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빛 제안 >
‘미치겠다. 이 황금빛은 다 뭐냐?’
은밀하고 수상한 제안이라기에 당연히 쪽지에 조건을 따로 적어 보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무려 우광그룹 지주회사의 지분 7%를 내건 용건이라기엔 너무 개소리 그 자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황금빛 쪽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도련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쪽지에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이라도?”
“별거 없어요. 그냥 개소리를 적어놨을 뿐이에요.”
“개소······ 뭐요?”
심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길래,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쪽지를 보여줬다.
“허어.”
심 사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었다.
“우광이 도련님께 완전히 굴복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문맥상으로 보면 그런가 싶긴 한데.
‘왜 굳이 이런 단어를 골라서 적어둔 거지?’
차라리 항복이라고 적어놓든가.
영문 모를 멍멍, 왈왈은 또 뭐야?
‘황금빛이 이렇게 눈부신 거 보면 뭔가 아주 중요한 암호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그렇잖아.
내가 살다 살다 멍멍, 왈왈, 두 글자를 이렇게 절박하게 적어 보낸 미친놈은 또 처음 본다니까?
아니, 제발 살려 달라면서?
“아······! 도련님께선 청와대 신년 오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모르시는군요.”
심 사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청와대 신년 오찬에서 벌인 김대식의 기행과 대통령이 그를 어떤 취급을 했는지에 관해서였다.
‘아하, 김대식이 왜 굳이 저런 말을 적어 보냈는지 인제야 알 것 같군.’
감 잡았어!
“날 떠보려는 속셈이네요. 영악하기는.”
뻔히 속 보이는 수작질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 쪽지 외에 따로 전한 말은 없던가요?”
“우광과 손을 잡을 생각이 있거든 연락해달라고 하더군요. 기다리겠다고.”
심 사장은 더욱 소리를 죽여서 작게 말했다.
“태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우광도 할 수 있다던데요? 은밀한 일은 태성보단 우광이 한 수 위라면서 말이죠.”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래요?”
“그래서 가운뎃손가락 들어주면서 까불지 말라고 콧방귀 뀌어주고 왔습니다.”
심 사장은 툴툴댔다.
“아무래도 이 자식들, 그깟 우광그룹 주식을 미끼로······.”
“태성의 후원자가 누군지 많이 궁금했던가 봐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심 사장님이 30분도 안 돼서 계약서 여섯 부 들고 오셨잖아요.”
“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죠. 걸린 직원이 몇 명이고, 보는 손해가 얼마인데요.”
나는 심 사장의 서류 가방을 톡 치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게든 계열사를 안 뺏기려고 악착같이 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잖아요. 협박 좀 받았다고 순순히 내어주기엔 걸린 게 너무 많았죠.”
“그게 어디 보통 협박이었습니까? 태성건설 차윤성 회장님의 진술서가 취재진들 앞에서 공개된다면······.”
“인제 보면 심 사장님도 참 순진하시다니까요.”
나는 혀를 찼다.
“저게 터지면 국정이 마비될 정도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가야 해요. 청와대에서 반길 일이 아니었죠.”
“예,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한 큰일로 번졌을 겁니다. 그러니 우광이 수습한답시고 똥줄이 타서······.”
“에이,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 돌리면 신문 방송에 기사 한 줄도 못 나가요.”
지금은 군부독재 시대다.
‘내가 왜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공개하지 않고 은밀히 청와대로 흘려보냈는데.’
우광건설 뇌물 비리에 얽힌 인물들은 만만치 않다.
고위직 행정관료는 물론, 군부와 국회, 방송 관계자까지 얽힌 일이었다.
다들 제 치부를 덮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사장시킬 터였다.
“그걸 김대식이 몰랐을까요?”
“아니, 그걸 알면서 왜······?”
“그러니까 꿍꿍이속이 따로 있다는 거죠. 이렇게 쪽지 보내온 거 보면 몰라요?”
“······.”
심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영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내가 왜 김 비서님께 연락했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회장님을 모셔와서······.”
“정말 태성엔 정말 정치 쪽으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는 사람이 없나 봐요.”
심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세 분 회장님들은 왜 이런 협박에 응하신 걸까요? 진술서를 태우고 계열사를 넘기는 것에 합의한 겁니까?”
“애초에 결론이 정해져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어차피 한 번은 겪고, 한 번은 풀어야 하는 일이었다.
혼사부터 시작해서 태성화학, 우광의 계열사, 그리고 일련의 과정에서 스며든 불신과 의심까지.
“이게 우광의 결론이에요.”
나는 심 사장의 손에 들린 쪽지를 조용히 거둬들였다.
“우광은 태성의 배후로 익명 후원자를 꼽았고, 같은 배를 얻어 타고 싶어 해요.”
나는 쪽지를 곱게 접어 동전 지갑에 쏙 넣었다.
“아무래도 우광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착각이라니요?”
심 사장의 말을 들어보니 알겠다.
“우광이 태성의 후원자로 넘겨짚은 위인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우후훗!”
이거 재밌군.
확실하게 짚이는 이유만 셋이나 된다.
“괘씸한데요? 역시 처음부터 일언지하에 딱 잘라 거절하길 잘했습니다.”
“전 우광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데요?”
“아니, 왜요? 꿍꿍이속이 따로 있다면서요? 자칫하다간 재수 없이 우리 태성까지 휘말려서 낭패 보는 수가 있습니다. 요즘 우광 상황이 어떤지 아시잖습니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우광그룹 지분 7%를 거저 얻을 흔치 않은 기회예요. 그럼 잡아야죠.”
“설마 고작 지분 7%에 혹해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겠다는······?”
“에이, 아니죠.”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광이 헛다리를 짚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요. 내가 나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할 필요도 없거든요.”
“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우광이 내게 목숨줄을 맡겼으니, 그 기대에 보답해주려고요. 간단하죠?”
“그게 어떻게 간단한 일입니까?”
심 사장은 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지금 정재계가 달려들어 우광을 씹어먹겠다고 저 난리가 났습니다. 청와대가 외면하고, 언론과 방송은 물론 국민들의 여론까지 등 돌린 참입니다.”
심 사장이 탄식하듯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로 우광은 회장이 물러났고, 계열사를 빼앗겼으며, 언론과 돈세탁할 계열사만 남아서 정부의 나팔수와 정치자금 세탁처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까요. 딱 좋잖아요.”
내가 써먹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다고.
“태성이 전면에 나서서 처리하기 귀찮은 일을 죄다 우광에게 떠넘기면 되겠던데요?”
“예?”
“정치도 혼자 하는 거 아니듯 사업도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요.”
심 사장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광이 살길을 터줄까 해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우광의 임원들은 물론 김 회장 부자조차 속수무책입니다만? 두 손 들고 백기 항복한 상태입니다만?”
“아직 우광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 정도면 숨 붙여주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우광은 계열사도 산뜻하게 내 품에 안겨줬고, 우광그룹 지분을 7%나 내놨다.
그에 비해 난 별거 아닌 수고만 감수하면 끝이다.
그까짓 것 쪽지 몇 장 쓰면 그만이거든.
“이대로 모른 척하면 어차피 우광그룹 지분 7%는 휴지 조각이에요.”
김대식이 내게 눈 딱 감고 피 같은 지분을 내어주겠단 결단을 내린 이유였다.
“하지만 구명줄 하나 내려주고 우광이 기사회생하면 태성에겐 든든한 우군이 생기는 거죠.”
독불장군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건 정치판뿐만이 아니었다.
숨구멍 틔워줄 계책 하나 던져주는 건 일도 아니다.
‘어차피 넘길 계열사, 내 호의를 사기 위해 선뜻 내어준 것이다. 몇십억 단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김대식, 마음에 든다.
‘통이 제법 커. 잔머리가 상당히 잘 굴리고. 제 살길도 잘 찾는단 말이야?’
김대식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재계 서열 9위 그룹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어려서부터 떠받들리며 오죽 곱게 자랐을 거야.
그런 사내가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대통령한테 무릎 꿇고 개처럼 기며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
그는 훗날 우광을 재계 서열 4위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거물급 인사였다.
‘난놈은 난놈이라니까.’
어차피 무너지고 있는 회사.
그걸 혼자 끌어안고 뒤로 재산을 빼돌리는 대신, 기꺼이 팔다리를 내어주고 동맹을 맺어 살길을 꾀한다.
이건 우광의 미래를 건 김대식의 도박이었다.
“우광에 연락하세요. 말씀하신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나는 동전 지갑을 주머니에 쏙 넣었다.
‘우광화학 화재로 우광은 세대교체를 끝냈다.’
김우광 회장이었으면 아마 얘기가 잘 안 통했을 터였다.
독선적이고 앞뒤가 다른 위인이라 여러모로 뒤가 구린 작자였거든.
‘우광의 황금기를 이끌었다는 김대식이 과거보다 20년 일찍 총수직에 올랐지.’
어쩌다 보니 20년 동안 우광의 골칫거리였던 중공업을 떼어냈다.
대신 우광의 핵심 주력 계열사만 남았다.
‘김대식이라면······ 어쩌면 제법 괜찮은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김대식은 감정보다는 이득을, 원한이나 자존심보다는 생존과 동맹을 우선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의 도박에 응해볼까 한다.
‘살려는 드릴게.’
믿는 구석도 있다.
우광그룹 지분 7%라면 아주 날카로운 칼이 될 터였다.
고작 7% 가지고 뭘 어떻게 판을 뒤집겠냐고?
모르는 소리!
언제는 우광그룹 지분이 1주라도 있어서 여기까지 끌어내릴 수 있었나?
칼은 누가 쥐어서 언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는 법이다.
‘다 죽어가는 놈 숨통 좀 틔워줬더니, 배은망덕하게 뒤통수칠 기미를 보인다면······ 그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뼛속까지 씹어먹으면 그만이지.’
난 머릿속으로 우광을 살려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우광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계산해 보았다.
‘좋은데? 어떻게 계산기 때려 봐도 이득뿐이잖아?’
역시 황금빛이 번쩍거릴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도련님, 우린 이만 사무실로 돌아갈까요?”
“으갹!”
심 사장은 날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붕 뜨자 놀란 나머지 난 심 사장의 넥타이를 동아줄처럼 잡았다.
“켁! 도련님, 커허헉!”
“앗, 죄송.”
재빨리 당겼던 넥타이를 놓아줬다.
유종태가 날 심 사장의 품에서 홱 빼냈다.
제 등 뒤에 날 숨긴 유종태가 살벌한 눈으로 심 사장을 노려보았다.
“목, 매달까요?”
갑자기?
“도련님을 놀라게 했잖습니까. 죽어도 쌉니다.”
이 친구, 청계산에 너무 자주 데려갔나?
“켁켁, 너무하십니다. 성준 도련님이 안아주셨을 땐 요렇게 목에 손 둘러주셨으면서.”
“우와, 방금 진짜 양심도 없는 발언.”
유종태는 심 사장을 철면피 보듯 바라봤다.
“언감생심 어떻게 아버님과 동급 대우를 받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기가 차네요.”
“크흐흠! 계열사 인수 계약서 여섯 부에 도장을 받아온 공을 생각하신다면 이 정도 포상은 바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도련님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은 주제에 유세는!”
유종태는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명심하십시오. 도련님의 충성 넘버투는 바로 저 유종탭니다! 심 사장님은 잘해봐야 넘버쓰리란 소리. 오케이?”
“넘버투가 누가 될지는 붙어봐야 아는 거 아닌가?”
심 사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련님, 이왕 우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으니 여차하면 협박하게 우광의 약점부터 닥치는 대로 파고드는 건 어떻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유종태가 흠칫했다.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대기업과 주요 인사들의 약점을 캐는 건 유종태와 경호 5팀의 임무였다.
심 사장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쭉 폈다.
“도련님, 계열사 인수에 관련된 사항도 유종태와 함께 처리하렵니까? 아니면 저?”
“심 사장님, 계열사가 여섯 개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넘버투라면 이 정도는 거뜬하게 해낼 수 있어야죠.”
오!
나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심 사장님, 최고!”
“으하하핫! 역시 저기 쓸모없는 유종태보다 제가 도련님의 최측근이 될 만하지요?”
심 사장은 거만한 눈으로 유종태를 보며 웃었고, 유종태는 부들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 팀장, 양심이란 게 있으면 넘버쓰리도 감지덕지인 줄 알게.”
심 사장은 보란 듯이 내 손을 잡았다.
“도련님, 사무실로 가실까요? 유 팀장, 뭐 하나? 당장 특히 정재계 거물들 뒷조사에 빠삭한 놈들부터 물색해서······.”
꼬르륵.
이런.
아침부터 시위대 사람들을 만나서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두 끼나 걸렀네.
“비상이다!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식당을! 어린이용 메뉴가 제공되는 곳을 물색해야겠군!”
심 사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광 쪽 식당은 잘 모르는데. 혹시 누구 맛집 리스트 가지고 있는 사람?”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유종태가 손을 들었다.
“요즘 제 취미가 바로 어린이용 메뉴로 특출난 맛집을 수소문해 놓는 겁니다.”
유 팀장이 웃었다.
“역시 제가 낫죠?”
* * *
불 꺼진 우광그룹 본사 회장실.
김우광 명예회장 혼자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테이블엔 빈 위스키 한 병과 술잔 두 개가 덩그러니 남았다.
김우광 명예회장은 두 손을 지팡이에 올린 채 말이 없었다.
“아버지.”
취재진을 상대하고 뒤늦게 회장실에 돌아온 김대식.
아들을 돌아보지 않고 김우광 명예회장이 입을 열었다.
“무슨 꿍꿍이냐?”
“아버지, 제가 일전에 태성의 익명 후원자에 대해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로 치밀하고 세련되며 집요할 만큼 섬세하게 설계된 판을 짜는 모략가라면, 전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거야 나 역시 동의한 바였다.”
“이만한 거물급 수완가가 난데없이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으음.”
“이건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도 이 정도 판을 혼자 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스케일부터가 범상치 않잖습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설마······.”
“예.”
김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세력이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김대식과 김우광.
부자는 진지했다.
“청와대. 각하께서 물밑에서 움직이신 겁니다.”
< 황금빛 제안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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