘 챙겨먹고 다니나 보군. 일이 잘 풀리나 보지?”

“덕분에.”

우광의 계열사 여섯 개를 태성이 먹게 되었다.

아니, 태성화학까지 셈하면 총 일곱 개나.

김우광 명예회장이 쓰게 웃었다.

“양심도 없는 새끼. 본인 앞에서 꼭 그렇게 찔러야겠냐?”

“양심 같은 소리 하네. 태성화학 인수 계약서를 봤을 때 나도 똑같은 생각 했었어.”

태성화학을 어음으로 후려쳐 헐값에 뜯어가려던 것 역시 양심도 없는 짓거리였다.

“안됐구나. 우광증권과 건설을 날로 먹지 못하게 됐으니.”

“괜찮아. 대신 더 비싼 중공업 계열사 여섯 개를 날로 먹었으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인수 계약서에 도장 안 찍어주겠다는 뜻이냐?”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라니까?”

김우광 명예회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진득하게 걸린 웃음으로 보아 속뜻을 짐작한 후였다.

“태성아, 넌 이 정권이 얼마나 오래갈 거라고 보냐?”

“이 정권이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이 일을 청와대에 알리면 당장 네 아들이랑 회사가 이 정권에 엿 먹을 거라는 건 안다만?”

“그건 무슨 뜻이지?”

할아버지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검은색 서류철을 툭툭 쳤다.

김 비서가 챙겨왔고, 내가 할아버지 손에 들려줬던 서류철이었다.

“네 아들 대식이가 왜 우리 심 사장이랑 회장실에서 둘이 만나 면담하고 있겠냐?”

“설마······!”

김우광 명예회장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사라졌다.

쾅!

김우광 명예회장은 노크도 없이 회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회장실 응접실에서 김대식과 심 사장은 악수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 늦으셨습니다.”

김대식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답은 활짝 웃는 심 사장이 대신 했다.

“회장님, 계열사 여섯 곳 전부 한 달 내로 인수 끝내기로 합의 봤습니다.”

“김대식!”

“아버지,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김대식은 곱게 접힌 종이를 건넸다.

“차윤성 전(前) 태성건설 사장이 적은 진술서라는군요. 이걸 언론에 공개하겠다는데 별수 없잖습니까.”

“설마 회사 앞에 쫙 깔려 있던 취재진과 여야 정치인들이······!”

“그렇게 됐습니다. 어차피 각하께서 넘겨주라고 못 박은 계열사였잖습니까.”

“하지만 당장 넘겨주란 소리도 하지 않으셨지. 더는 책잡히지 않는다면 모른 척 눈 감고 계셨을 사안이었다.”

김우광 명예회장은 아들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어 읽어내렸다.

“이런 멍청한 자식!”

김우광 명예회장의 손에서 종이가 와락 구겨졌다.

“이런 어쭙잖은 공갈 협박에 놀아나다니. 넌 아직 멀었다.”

김우광 명예회장이 손아귀로 잔뜩 구긴 종이를 아들의 면전에 집어 던졌다.

탁.

“직접 읽어.”

김대식은 제 얼굴에 맞고 떨어진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한 글자씩 읽어내리던 김대식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뭡니까?”

김대식은 종이를 와락 구겨 심 사장에게 던졌다.

하지만 심 사장은 고개만 움직여서 가볍게 피했다.

“지금 나를, 감히 우광을 농락한 겁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농락이라뇨. 처음부터 딱 잘라 말했잖습니까. 이건 차윤성 사장님의 반성문이라고.”

“끝까지······!”

심 사장에게 삿대질을 하던 김대식이 눈을 돌려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차 회장님, 지금의 이 수모와 치욕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우광을 얼마나 같잖게 여겼으면······!”

“그리 성낼 것 없네. 윤성이가 쓴 진술서라면 내가 가져왔으니까.”

할아버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검은 서류철을 내밀었다.

김대식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독수리처럼 채어갔다.

틀림없는 작은할아버지의 진술서였다.

“젠장, 고위 공무원 뇌물 청탁에 관한 진술서 외에도 우광건설이 중정부장과 육군보안사령관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증거까지 가지고 있었을 줄은······!”

김대식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엔 쓴웃음만 남았다.

“작은아버지도 참 겁이 없으십니다. 아버지 몰래 중정부장과 육군보안사령관에게 손을 뻗쳤었군요.”

“망할 새끼가 죽으려면 혼자 죽지, 집안까지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서류를 넘겨보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김우광 전(前)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에 중정부장과 육군보안사령관에 관한 것도 적혀 있었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자네 동생한테나 물어.”

“차태성,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각하께 직접 바쳤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각하께서 알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태성도 마찬가지야.”

“그래, 공범으로 차윤성도 중정에 끌려갔겠지. 각하의 분노가 태성을 향했을 테고.”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장부를 따로 베껴 쓴다는 수고를 감수해가면서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에게 뇌물 명단과 금액 기록을 건넸다.

‘반면 원본 장부의 일부는 중정부장과 보안사령관에게 넘겼지. 그들이라면 필적 조회까지 철저하게 확인할 위인들이거든.’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내 동생이 중정에 끌려가는 것도 원치 않고, 그렇다고 자네 아들이 청와대에 끌려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군.”

“그러니 결론도 비슷하게 도출할 수 있겠지?”

“물론 그래야지.”

할아버지와 김우광 회장은 동시에 씩 웃었다.

“태우자.”

“태워버려.”

김우광 회장이 지팡이 끝으로 양철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할아버지는 품에서 은색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화르륵.

두 회사의 거물급 대표자들이 양철통 속에서 타들어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태성아, 남의 하나뿐인 아들내미를 인질로 잡고 협박했냐?”

“태성에게 넘겨줘야 할 계열사를 인질로 잡았던 건 네 아들이다.”

“그래서 계열사 넘겼잖냐.”

“그래서 진술서 태웠잖냐.”

두 회장은 동시에 웃었다.

“덕분에 넌 하나 남은 동생을 지킬 수 있게 됐군.”

“문제는 하나뿐인 네 동생이 먼저 일으켰다.”

“아들들의 경영권 싸움을 묵인할 생각이라지?”

“아들의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지?”

두 회장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동안 서류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재로 바뀌었고, 불길은 작게 사그라들었다.

“약속 지켰습니다.”

“이걸로 마무리하죠.”

김대식은 헛웃음을 흘렸고, 심 사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졌거든요.”

심 사장은 계열사 인수 계약서를 챙긴 서류 가방을 탁탁 쳐 보였다.

당장 이걸 가져갈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듯싶었다.

“김 회장님의 적극적인 협조에 감사드리는바, 이건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심 사장이 건넨 건 김대식이 구둣발로 짓밟았던 내 <우광화재 피해자를 위한 헌사>였다.

“호의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도 서둘러야겠습니다. 우광은 이젠 언론 플레이에 목숨 걸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김대식은 흔쾌히 받아 챙겼다.

“심 사장님 말씀처럼 그림 딱 좋더란 말이죠. 잘만 포장하면 우광의 이미지를 제대로 챙길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김대식은 취재진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 당장 일을 해결할 생각에 몸이 달아 보였다.

달칵.

그렇게 계열사 인수 계약을 체결했던 둘이 떠나고, 회장실엔 둘만 남았다.

“태성아,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고 가라.”

“난 낮술은 안 하련다.”

“태성화학을 날렸을 때 혼자 궁상맞게 서재에 틀어박혀서 위스키 다섯 병을 홀짝였다면서?”

“크흠!”

“태성아, 난 방금 눈 뜨고 계열사 여섯 개를 뜯긴 참이다.”

할아버지는 눈을 딱 감았다.

우광이 뜯긴 여섯 개의 계열사를 누가 챙겼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럼 딱 한 병만 마시고 갈까? 위스키?”

“그래, 위스키.”

김우광 명예회장이 유리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무척 미안한 기색이었다.

“영선이의 혼처가 정해졌다며?”

우리 아버지와 약혼했었던 여자 이름이 김영선이었다.

과거 아버지가 일찍 죽은 탓에 그녀는 차윤성의 이혼한 첫째 아들과 결혼하여 우광과의 혼맥을 이은 바 있었다.

“노 소장의 조카랑 맺어줄 생각이다.”

“노 소장이라면 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그래, 육군보안사령관의 오른팔.”

태성과 혼약으로 이어졌던 우광과의 인연은 이로써 완전히 끊겼다.

* * *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를 끊었다.

“도련님, 성공했습니다! 여섯 개 계약서 전부 서명 날인 받아냈습니다! 하하하!”

심 사장이 뿌듯한 얼굴로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좋았어!’

드디어 손에 넣었다!

우광 계열사의 인수까지 마무리된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심 사장은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슬쩍 빼었다.

“협박이 제대로 먹혔습니다.”

역시나 황금빛이 터져나오는 서류였다.

저게 다 나한테 떨어진 계열사라니!

기업을 털어먹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 순간만큼은 언제나 가슴이 콩닥거린달까.

‘날로 먹었다!’

수확의 기쁨이었다.

“김대식 회장은 머리 회전이 비상하고 수완이 탁월하여 보통내기가 아니란 소문을 많이 들어서 긴장을 했습니다만, 이것 좀 보십시오.”

황금빛 서류의 끝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서명 날인이 박혀 있었다.

날 바라보는 심 사장의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려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도련님도 어엿한 재벌 회장님이 되셨군요.”

어라?

재벌 회장님이라니.

“제가요?”

“그럼요. 도련님 밑으로 딸린 계열사가 몇 개인데요. 당연히 회장님 소리를 들으셔야죠.”

기업을 날로 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한 번도 재벌 회장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내가 대한민국 지하금융의 거물이 되었어도,

내가 인수해서 쪼개어 되판 기업이 천 단위에 달했어도,

내가 세운 투자회사의 덩치가 재벌그룹만큼 커졌어도,

나는 지금껏 한 번도 회장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나는 늘 보스, 또는 신림동 개미지옥이라 불렸을 뿐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저랑 함께 가실까요?”

“어디로요?”

“명함 파야죠.”

심 사장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선물입니다.”

“됐어요.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명함 건넬 일이 뭐 있다고요.”

뜻밖의 선물은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마음까지 거절한 건 아니었다.

괜히 가슴이 간질거리고,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고작 나이 여덟 살에 중공업 계열사 여섯 곳을, 그것도 방산 기업을 이끌게 되셨군요. 이 영광을 함께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 사장은 정중하게 허리를 90도로 굽혔고,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꾸벅 배꼽 인사 했다.

“심 사장님께서도 그간 고생 많이 하셨어요.”

“하하하, 이제부터는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아닐걸요?

‘방산으로 체제 전환해서 공장 돌려야지, 직원들 단속해야지, 거래처 뚫어야지, 석유파동에 대비해야지, 기술 연구에 박차 가해야지. 할 일이 태산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요.’

하지만 심 사장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크게 웃고 있었다.

“인수 협상단 꾸려야지, 협상 테이블에서 몇 시간이나 실랑이해야지, 계산기 두드려가며 신경전 벌여야지. 그걸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나 할 걸 생각하면, 이건 진짜 날로 먹은 거라니까요? 으하하핫!”

심 사장이 허리까지 젖혀가면서 웃는 이유였다.

“기업 인수라는 게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일입니다. 하나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서 아득바득 물고 늘어지기 일쑤거든요. 그것만 면해도 업무 스트레스가 확 줍니다. 으하하하!”

그래서 나도 방긋 웃었다.

“심 사장님 덕에 인수 합병으로 낭비했을 시간과 수고가 확 줄었군요. 역시 심 사장님, 최고!”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전부 도련님 솜씨였죠.”

심 사장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도련님께선 정재계를 뒤흔들 큰 판도 잘 짜시는데, 언론에 호소할 그림도 잘 그리시더군요. 게다가 협박까지 잘하시다니.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뒷골목에서?

이거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태성화학에서 날렸던 손해의 다섯 배는 족히 거둬들였을 겁니다.”

심 사장은 몹시 기뻐 보였다.

“흐흐흐, 제가 그것 때문에 분해서 요 두 달 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는 거 아닙니까? 오늘부터는 두 발 뻗고 늦잠 잘 겁니다!”

늦잠까지는 몰라도, 숙면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지.

불면증은 과로사행 프리패스 티켓이라구요?

“진짜로 30분도 안 돼서 여섯 개 계열사 인수 계약서에 전부 서명 날인 받아오셨네요?”

“누가 짠 판인데요. 전 믿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얼씨구?

우광의 노조를 앞세워 쳐들어오면서도 입술만 바짝바짝 말라가던 양반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든가.

하지만 보란 듯이 계열사 여섯 개의 인수 계약을 따내고 왔으니.

이거 뭐라 따져 물을 수도 없고.

“도련님, 그런데 김대식 회장이 은밀하게 퍽 수상한 제안을 건네더군요.”

은밀하고 수상한 제안?

심 사장은 몸을 바짝 낮추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우광 또한 태성의 후원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더군요.”

“꿈도 크네요. 맨입으로?”

“그럴 리가요.”

청탁엔 세트로 딸려오는 게 있다.

뇌물.

“우광그룹 지분 7%를 내놓겠답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지주 그룹의 지분을 7%나 내놓겠단 소리를 함부로 꺼내?

‘이건 제 목숨줄을 순순히 넘겨주겠단 소리와 다를 바 없는데?’

심 사장이 슬쩍 쪽지를 내밀었다.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월월! 멍멍! 살려만 주십시오!>

아니, 누가 죽이겠다고 칼 들고 협박했나?

< 우광의 결단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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