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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42화 (142/189)

< 인왕산 선녀보살 (2) >

인왕산.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고도 338.2m의 바위산이었다.

‘예로부터 영험한 곳으로 손에 꼽히던 산이긴 했었지.’

등산이나 지형보다는 역사와 문화 쪽으로 더 유명한 산이랄까.

인왕사 선바위는 조선 초기 불교와 유교 간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중요한 유물로,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의 첨예한 갈등의 중심지였다.

구한말 택견꾼들이 마지막까지 수련했던 곳이라 택견의 성지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걔네 집은 대대로 백호를 모신다고 했었나?’

경복궁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것 기준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꼽을 수 있었는데.

인왕산은 그중에서도 우백호를 담당하는 산이었다.

“어? 기사님, 인왕산 선녀보살이라면서요? 인왕산은 저쪽 방향인데요?”

“아, 인왕산 수호신을 모셔서 인왕산 선녀보살이라 불리시는 거지, 저택은 삼청동에 있습니다.”

“삼청동이요?”

“상당히 유명한 곳인데요. 도련님께선 아직 못 들어보셨나 봅니다.”

미신도 안 믿는데, 내가 유명한 무당집을 굳이 알아둬서 뭐 하게?

하지만 삼청동이라고 하면 문득 떠오르는 무당집이 하나 있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운전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삼청동은 대한민국 정치의 1번지잖습니까. 청와대에서도 가깝고, 근처에 군부대도 위치하고 있고, 국군보안사령부도 지근거리니까 굵직한 인사들이 많이들 찾아오시죠.”

이 시대의 삼청동 역시 알아주는 부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내가 잠시 옛 생각에 잠긴 동안 차는 유유히 삼청동 골목으로 진입했다.

“이거 어째 오늘은 주차 자리 하나 안 나올 것 같은데요? 꽉 찼습니다.”

주차장은 약 50여 대가 주차할 수 있을 만큼 넓었는데도, 즐비한 고급 세단과 지프차로 가득했다.

운전기사는 핸들을 돌리면서 혀를 찼다.

“주차장에서 대기하는 얼굴들을 제가 좀 압니다만, 오늘 쟁쟁한 인사들이 많이도 오셨나 봅니다.”

할머니가 눈을 반짝였다.

“쟁쟁한 위인? 누구 아는 사람 봤어?”

“군 간부용 지프차도 그렇고, 국회의원 보좌관과 국무총리 쪽 운전기사, 헌법재판소, 외교부, 국군서울병원, 감사원 사람들도 간간이 보이네요.”

“흥, 미리미리 줄 댈 속셈으로 일찍부터 떼거지로 몰려왔나 봐? 어쩐지 예약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더라니.”

할머니는 툴툴댔다.

‘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일 줄은.’

불안한 예감은 왜 빗나가질 않나.

이곳은 나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인왕산 백발마녀의 집이었으니까.

‘인왕산 백발마녀와 인왕산 선녀보살. 어째 별명 앞에 인왕산이 똑같이 붙더라니.’

과거의 옛 기억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인왕산 쪽으로는 오줌도 보지 않겠노라 말하며 돌아서던 때도 있었는데.’

그것도 다 오래전 옛일이 되었다.

어, 아닌가?

지금 내 나이가 여덟 살이니, 꽤나 먼 미래라고 해야 할까.

아니지. 애초에 그런 인연은 처음부터 안 만들면 그만이잖아?

그럼 난 모르는 일인 것으로.

끼익.

“정혁아, 가자.”

“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차에서 내려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무려 11미터에 달하는 성벽 같은 조약돌벽이 나왔다.

내 기억과 조금 다른 가로등이 붙어 있었지만, 벽 위로도 보이는 거대한 성황당 나무는 예전 그대로였다.

‘깜짝이야. 무슨 귀신이 이렇게 바글바글 모여 있어?’

한눈에 봐도 한남동 우리 집보다도 많다.

기가 질릴 정도로 많은 망령들이 돌벽에 달라붙거나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하나같이 서럽게 흐느끼는 표정이었다.

‘몰랐네. 여긴 옛날에도 이랬었나?’

[아마도. 무당집이니까.]

어느새 스르륵 나타난 저승사자가 뒷짐을 진 채 나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올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더라니.’

[무당 외에 딱히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한 많은 귀신들이 몰려들어서 그렇다.]

‘이거 괜찮은 거야?’

[무엇이?]

‘한남동 우리 집만 해도 귀신 등쌀에 시달린 사람들이 비명횡사, 패가망신해서 나가떨어졌다며.’

[귀신 소굴과 무당집이 같을 리 있나.]

저승사자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조약돌벽 위에 1미터 간격으로 놓인 호랑이 조각상이었다.

[저놈이 저기서 떡 버티고 지키고 있는 한, 허락받지 못한 귀신은 이 집 안으로는 발도 못 붙일 터.]

과연 저승사자의 말대로였다.

귀신들은 하염없이 집 주변만 맴돌 뿐, 성벽을 넘지 못했다.

팅! 팅티티팅! 팅!

안으로 돌진하려고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니까.

‘그럼 저건 뭔데?’

내가 가리킨 사람은 마침 대문 안으로 들어선 유명한 국회의원이었다.

‘저 사람 어깨에 붙은 귀신은 집 안으로 잘만 들어가는데?’

[구천을 떠도는 잡귀랑 사람에게 들러붙은 원귀는 또 다르지.]

원귀?

[무당집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면, 무당이 원귀를 어찌 알고 떼어내겠나?]

아, 그런가?

몰랐네.

내가 미신이란 걸 믿어봤어야 뭘 알지.

[쯧쯧, 그깟 돈과 권력이 뭐라고. 참으로 더러운 짓을 많이도 했구나.]

저승사자는 뒷짐을 지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훗날 이 모든 일이 전부 업보로 돌아오는 줄도 모르고. 내세에 받을 천벌 또한 제법 무거울 것이다.]

펄럭!

저승사자가 도포 자락을 떨치며 성큼성큼 앞장섰다.

[들어가자.]

저승사자는 튕기지도 않고 멀쩡하게 대문을 넘었다.

아까랑 말이 좀 다른데?

‘넌 원귀도 아닌데 쉽게 들어가네? 미리 허락받았나 봐?’

[허락? 이승과 저승을 통틀어 본 차사가 못 갈 곳이 있으랴.]

저승사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마침 대문 문지기와 대화를 끝낸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정혁아, 들어가자.”

“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무당집 문지방을 넘었다.

‘진짜 유명인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군.’

2선 국회의원, 3선 국회의원의 처, 재벌가 사모님은 물론 제복을 입은 군 장성도 보인다.

많기도 하다.

“진짜 용하더라고요. 어떻게 자리에 앉자마자 딱딱 맞출까요?”

“국운까지 점치는 국내 최고의 무당이라지 않습니까. 복채가 아깝지 않더라고요.”

“전 한 마디도 안 꺼냈는데도 쫓겨났습니다. 그건 안 될 일이니, 패가망신하기 싫으면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번에 크게 투자해보려다가 접었습니다.”

“당장 내년부터 내리 3년간 나라가 발칵 뒤집힐 테니, 한시라도 빨리 광주 본가를 옮기라는 건 무슨 뜻인지······. 어렵네요. 정리할 게 많은데.”

정재계 유명인사들이 모여서 수군대고 있었다.

‘이게 다 무당집에 점 보러 온 사람들이란 말이지?’

대선과 총선만 앞두면 용하다는 점집 앞에 줄이 끊이질 않는다더니.

마침 뜻밖의 인물이 무당집 툇마루를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중정부장까지 왔다고?’

대한민국 권력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 나타나자,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제 보니 저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느라 돌아가지도 않고 여기서 죽치고 있었구만.’

그러니 주차장이 꽉 차서 자리가 없지!

중정부장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중정부장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잔하실까요?”

“안 그래도 조만간 연락 한번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보좌관더러 두둑한 성의를 준비하라 은행에 보냈으니, 저와 잠시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시렵니까?”

“여당의원 백영탭니다. 오늘 밤 청원각에서 비밀 회동이 있는데, 중정부장께서 합석만 해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고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다들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벼대었다.

“중정부장님은 무엇이 궁금해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역시 대선과 총선 때문에? 아니면 국가 중대사 때문에?”

“애국하는 마음으로 각하의 앞날을 대신 여쭤보러 오신 것은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저 또한 두둑한 충심으로 한 손 보탤 의향이 있습니다만. 허허허.”

중정부장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둘러싸고 시끄럽게 쫑알대던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

중정부장이 몸을 돌리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그중에는 부티 나는 사모님들도 한가득이었다.

덕분에 이쪽까지 일직선으로 훤히 뚫린 시야.

사모님들이 할머니를 알아보고 작게 손을 들어 아는 척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우리 차례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를 떨치면서 크게 외쳤다.

[이리 오너라!]

저승사자가 떨친 소매에서 시작된 광풍이 우르르 떨렸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풍압이었다.

저승사자가 허공에서 손아귀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자,

[크어헝! 케헤헥!]

저택 안쪽에서 목이 졸린 듯한 호랑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파파팍!

저쪽에서부터 집채만 한 투명한 백호가 엄청난 속도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자니, 호랑이가 앞발을 허우적대는 것이 목줄이 당겨져 질질 끌려오는 것 같았다.

쾅! 콰콰쾅!

백호는 농구공처럼 땅바닥에 요란하게 부딪히며 마구 튕겼다.

콰콰콰콰콱!

그러다 저승사자의 발치에 대가리를 처박으며 간신히 멈춰설 수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만신창이 신세였다.

순간 눈을 번쩍 뜬 백호의 눈빛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했지만, 저승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한 양으로 돌변하여 바로 꼬리를 말고 눈을 내려깔았다.

[크허헝, 차사님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로 납시었습니까?]

[본 차사가 네놈에게 방문 용건을 고하며 양해를 구해야 하는가?]

[그, 그럴 리가요! 혹여 절 잡으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백호는 울먹이며 납작 엎드렸다.

[억울합니다! 저는 그저 천기가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귀띔을······.]

[본 차사가 네놈의 변명까지 일일이 들어줘야 하나?]

[크, 크흐흐흥.]

백호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저승사자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꼬리는 가랑이 사이로 말렸고, 흉흉한 발톱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희고 검은 얼룩무늬 털은 죄다 곤두서서 파르르 떨렸다.

[앞장서라. 용건은 안에 들어가서 논할 테니.]

[······!]

백호가 경악한 눈으로 입을 떡 벌렸다.

길고 굵은 송곳니가 쩍 드러나고, 목젖이 요란하게 떨렸다.

[비, 비상! 비사아아아앙! 크허허허허허허헝! 지금 당장 튀어나와 차사님을 융숭하게 맞이하지 못할까!]

백호가 비명처럼 울부짖자,

땡땡땡땡땡땡땡땡!

저택 안쪽에서 미친 듯이 다급하게 치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벌컥!

한복을 차려입은 60대 여자가 한지를 바른 장지문을 열었다.

“아이고오오오오!”

그녀가 눈썹을 휘날리며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헐레벌떡 뛸 때마다 한 손에 든 무당방울은 요란하게 딸랑딸랑 울어댔고, 다른 손에 든 오방색 깃발은 펄럭펄럭 나부꼈다.

마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인왕산 선녀보살께서 버선발로 달려오다니!”

“역시 중정부장님 때문인가?”

“국운이 걸린 중요한 일에 관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라도 있나 보지?”

중정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인왕산 선녀보살은 중정부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쌩하니 지나쳐 달려왔다.

“어찌 이처럼 귀한 분이 누추한 이곳까지 친히 발걸음을 옮기셨나이까!”

철푸덕!

인왕산 선녀보살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땅바닥에 대었다.

그 옆에서 같은 자세로 떨고 있는 백호처럼.

내 앞에서.

“······!”

정적이었다.

수군대는 말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중정부장과 인왕산 선녀보살, 그리고 할머니와 내 쪽을 번갈아 보며 경악을 숨기지 않았다.

“차, 차사께옵서는 부, 부디······.”

[닥쳐라. 네년이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다.]

“커헉!”

저승사자가 차갑게 일갈하자, 인왕산 선녀보살은 숨넘어갈 듯 딸꾹질을 시작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인왕산 선녀보살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파들파들 떨어댔다.

그 모습을 보고 마당을 가득 채운 정재계 유명인사들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본 차사는 시간 낭비할 생각 없다. 알아서 모셔라.]

저승사자가 가리킨 건 나였다.

집채만 한 투명 백호와 인왕산 선녀보살이 고개를 발딱 들어 찢어질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본 차사가 수호하는 귀인이니라.]

[크허헝어어억!]

“귀인이 납시셨다! 무녀들은 당장 바닥에 무명천 깔아라! 화동은 무엇 하나! 가시는 걸음마다 꽃잎을 뿌리지 않고!”

인왕산 선녀보살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원 달려나와 풍악을 울리고 툇마루마다 오방기를 올려라! 융숭히 맞이해야 할 것이다!”

아니, 이렇게까지 요란할 일인가?

저승사자는 몹시 뿌듯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반짝반짝한 눈빛이 심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엄지 안 들어줘?]

< 인왕산 선녀보살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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