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39화 (139/189)

<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 >

김우광 명예회장은 길게 신음을 흘렸다.

“청와대가 움직였다?”

“아까 심 사장이 청와대 운운하면서 협박할 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김대식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만 돌리면 묻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요란법석하게 협박하는 걸까. 의아했거든요.”

김대식은 탄식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성과 척지는 것을 청와대의 행보를 방해할 생각으로 간주한다고 보는 것이라면? 이참에 숙청하겠다는 경고이자 명분이라면? 그러자 모든 의문이 풀리더군요.”

“태성과 척지는 것과 청와대 행보가 무슨 상관이라고.”

“모르시겠어요? 청와대와 태성은 이미 손을 잡은 지 오래일 겁니다.”

김대식은 대통령이 차 회장을 불러 나눴던 대화를 늘어놓았다.

-이왕 뛰어들기로 한 방산이라면 최선을 다해 봐. 밀어주지.

-태성이 땡잡았다 치지. 충심에 걸맞은 포상이 아닌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말이야. 뭘 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가?

김대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보십시오.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서실장까지 죄다 한패란 소립니다.”

“······젠장.”

김우광 명예회장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리 부탁했는데도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거군.”

입안이 꺼끌거렸다.

그건 김대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차일피일 미루면서 넘기기로 약속했던 계열사를 넘기지 않자, 각하께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보란 듯이 보여주신 겁니다. 우광화학 시위란 명분을 이용해서요.”

“정말 각하께서······. 후우.”

김우광 명예회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대식아, 넌 어제까지만 해도 익명의 후원자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었다.”

“최근 각하의 행보만큼이나 태성의 행보 또한 너무 수상합니다. 둘이, 동시에, 같은 목표를 정해서 몰이사냥에 나섰습니다.”

“우광.”

“예. 확실한 근거가 셋이나 됩니다.”

김대식은 한숨처럼 말했다.

“첫째, 태성은 뜬금없이 총수직 교체를 선언했습니다.”

“음. 확실히 그건 이상했지.”

“차태성 회장님은 여전히 건재하고, 큰아들을 편애해 경영권 승계를 준비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후계자 발표 대신 경영권 승계 다툼을 공표했다.”

“보십시오. 태성 또한 기업이 쪼개지기 직전입니다. 자식들이 저마다 특정 계열사를 휘어잡고 있잖습니까.”

“확실히. 외압이 있지 않고서야.”

“청와대가 아니고서야 누가 차 회장님께 그만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김우광 명예회장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둘째, 태성은 대선 자금을 자발적으로 상납했습니다.”

“이 또한 태성의 익명 후원자의 뜻이었겠고.”

김우광 명예회장은 턱을 쓸었다.

“그렇다고 태성의 익명 후원자를 각하라고 확신하기엔 근거가 조금 빈약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이유가 남았습니다. 셋째, 각하께서 태성에 약속했던 우광의 계열사는 태성이 아니라 JH투자회사에 넘어갔습니다.”

“뭐?”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차태성이 그걸 받아들일 리가······.”

“태성은 심 사장까지 순순히 내놓았던 모양입니다.”

“심 사장은 태성이의 심복이자 최측근이야!”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면 자식이라도 넘겨야 할 때가 아닙니까. 우리 우광도 생존을 위해 결단을 내렸는데, 태성이라고 다를까요?”

김대식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여섯 부의 인수 합병 계약서를 펼쳤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우광의 계열사 지분을 가져가는 곳이 어디인지.”

과연 ‘JH투자회사 사장’이란 직위 옆에 심 사장의 이름이 서명날인되어 있었다.

김우광 명예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아낀다던 심 사장은 물론 우광의 계열사 여섯 곳이나 내놓았다는 건······.”

“덕분에 태성은 팔다리는 멀쩡히 붙게 되었잖습니까.”

“인제 보니 총수직을 내건 경영권 싸움이란 건 결국 태성을 쪼갤 명분이다?”

“예. 각하의 뜻인 거지요.”

김우광 회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최근 여의도에서 떠도는 루머가 있었습니다.”

“숙청당했던 옛 태성건설 임원들이 미친 듯이 영업을 따내고 있다는 투자회사에 관한 소문 말이냐?”

“아까 협상 대표단으로 둔갑해서 회의장에 들어왔더군요. JH투자회사 임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설마 태성건설 임원들이 한꺼번에 숙청당한 이유가······.”

“예. 각하의 수족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겠죠.”

김대식은 말했다.

“태성에도 자동차, 중장비, 병원이 있습니다. 같은 종목 사업이 들어온다면 인수합병하는 게 상식 아닙니까?”

“하지만 태성은 그 모든 것을 JH투자회사에 넘겼지.”

겉으로 포장을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속사정은 그랬다.

그건 인수 합병 계약서에 사인을 한 우광의 회장만이 알았다.

“심 사장이 입단속을 시키더군요. 가운뎃손가락까지 들어 올리면서 까불지 말라고.”

심 사장이 감히 그럴 주제가 되는가.

그건 그만큼 배후가 든든하다는 뜻이었다.

“각하를 등에 업고 날뛴 것이군.”

“정황 증거가 이리 뚜렷합니다.”

“태성이도 결국······.”

“예, 조만간 총수직을 사퇴하겠노라 공언한 이유라면 뻔하죠. 아버지를 총수직에서 끌어내린 까닭과 같을 겁니다.”

“휘두르기에 너무 뻣뻣해서.”

김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는 지금 물밑에서 움직여서 재계를 뒤흔들고 손아귀에 움켜쥘 작정이십니다.”

“재벌 길들이기.”

“그보다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각하께서 제 앞에서 대놓고 언질을 주셨습니다.”

김대식은 당시 대통령이 했던 경고를 덧붙였다.

-착각하지 마라. 재계 서열 1위부터 9위까지 모조리 무너뜨려도 대한민국이 무너질 일은 없어.

-조각조각 잘라다가 다른 놈들 입에 넣어주면 그만이지. 대한민국에 기업이 우광 하나뿐인 줄 알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믿기지 않는군. 정말 각하께서 대한민국 재벌 그룹들을 쪼갤 생각을······. 태성과 우광이 겪은 것이 전부······.”

“각하의 주특기잖습니까. 군부에 왜 굳이 오성회를 만들어 박았겠습니까?”

김우광은 무의식적으로 위스키병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미 위스키병은 텅 비어버린 후.

아들이 어느새 새 위스키병을 따서 아버지 잔에 따랐다.

“각하께서는 이미 군부와 행정부를 확실하게 장악하셨습니다.”

꼴꼴꼴꼴.

“이젠 민간 사기업으로 눈을 돌리신 겁니다. 군사정을 한 손에 쥔 완벽한 독재국가를 꿈꾸는 거지요.”

“······!”

벌컥벌컥벌컥벌컥!

얼마나 속이 탔는지.

김우광 명예회장은 위스키 한 잔을 냉수처럼 급하게 마셨다.

그럼에도 타는 속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각하의 뜻대로 본격적인 기업사냥이 시작된다면······.”

“예. 본보기가 된 우광만 우스워지는 거죠. 다른 재벌그룹 회장들은 겁을 덜컥 집어먹고 백기 투항을 할 테니까요.”

팔다리 멀쩡하게 달려 있는 재벌그룹과 달리 우광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정부의 나팔수, 정치자금 세탁처. 우광이 맡은 역할을 온전한 다른 재벌그룹은 더 잘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하······!”

“그래서 두말 않고 사인한 겁니다.”

쪽지에 개소리를 적어가면서 무조건 항복한 진짜 이유였다.

“청와대 신년 오찬에서 각하께서 대놓고 못 박았던 게 있습니다.”

-헐값에 가져가란 뜻은 알 테고.

-무엇으로 드립니까?

-주식으로.

“그래서 우광 또한 지주그룹 주식으로 넉넉히 챙겨드린 겁니다.”

“무려 7%나 말이지.”

“성의 표시치고는 검소한 금액이죠.”

“검소······ 빌어먹을.”

“각하께서 대놓고 요구하셨다면 50%를 상납한다고 성에나 차셨을 것 같습니까?”

“으음.”

“각하의 뜻을 함께하겠다는 충성의 맹세와도 같기에. 적당히 눈감아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광의 미래를 건 도박이었다.

김대식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우광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대식아, 차라리 청와대에 찾아가서 우광의 주식 7%를 던지지 그랬냐?”

“일부러 익명의 탈을 뒤집어쓰셨습니다. 굳이 찾아가 정체를 까발리겠다는 건 죽여달란 소리 아닙니까?”

“각하라면 모른 척 눈감아 주실지도.”

“지금이야말로 우광의 충성을 증명하기 가장 유리한 때가 아닙니까. 각하의 장단에 기꺼이 맞춰드려야지요. 태성처럼.”

어차피 굽힐 거라면 빨리 굽히는 게 낫고.

어차피 합류할 거라면 공을 세우는 게 낫다.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과감하게, 누구보다 철저하게! 각하의 뜻을 받들어 신임과 총애를 얻어낼 겁니다.”

벌컥벌컥.

김대식도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태풍에 휘말리는 걸 피할 수 없다면, 든든한 배를 얻어타고 출항하는 게 최선입니다. 전 여기에 우광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 이건 기회입니다. 익명의 후원자가 두 달 만에 태성을 어떻게 끌어올렸는지 아버지께서도 보셨잖습니까.”

김대식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태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우광도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또 압니까? 우광도 태성처럼 순풍에 돛단 듯 승승장구하게 될지.”

“으음. 확실히.”

“누가 이번 기수의 브레인이 되었는지 몰라도 대단한 솜씨가 아닙니까. 이참에 우광도 그 덕 좀 같이 볼까 합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예요.”

“좋다. 나 또한 뒤에서 전력으로 널 서포트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회장실 전화가 울렸다.

김대식은 책상 위에 올린 전화기를 들었다.

심 사장이었다.

-태성의 후원자께서 우광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날······.”

-사흘 후 저녁 8시. 성북동 청원각 후원 별채 여심당에서 뵙죠.

군사정권 시절은 소위 ‘요정 정치’라고 불리곤 했다.

특히 3대 요정은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 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됐는데, 그중에서도 성북동 청원각은 대통령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라 알려져 있었다.

* * *

“우후훗!”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수확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식에게 보낼 쪽지엔 뭘 적으면 좋을까. 이참에 청와대의 골칫거리이자, 김대식이 그간 골머리를 썩였던 코라이 게이트부터 해결해줘?’

우광의 김대식이 왜 툭하면 외국으로 나가 오래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공식적인 명분은 ‘우강철강으로 인한 적자를 충당하기 위한 외국 차관 도입’을 위해서였다.

‘나는 김대식이 미국에서 체류하던 진짜 이유를 알고 있지.’

바로 코라이 게이트 때문이다.

‘로비스트 후원으로 우광도 코라이 게이트에 단단히 얽혀 있으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여간에 우광, 여기저기 뇌물 먹이는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대통령이 우광건설 뇌물 장부에 괜히 발끈한 게 아니다.

그렇게 안팎으로 드러나지 말아야 할 로비가 들통났으니, 괘씸죄로 박살 낼 만큼 진노할 수밖에.

‘듣자 하니 우광이 미국 쪽 유통 루트를 그렇게 잘 뚫어놨다며. 합법 루트와 불법 루트를 가리지 않고 줄줄줄, 뻥뻥뻥. 나도 거기에 밥숟가락 한번 얹어 봐?’

우광의 후계자가 직접 만나 뇌물을 건넬 정도면, 어디 보통 인물들이겠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우광의 해외 뇌물 장부, 솔직히 탐나긴 한다.’

석유왕부터 세계 최고의 마약상과 무기밀매상은 물론 은행권과 의회, 행정부와 군부도 줄줄이 엮여 나올 터였다.

‘하지만 우광이 미쳤다고 그걸 나한테 곱게 내놓겠어. 꿈 깨자.’

아쉽다.

‘잠깐, 다른 것도 아니고 코라이 게이트에 얽힌 로비스트들이라면······ 우광이 뿌린 해외 뇌물 장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잖아?’

솔깃했다.

코라이 게이트 로비스트들의 목표는 셋.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고, 미국을 향한 공산권 접근을 억제하며, 한국 내 인권문제 제기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코라이 게이트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피 많이 봤다던데.’

한국 정부와 미국 행정부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된 것은 물론 꼬리를 자른답시고 국내 최고의 로비스트들이 떼거지로 죽여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코라이 게이트 이후 한국은 일본의 로비에 번번이 밀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지?’

나는 턱을 쓸었다.

‘난 코라이 게이트의 연결 고리가 누구인지 아는데. 그것만 떼어내면 그만인 거 아냐?’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코라이 게이트는 단 하루 만에 미국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스캔들로 발전했다.

연루된 미국 상, 하원 의원들만 115명.

덕분에 미국이 발칵 뒤집혀서 CIA, FBI, NSA와 미국 법무부 및 국무부가 총동원되어 코라이 게이트 관련자들을 철저하게 수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가 열렸다.

‘좋아. 김대식에게 보낼 쪽지 중 하나는 이것으로 정했다.’

코라이 게이트만 해결된다면 아마 대통령이 제일 먼저 기뻐 날뛸 것 같은데?

우광과 로비스트들에게 각각 두둑하게 뜯어내는 건 덤일 테고.

이건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였다.

‘철구 아저씨를 만나러 가야겠는데?’

<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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