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액막이 무녀 (2) >
불 꺼진 집 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이어지는 앓는 소리와 속으로 삼키는 울먹임.
기시감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덮쳤다.
-흐윽···, 흐으으윽······.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만 채 숨죽여 떨던 여자.
성큼성큼 걸어가 이부자리 앞에 쭈그려 앉으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내 이러고 있었어?
흠칫.
동그랗게 말았던 몸이 그제야 사르르 펴지고.
꽁꽁 끌어맸던 이불이 가녀린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 젖은 눈망울이 몇 번 깜빡이면서 눈물을 떨궈내면, 말갛고 까만 눈동자엔 이내 반가움과 기쁨이 달콤하게 번져나갔다.
그녀의 눈동자엔 내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밥도 안 먹었으니 약도 안 먹었겠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와 콧잔등.
투명하도록 창백하던 피부에 달라붙은 몇 가닥의 긴 머리카락.
얼마나 깨물었는지 피가 번진 붉디붉은 입술이 눈에 아리도록 박혔다.
내가 엄지로 피 번진 입술을 스치듯이 쓸어내리면 그녀는 작게 콧등을 찡그리곤 했었다.
-왜 미련하게 이러고 있어. 병원 가자.
-으으응.
-아픈 건 참는 거 아니야. 약 먹자. 밥도 먹고.
-으으응.
그녀는 늘 고개를 젓곤 했었다.
실어증과 기억상실증.
병원에서는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생각나는 게 없어서 돌아갈 곳도 없어져버린 여자.
나 때문이었다.
-맨날 아니라고 하지, 넌.
-으으응.
-약도 안 먹겠다, 병원에도 안 가겠다. 어쩌려고 그래?
가만히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순하게 눈을 감고 배시시 웃는다.
쌔액쌔액 헐떡이는 숨소리는 여전한데도.
항상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여자.
-병원비 때문에 그래?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니까.
-으으응.
-나 못 믿어? 너 하나 책임질 정도는 돼.
어쩔 수 없지.
-못 걷겠으면 업혀. 병원 문 닫기 전에.
-으으응.
-싫단 소리는 그만하고.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
가느다란 팔이 살며시 목을 끌어안았다.
달콤한 체향과 뜨거운 살결.
맞닿은 가슴이 숨을 몰아쉴 때마다 오르내렸다.
-넌 왜 병원 가잔 말만 하면 그렇게 싫······.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로 내 입을 틀어막는 여자였다.
-으으응.
적극적으로 몸을 붙여오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홀린 듯이 끌어안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첫사랑, 첫여자,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덜컹!
부적을 잔뜩 바른 장지문이 크게 흔들렸다.
갑자기 툭 끊어진 금줄이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 바람에 창호지에 붙였던 부적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금줄에 매어뒀던 무당방울이 작게 딸랑거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쓸데없는 잡생각은 머리를 털어내는 것으로 떨쳐냈다.
‘어이, 수호신. 그럼 나 먼저 간다.’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저승사자는 잘 가란 인사도 건네지 않고, 동그랗게 말린 이불에만 집중했다.
[괘씸한지고. 본 차사가 납시었는데 내다보지도 않을 셈이냐?]
“흐, 흐윽!”
[아직 그릇이 여물지 않아서 본 차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나 보구나.]
덜덜덜덜.
[얼굴을 보여라.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저승사자가 가볍게 손짓하자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딱.
시야 공유를 단칼에 끊어냈다.
등 뒤에서 저승사자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괜찮겠나?]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그래서 나는 보란 듯이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뒤돌아볼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지독한 악연은 한 번으로 족하다.
[금줄이 끊어졌는데도?]
‘내가 끊은 거 아니잖아. 난 손가락 하나 댄 적 없어.’
누명도 신경 안 쓴다.
시시비비를 가린다며 실랑이로 엮이는 것도 사양이다.
‘금줄 따위 뭐 얼마나 한다고. 정 꼬우면 청구서 보내라고 해.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곧 잡귀 떼가 몰려올 텐데. 괜찮겠냐고.]
‘그래 봐야 남의 집 잡귀, 하나도 안 무섭거든?’
잡귀가 날뛰어 봤자지.
육신도 없는 것들이 산 사람을 어찌 휘두른다고.
난 지난 생에서도 잡귀 따윈 모르고 살았다.
[너 말고 이 아이 말이다. 액막이 무녀.]
저승사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난 미신 따윈 안 믿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당집이고 액막이고 내 알 바 아니라고 했어.’
[곧 잡귀들이 몰려올 것이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무당집 일이니 집주인인 무당이 알아서 하겠지.’
[결계는 박살 났고, 백호는 신당에 붙들려 있지. 아무런 준비 없이 잡귀가 떼 지어 쳐들어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미신 따윈 모른다니까.’
저승사자가 혀를 찼다.
[그때까지 어린 몸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반사적으로 신경질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잡귀 쫓는 건 네 전문이지, 내 전문이 아니잖아.’
[난 인간사에는 관여치 않는다.]
저승사자의 어투는 얄미울 만큼 느긋했다.
‘그럼 한남동 우리 집 귀신들은 왜 쫓아낸 건데?’
[그야 난 네 수호신이니까. 네게 몰려드는 잡것들을 어찌 가만히 두고 보랴.]
저승사자는 혀를 찼다.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은 놈들이 벌써 새카맣게도 몰려왔구나.]
어마어마한 숫자의 망령들이 벽과 창문을 통과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 갔다.
콰당탕탕!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부적으로 도배한 장지문이 요란하게 뒤로 넘어갔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끊어진 금줄은 맥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수챗구멍에 물이 회오리치며 빨려들듯이 순식간에 귀신들이 방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으윽! 흐윽!”
어린 여자애가 비명을 질렀다.
“우읍! 우엑!”
뒷골목에서 지긋지긋하게 맡아왔던 피 냄새였다.
[피를 보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횡액을 고스란히 뒤집어썼으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피할 수 없을 터.]
‘그런 걸 왜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는 건데?’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네가 언제부터 이런 걸 신경 썼다고!
저승사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뜻하지 않게 맞이하게 된 귀인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횡액이 되기도 하지.]
숨이 턱 막혔다.
‘나 때문이라는 소리야?’
저승사자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나지막한 탄식은 다른 이를 향했다.
[어쩌겠느냐. 타고난 팔자가 이런 것을.]
“으흐흐흑! 아, 아파···! 너무 아파요······. 쿨럭!”
왈칵 토하는 소리에 섬칫했다.
피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젠장!’
이를 악물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짜증과 불쾌감이 치솟았다.
쿠당탕탕!
나는 넘어진 장지문을 뛰어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새카맣게 몰려온 귀신들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러대며 어린애를 공격하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어린애의 발치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뇌물을 그렇게 처먹었으면 뭐라도 뱉는 게 있어야지! 이 꼴을 그냥 두고 봐?’
[남의 일에 뭘 그리 성을 내느냐?]
와락!
경련하듯 덜덜 떨던 작은 몸을 이불째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작은 뒤통수를 감싸안으며 단단히 붙들었다.
“울지 마.”
허공에 빼곡하게 채운 잡귀들과 눈이 마주쳤다.
방 안 가득 들어찼던 귀신들이 이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군침을 뚝뚝 흘리며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러댔다.
나는 지지 않고 노려봤다.
‘어이, 수호신. 이것들이 자꾸 나한테 달려드는데.’
날카로운 귀신 이빨과 손톱 따위로 아무리 할퀴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럴 때마다 크게 움찔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쪽은 다른 듯싶지만.
‘계속 그렇게 나 몰라라 할 거야? 내가 공격받고 있는데도?’
[그건 안 될 말이지.]
저승사자가 도포 자락을 떨쳐내며 발을 크게 굴렀다.
[무엄한 것들!]
쿵!
저승사자의 발이 닿는 곳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공기가 터져나갔다.
악다구니를 쓰며 여자애를 할퀴던 잡귀들이 순식간에 펑펑펑 튕겨나갔다.
[끄아아악!]
[끼에에엑!]
[아아아악!]
저승사자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내딛자, 귀신들이 홍해처럼 갈라져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여기 있는 귀인은 본 차사가 수호하는 이라는 것을 몰랐더냐!]
덜덜덜덜.
[감히 본 차사 앞에서 해하려 들었단 말이냐?]
그토록 악의로 번들대던 눈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가득 담겼다.
저승사자는 커다란 소매를 떨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꺼져라!]
콰드득! 콰직!
저승사자의 가벼운 손짓에 귀신들이 우그러졌다.
[히이이익!]
[키에에엑!]
저승사자가 성큼성큼 걸어가며 소매를 흔들 때마다.
몰려들었던 귀신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흐느끼며 떨던 여자애가 흠칫했다.
“으으응?”
한눈에 봐도 오밀조밀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인형처럼 예쁜 어린 여자애였다.
크면 대단한 미인이 될 것 같은······.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얼굴과 겹쳐 보여서 나도 흠칫했다.
“후아아아······.”
꼬마애는 신기한 듯 길게 숨을 내쉬며 어리둥절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안 아파······. 와아, 신기해······.”
흰 무녀복 소매로 코와 입가의 피를 야무지게 슥슥 닦아냈다.
그래 봤자 얼굴에 다 번졌지만.
“근데 넌 누구야?”
“지나가던 사람. 모르는 사람. 알 필요 없는 사람.”
“엄청 반짝반짝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자세히 보려고 한다.
“너무 눈부셔서 잘 안 보여······.”
“보지 마.”
나는 그 애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그만 얼굴을 내 어깨 너머로 밀어넣으며 꽉 끌어안았다.
“어디로 가면 돼? 여기 말고 안전한 곳.”
“신당······.”
“데려다줄게. 꽉 잡아.”
다리에 힘을 주고 단번에 일어섰다.
발까지 달랑 들리는 가벼운 몸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쓸 수밖에 없었다.
“너 왜 이렇게 짧고 쪼끄매?”
“아니야.”
“밥 잘 안 챙겨먹지?”
“아니야.”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 가.”
“아니야.”
“또, 또, 또.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아니래. 습관이야?”
“아니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 몇 살이야?”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내 또래치고는 너무 작다.
왠지 내가 알고 있던 나이와 차이가 나는 기분이······.
‘분명히 나한테는 스물둘이라고······.’
말을 못 해서 손가락으로 가르쳐 준 나이였다.
기억상실이란 진단명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더니.
그녀는 눈 딱 감고 몇 번이나 양손으로 만든 브이 자를 들이밀면서 제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했었다.
결국 믿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그러니까 발육 상태가······ 크흠!
그렇게 동갑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일곱, 아홉, 다섯, 넷······.”
조그만 두 손을 펼쳐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센다.
손가락 열 개를 쭉 펴놓았다.
“나 다섯 살. 아니, 네 살······.”
“······.”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해?
진짜로 네 살 혹은 다섯 살이라면······.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지. 아니고말고!’
그래서 물어봤다.
“혹시 언니 있어?”
“응.”
“······이쁘냐?”
“엄청엄청엄청엄청 이뻐. 이마아아아안큼 이뻐.”
“······몇 살인데?”
“여덟 살.”
동갑!
빙고!
‘역시 언니 쪽이었나 보군.’
콱 막혔던 체증이 시원하게 쑥 내려갔다.
꼬마애는 배시시 웃으면서 열심히 꼽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양손에 브이 두 개.
“······.”
나는 꼬마애를 신당 앞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 * *
다음 날,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띵동띵동띵동띵동!
무심코 대문을 열어줬다가 낭패를 봤다.
“네가 왜 여기 와 있어?”
“와아, 오늘도 역시 엄청 반짝반짝······.”
아침부터 무녀복을 입고 찾아온 꼬마 손님 때문이었다.
“가라.”
나는 미련 없이 대문을 닫았다.
“액막이 해야 되는데······.”
문득 인왕산 선녀보살의 말이 떠올랐다.
-태성가에 열린 살문(殺門)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죠? 아드님 내외 사주 다시 보고, 액막이 고려해볼게요.
-그 일은 회장 사모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요.
설마 부모님이 걸린 일인가?
나는 대문을 슬쩍 열고 고개만 내밀어서 꼬마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쪽에 차를 대고 올라오는 한복 입은 중년의 여자가 한 명 보일 뿐이었다.
“혹시 언니랑 같이 온 건 아니지?”
그럼 바로 튀어야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튄다.
“어제 오빠가 구해줘서······ 이거 할머니 선물이에요. 고맙습니다.”
꼬마애가 꾸벅 배꼽 인사하면서 한지 서찰을 내밀었다.
황금빛이 폭죽처럼 요란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 액막이 무녀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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