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46화 (146/189)

< 액막이 무녀 (3) >

“우리 언니? 저기.”

식겁해서 꼬마애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눈 비비고 다시 봐도 한복 차림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년 아줌마밖에 안 보인다.

‘설마······.’

그래서 물었다.

“언니가 몇 살이라고?”

“여덟 살.”

꼬마애가 양손에 브이 두 개를 만들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봐도 저분은 이모뻘, 아니, 할머니뻘에 더 가깝거든?”

“하지만 신내림 받은 지 여덟 살 됐는걸.”

“······.”

“같은 신어머니께 신딸로 입적한 내 언니야.”

어렵다, 무당의 세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쪼끄만 게 커서······. 어쩐지 어린애가 인형처럼 예쁘게 생겼다 했다.’

나는 착잡한 눈으로 방긋방긋 웃는 애를 내려다보았다.

‘나한테는 22살이라고 그렇게 박박 우기더니. 그렇다면 난 그때 얘랑······ 그러니까······.’

왠지 귓가에 수갑이 철컹철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사실 네 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아닐 거야. 아니라고. ···아니겠지?

“아니야!”

꼬마애가 다급하게 손가락을 꼽았다.

“하나, 둘, 일곱, 아홉, 다섯, 넷! 그래서 다섯 살에서 올해 네 살이 된 거야.”

그렇게 세면 여섯 살이거든?

그럼 그땐 스무 살이었단 거고.

“넌 숫자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다.”

“한문이랑 독경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래. 하지만 나 60진법 궤 세는 건 아주 잘한다구······.”

“60진법을 아는데, 10진법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랑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세는데?”

“······.”

“사주 볼 때 누가 숫자로 봐?”

“······.”

머리가 아파온다.

여러모로 골 때린다.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근데 그건 나한테 보낸 거야? 아니면 우리 부모님께?”

“이건 귀인 오빠 거.”

꼬마애가 들고 있는 건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겉면에 <인왕산 선녀보살이 드립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지 서찰에서 황금빛이 이렇게 요란하게 번쩍거릴 일이 뭐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다른 사람에겐 절대 보여주면 안 된댔어.”

꼬마애가 황금빛의 한지 서찰을 슬쩍 뒤로 물렸다.

대문 틈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내 눈앞에 살랑살랑 흔드는 거다.

“내가 직접, 꼭 귀인 오빠한테, 다른 사람들 모르게 전해야 한댔어.”

“저기 다 큰 어르신도 함께 오셨는데, 네가 이런 걸 왜 전해? 꼬맹이 주제에.”

“내가 할머니 다음이니까.”

뭔 소리야?

“할머니 다음에 내가 백호신을 섬길 거니까.”

차기 당주, 차기 가주, 후계자, 뭐 이런 뜻인가 본데.

내가 이쪽에 관해선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꼭 직접 인사드리러 가야 한댔어.”

“인사받은 셈 칠게. 가라.”

나는 빼꼼하게 열었던 대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이미 꼬마애가 대문 틈으로 발을 밀어넣고 있던 줄도 모르고.

“아얏!”

깜짝 놀라서 대문을 벌컥 열었다.

“야! 네가 무슨 방문판매원인 줄 알아?”

“아니야.”

“이거 철문이라 끼이면 크게 다친다고!”

“아니야.”

“넌 지금 이 순간부터 아니야 금지다!”

“아니야.”

“한 번만 더 아니야 소리 하면 내쫓을 거야. 그래도 계속 아니야 할 거야?”

“아니······ 흐으으응, 어떡해.”

나는 쭈그려 앉아 꼬마애의 꽃신을 벗겼다.

“으아앗, 아니야아아!”

“아니야 금지랬지.”

“아니······! 흐으으응, 너무해!”

“가만히 좀 있어 봐. 상처부터 확인해야 병원에 가든가 약을 바르든가 할 거 아냐.”

“아니······! 흐으으응, 어떡해, 어떡해!”

버선까지 단번에 벗겼다.

따뜻하고 조그만 맨발을 한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봐도 조금 붉어진 것 외엔 딱히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뼈와 근육도 괜찮아 보이고.

“너 재수 없었으면 크게 다칠 뻔했어. 다음부턴 절대 이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

나답지 않게 뒷말을 흐리고 말았다.

꼬마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치마 사이로 맨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흰 무녀복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맨다.

“이,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뭘 이러면 안 돼?”

“나, 나, 나한테는 서방님이 있단 말이야······.”

“쪼그만 게 벌써부터 서방님 타령이야?”

인왕산 백발마녀.

남편 대신 횡액을 받아 하룻밤 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다지?

겨울마다 백일 치성을 드리러 인왕산에 올라 평생토록 그를 위해 빌었다던데.

그래서 인왕산 백발마녀라고 불렸다면서.

‘인왕산 백발마녀가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만 미친놈처럼 전국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져가며 살았지. 12년이나.’

분명히 지금은 멀쩡히 붙어 있는 손가락이건만.

아까부터 자꾸만 욱신욱신 쑤셔댔다.

내 손으로 잘라 남산 찰거머리에게 던져줬던 왼손 약지.

그녀의 소식과 맞바꾸기 위해서였다.

“네 그 서방님이란 새끼가 어떤 놈인지는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치기 어린 심술이었다.

‘제 마누라 장례식에 코빼기도 안 비추던 빌어먹을 개자식!’

내가 죽기 석 달 전인가.

인왕산 백발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 된 도리로 고인의 마지막은 배웅해주기로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달려갔던 거지만.

상주였던 인왕산 백발마녀의 딸은 내 손을 붙잡고 ‘어머니를 잊지 않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배웅해줘서 고맙다.’며 하염없이 울었더랬다.

“넌 어떻게 된 여자애가 누군지도 모를······.”

“아니야!”

“아니야 금지랬다.”

“······어제 알게 됐단 말이야.”

알긴 뭘 알아?

그 새끼는 나는 물론이고 남산 찰거머리의 소식통으로도 끝까지 못 찾은 놈인데.

분명히 살아 있다는데, 그 새끼 머리카락 한 올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데? 몇 살인데? 뉘 집 아들이야? 혹시 태중혼약이나, 정략결혼, 뭐 이런 건 아니지?”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

“아깐 안다며?”

“얼굴만 본 건데?”

꼬마애는 커다란 무복 소매를 들어 새빨개진 얼굴을 꽁꽁 감췄다.

왜 열받지?

“그렇게 잘생겼어? 얼만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화끈할 정도?”

“······귀인 오빠 크면 엄청엄청 잘생겼어.”

아닐걸?

내가 커봐서 아는데, 난 왕년에 인기 없었어.

얼굴에 반 이상을 덮은 화상 흉터 때문에 여자들이 질색했거든.

“쟁쟁한 배경을 가진 예쁜 여자들이 줄줄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보긴 뭘 봐?

저승사자도 못 보는 게.

“어제랑 달라. 나도 이젠 보인단 말이야.”

꼬마애는 난처한 듯 우물쭈물 말했다.

“귀인 오빠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뭘 걱정하는지도 모르는 게.”

“알아. 태성가의 살문(殺門)도, 부모님의 천수도, 또······.”

“끊어내고 싶은 악연도?”

“응.”

꼬마애는 다 아는 것처럼 웃었다.

“오빠네 어머니와 외가 쪽으로 걱정하는 일도 곧 해결될 거야.”

“······.”

“곧 따뜻한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전부 귀인 오빠와 오빠 어머니를 도울 사람들이야.”

얘는 어떻게 된 게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줄줄줄 말할까?

왠지 인왕산 선녀보살이 딱 그랬던 것 같은데.

“할머니처럼 줄줄줄 읊으니까 싫어?”

“······아니, 그냥 신기해서.”

나랑 같이 살았을 땐 안 그랬으니까.

기억을 잃으면서 이런 재주도 다 잃어버렸던 걸까 싶어서.

“귀인 오빠가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꼬마애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실은······ 나 귀인 오빠한테 은혜 갚으려고 왔어.”

“은혜는 무슨.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아니야.”

“울고 있는 어린애를 신당까지 데려다준 것뿐이거든?”

“아니야.”

“넌 무슨 말만 했다 하면 맨날 아니라고 우겨대지.”

“아니야.”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심란해진다.

저 부풀리는 볼과 뾰로통한 표정까지 기억 속 그대로다.

“삐약아!”

꼬마애가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뭔가 엄청 큰 게 스르륵 연기처럼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퍼덕퍼덕 내려온다.

투명하게 비치는, 깃털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새.

주작이었다.

“귀인 오빠 덕분에 얻었단 말이야. 고맙습니다 해야지.”

집채만큼 커다랗던 주작이 스스스슥 모습을 줄였다.

“그래서 오빠랑 오빠 수호신께 인사하러 온 거야. 감사 인사.”

주작이 딱 병아리만 해져선 꼬마애 어깨에 내려앉았다.

“가장 길한 날, 가장 길한 시각에, 잡귀를 전부 털어낸 깨끗한 몸으로 신당에 들어오게 돼서.”

꼬마애의 말이 맞다는 듯 빨간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었다.

“그때 차사님께서 왕림하셨다고 사방신이 모두 신당에 모여 있었대.”

[삐약삐약!]

“그게 내겐 다시없을 기연이자 천운이 되었대.”

[삐약삐약!]

“주작은 정화의 신이자, 심판의 신이거든. 액막이 무녀에겐 이보다 더 길한 수호신은 없을 거야.”

꼬마애는 눈매를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쪼끄만 게 벌써부터 애간장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하게 웃을 줄 안다.

“덕분에 나 평생 동안 시달려야 했을 액막이 고통에서 해방됐대.”

그건 잘됐네.

“나중에 커서 백호신까지 물려받으면 난 사방신 중 둘이나 거느린 대무녀가 될 거래.”

그것도 잘된 것 같고.

“지금껏 이런 큰 신을 둘이나 거느린 대무녀는 없었대. 그래서 어제 할머니랑 무녀들이 귀인 납셨다고 더 크고 화려하게 손님맞이를 한 거래.”

뭐?

“두 달도 넘게 전부터 차사님의 부름을 받았대. 그날부터 매일 치성드린 지전을 준비했다는 거야.”

설마.

뇌물과 청탁은 한 세트였다.

“귀인의 길함에 기대어 횡액을 면케 해달라고 빌었대.”

이게 저승사자가 받은 청탁이었나?

“너 그렇게 막 천기누설하고 다니면 안 돼. 천벌 받는다며.”

“이번만은 괜찮을 거야. 나 어제 막 삐약이를 얻었으니까. 그래서 오늘 여기 온 거니까.”

꼬마애가 황금빛 서찰을 내밀었다.

“할머니 선물, 그래도 안 받을 거야?”

받아야지.

“액막이 안 할 거야?”

해야지.

부모님을 위한 액막이라는데.

“나 안 들여보내줄 거야?”

하, 이거 진짜 안 들일 수가 없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문을 열었다.

“들어와.”

내 손으로 이 여자를 내 집에 다시 들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 *

신기했다.

“액막이굿이라면 엄청 요란하다던데. 생각보다 조용하게 한다?”

“요란하게 잡귀를 쫓을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 깨끗해.”

그야 저승사자가 싹 다 청소했으니까.

꼬마애는 반듯하게 앉아 먹을 갈아 한지에 독경을 쓰고 있었다.

전부 한문인 데다 세필로 빼곡하게 적어내리는지라 솔직히 좀 놀랐다.

“너 서예 좀 한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베껴 썼거든.”

담담한 말이었다.

“할머니 서찰을 읽었으면 알 텐데. 왜 묻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은 황금빛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인왕산 선녀보살의 호의였다.

길고 긴 감사의 인사 끝에 적은 몇 문장이 눈에 박혔다.

<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앞으로 후대에 백호신을 물려주기 전까지 제가 전심전력으로 돕겠습니다.>

<귀인께 필요한 은밀한 인맥을 채워드리겠어요.>

무당집에 드나드는 정재계 굵직한 인사들이 몇이던가.

그중에 은밀하게 만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주선하겠다는 소리였다.

<청원각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귀를 심고 싶으신가요?>

청원각이라면 대한민국 3대 고급요정 중 하나였다.

대통령이 즐겨 찾고, 정재계 거물들이 비밀 회동을 갖는 곳.

<뿐만 아니라 태성가 막내 사모님의 사교계 입성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모님들과 만든 친목계를 열어드릴까요?>

이 시절엔 계가 유행했다.

한 번 만나면 계가 하나가 만들어진단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흔했다.

서민들에겐 은행 문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사채활동 중 하나로 만들어지곤 했지만,

상류층 사모님들은 인맥과 투자를 위해 만들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쟁이 세 사람만 한 입으로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이었다.

<때로는 대놓고 몰고가는 언론 플레이보다 유명인사의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소문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삼청동 무당집에 둥지를 틀고, 겨울마다 인왕산에 올라 백일치성을 드린다는 인왕산 백발마녀.

그녀가 대한민국 음지의 다섯 거물 중 하나가 된 이유였다.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인맥이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우리 애를 보낸 뜻을 받아주십시오. 하늘도 갓 신을 받은 애기무당의 첫 점은 눈감아주는 법입니다.>

< 액막이 무녀 (3) > 끝

ⓒ 오소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