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48화 (148/189)

< 천륜이라며? >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꼬마애는 한숨처럼 말했다.

“이 나라를 떨어울릴 만한 미인이 여기 있었네. 팔방미인(八方美人),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꼬마애의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반대로 어깨에 앉아 있던 주작이 몸집을 점점 키워냈다.

병아리만 했던 주작이 방 천장에 닿을 만큼 커졌을 때.

주작이 부리를 열자, 동시에 꼬마애가 졸음이 감긴 목소리로 줄줄줄 읊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머무는 곳엔 바람 잘 날 없을 거야. 여러 가지 의미로 평지풍파(平地風波), 파란만장(波瀾萬丈)하여 일생이 퍽 고단할 것이다.”

뒷골목 건달들은 물론이고 전국구 조폭 두목과 포주왕까지.

다들 눈이 벌게져서는 호시탐탐 빼앗으려 안달을 내던 여자였다.

“이쪽도 천벌, 저쪽도 천벌. 이 또한 부창부수(夫唱婦隨)라 어떤 의미로는 천생연분이다.”

천생연분이란 대목에서 흠칫했다.

“기울어지는 저울이야. 남자가 품기엔 여자가 너무 과분해.”

누누이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그릇보다 많은 물은 흘러넘치기 마련이고, 힘없는 자의 손에 떨어진 보물은 재앙과도 같으니.

난 가진 게 젊음밖에 없었다.

명동 송골매의 후계자가 된 것도 잠시, 하루아침에 배신자로 낙인찍혀 몰매를 맞고 빈손으로 쫓겨났을 때니까.

삼인성호(三人成虎).

사형제들이 입을 모아 누명을 씌운 탓이었다.

“여자 때문에 남자도 고생이 많겠네.”

글쎄. 난 그걸 한 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꼬마애는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12년을 정처 없이 헤매느라 몸 고생, 속 끓는 그리움과 원망을 해결할 길 없어 마음고생.”

“하······!”

“스스로 택한 천륜을 멀리 두고 청춘을 길바닥에서 보냈는데, 그게 고생이 아니면 무엇이 고생일까.”

“······천륜? 악연이 아니고?”

“부부와의 인연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천륜이라 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천륜은 세 가지를 말한다.

부모와의 인연, 부부와의 인연, 자식과의 인연.

부모와 자식은 직접 고를 수 없지만, 배우자만큼은 고를 수 있다.

그래서 부모 자식과는 1촌이고, 배우자는 0촌이다.

“제 여자를 지키려다 칼에 맞았고.”

눈을 감은 꼬마애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제 여자를 찾으려고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으며.”

남산 찰거머리에게 정보값으로 던져줬다.

“신장까지 떼어다 팔아 노잣돈 삼았구나.”

가난한 사랑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었다.

흔적조차 없이 증발한 여자를 찾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힘이 필요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어서 두 개 달린 신장이라도 하나 팔아야 했다.

그걸 종잣돈을 삼아 사채시장에 뛰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을 운이 연달아 겹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자꾸만 건너니, 살아서는 끝내 맺어질 수 없는 박복한 인연.”

“하아······.”

“그래서 천벌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절로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평생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서 공덕을 쌓아야 하는 여자가 어떻게 만나도 이런 박복한 남자를 만나 연을 쌓았을까.”

꼬마애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어쩌다 넌 내 품에 떨어지게 됐을까.’

자정도 넘은 야심한 청계산의 으슥한 산기슭에서.

여자는 머리를 풀고 흰 소복 차림으로 귀신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배신자들을 생매장 협박하면서 한창 취조하고 있던 나도, 느닷없이 굴러떨어졌던 여자도, 구덩이에 파묻혔던 배신자들까지 모두 놀라 동시에 비명을 질렀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이쪽도 전생에 큰 죄를 지은 모양이구나. 잘 봐줘도 화류계, 그보다 더 나쁘면 무당이나 비구니로 빠질 팔자인 걸 보니.”

잠깐.

“반대 아니야?”

화류계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 이 얼굴, 이 몸매, 이 분위기에 화류계로 빠졌으면 진즉 재벌집 애첩 자리는 꿰어차고도 남는다.”

“아······.”

“그러니 화류계로 빠진 쪽이 오히려 운 좋게 팔자 잘 풀린 거라고 봐야지.”

“······그러네.”

“오죽했으면 신마저 탐내어 신당에 묶어두려 할까. 그 정도니까 천벌 받은 팔자란 소리가 나올 수밖에.”

“······.”

난 자연스럽게 주작을 향해 눈을 돌렸다.

“신마저 탐내서 신당에 묶어두려 한다라······.”

주작은 날개를 쫙 펴면서 위협적으로 [끼에엑!] 울었다.

온몸에서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털썩.

꼬마애는 끈 떨어진 연처럼 옆으로 픽 쓰러져 도로롱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얘가 멀쩡할 땐 귀여운 척 삐약거리더니, 정신줄 놓으니까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이거지?”

[흥, 이 아이를 탐낸 건 네놈도 똑같지 않으냐? 내가 다 보았느니라!]

“그럼 봤으니까 알겠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잠든 꼬마애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내가 아까 얘한테 물은 건 나랑 엮인 여자와의 인연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내 인생에 여자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여자라곤 꼴랑 얘 하나였는데, 그게 천생연분인 천륜이라잖아.”

[그런데?]

이만하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제오늘 내가 들은 정보를 정리하다 보니 안 그래도 마음에 딱 걸리는 게 있었거든?”

[흥, 양심이란 게 있으면 당연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야지!]

“계산이 좀 안 맞더라고.”

[계산?]

“내가 전에는 철석같이 이 여자가 나랑 동갑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아니었네? 나보다 두 살이 어려.”

[그게 뭐가 문제지?]

새대가리냐?

“그 서방이라는 놈과 스무 살에 결혼했다면서.”

[······.]

아까까지 불꽃을 잘만 화르륵 화르륵 토해내면서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부리가 딱 다물려졌다.

“그 서방이란 놈 사이에서 얻은 딸을 스물한 살에 봤다면서.”

[······.]

“스물두 살에 나랑 만난 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이 여자 인생에 끼어든 이물질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고.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나이 차가 딱 두 살이네?”

[······.]

그래서 결론.

“그 서방이라던 새끼가 나였어?”

[······.]

“내 자식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남의 자식 데려다 키운 뻐꾸기가 나였냐고.”

[······그게 천벌이니까.]

주작은 모른 척 눈을 돌렸다.

그래서 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아······. 환장하겠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나한테 딸이 있었다고?”

본 적 있다.

삼청동 무당집에 석 달 동안이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시절.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내 말동무를 해주던 애기무녀.

그녀의 장례식에서 내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짓던, 제 엄마를 쏙 빼닮아 굉장한 미인이었던······ 젠장!

“왜 대답을 안 해? 애기무당의 첫 점이라며. 마수걸이 이렇게 대충 할 거야?”

[이런 고얀 놈이!]

“다 훑어봤다며? 나 때문에 이 여자가 횡액 맞아서 머리가 하얗게 센 거 맞아?”

[감히 뉘 앞에서 핏대를 세워!]

방 안 가득 덩치를 키운 주작은 이글이글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래, 네놈 때문에 우리 애가 겨울마다 인왕산에 올라 그 고생을 했다!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제 수명을 떼어주······ 케에에엑!]

빠악!

주작이 날개로 뒤통수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벽 뒤에서 연기처럼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저승사자가 뒷짐을 진 채 못마땅한 소리를 내었다.

[고얀 놈이 감히 뉘 앞에서 핏대를 세워?]

[차, 차사님! 죄송합······ 케엑!]

빠악!

[누가 감히 본 차사 앞에서 함부로 천기누설을 하였는가?]

[아이고, 차사님. 제가 잠시 흥분하여서······.]

[닥쳐라.]

빠악!

주작은 눈물을 찔끔거렸으나, 찍소리도 못했다.

[사방신이면 다야? 여기가 누구 영역인지 까먹었어?]

[죄, 죄송합니다!]

[누가 새대가리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치매 왔어? 강신 규정은 엿 갖다 팔아먹었어?]

[시정하겠습니다!]

[새대가리, 대가리 박는다. 실시.]

[실시!]

주작이 바로 대가리를 박았다.

날개로 확실하게 뒷짐을 지었다.

[무당 입은 뒀다 얻다 쓸래? 누가 촉새 사촌 아니랄까 봐 주둥이 자꾸 나불대지?]

[잘못했습니다!]

[천기누설 횡액 받고 명계 긴급 감사 뜨고 난 다음에 ‘시발, X 됐구나!’ 할 거야?]

[죄송합니다!]

[이쪽은 본 차사가 수호하는 귀인이다. 대가리에 똑바로 새겨놓도록.]

[헉! 몰라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지켜보고 있겠다.]

저승사자가 두 손가락으로 제 눈과 주작의 눈을 번갈아 찍는 시늉을 했다.

[눈치껏 하자.]

[예, 알겠습니다!]

[원위치.]

[원위치!]

주작이 즉시 차렷 자세로 돌아와 꼬마애 뒤에 섰다.

그러더니 비굴하게 웃으며 달달 떨리는 불꽃 날개를 샤샤샥 비벼대기 시작했다.

[귀인님,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성실히 답해드리겠습니다. 짹짹짹!]

나는 말없이 내 두 번째 사주를 들이밀었다.

* * *

심란하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저녁상인데도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귀인 오빠, 입맛이 없어? 이거 맛있는 거야.”

꼬마애가 갈비찜을 어린이용 포크로 찍어서 내 밥그릇에 덜어놓는다.

아직 젓가락질도 못 해서 포크로······.

이걸 언제 다 키우냐······.

“하아아아······.”

“밥상머리 앞에서 자꾸 한숨 쉬면 먹을 복 떨어져.”

“그거 미신이야, 관용구야?”

“관용구? 그건 무슨 신이야? 나 미신에 대해선 좀 알거든!”

“······.”

말을 말자.

나는 어린이용 포크를 쥐고 야무지게 밥 먹는 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물오물 먹으면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잘도 웃는다.

“늦게 귀가하면 할머니가 혼 안 내?”

“액막이하는데 왜 혼나? 나 여기 계속 있을 건데?”

“계속? 얼마나?”

“그러니까 하나 밤, 둘 밤, 일곱 밤, 아홉 밤, 다섯 밤, 넷 밤······.”

“너 손가락 세기 금지.”

“너무해!”

우리를 보면서 어머니가 웃었다.

“둘이 벌써 많이 친해졌나 보네. 보기 좋다.”

아버지도 빙그레 웃었다.

“정혁이가 예린이한테서 눈을 못 뗀다. 보기 좋네.”

“예린이?”

꼬마애가 방긋 웃었다.

“나. 백예린.”

삼십 년 만에 제대로 알게 된 그녀의 나이.

삼십 년 만에 제대로 알게 된 그녀의 이름.

“난 차정혁.”

“귀인 오빠 이름은 차정혁. 차정혁. 정혁이 오빠.”

말을 잃었던 그녀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불러준 내 이름.

우리는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처음으로 통성명을 나눴다.

“하아아······.”

아까 주작이 예린이의 입을 통해 나불댄 말 때문이었다.

“오빠는 한숨 금지.”

“하아아······.”

넌 네 입으로 한 말을 기억 못 하니까 그렇지.

너도 그걸 기억했으면 나처럼 한숨만 푹푹 나왔을걸?

“애들은 몰라도 돼.”

“오빠도 애잖아.”

“젓가락질도 못 하는 어린애랑은 다르지.”

“너무해!”

예린이가 볼을 부풀렸다.

아까 신들렸을 때는 어려운 말도 척척 잘도 하더니.

이렇게 보니까 영락없는 여섯 살짜리 애다.

“하아아······.”

나는 급기야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어디 아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안 먹어? 옥분 여사님께 들어보니까 아침이랑 점심도 걸렀다면서.”

내가 종일 굶었다는 말에 아버지도 수저를 내려놓고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별일 안 생겨요.”

“어린애가 하루 세끼나 굶은 건 큰일이야. 안 되겠다. 병원 가자.”

“됐어요. 아픈 데 없어요.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 그래요.”

“속이 답답해? 그럼 약 먹자. 어린이용 소화제가 어딨더라?”

“됐어요. 먹은 것도 없는데 소화제를 먹어서 뭐 해요.”

“병원도 안 가겠다, 약도 안 먹겠다, 밥도 안 먹겠다. 대체 어쩌려고?”

내가 아픈 그녀에게 자주 하던 말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예린이를 돌아봤다.

예린이는 들고 있던 어린이용 포크와 어린이용 수저를 얌전하게 내려놓았다.

“오빠가 저러는 건 아마 아까 제가 한 말 때문일 거예요.”

“예린이가? 뭐라고 했는데?”

“그게요, 제가요, 점을, 그러니까 신내림 받고 첫 점을 봤는데요.”

기억 못 할 거면서.

감당할 수 없는 영역까지 내다볼 땐 아예 넋이 나간다며.

신점은 멀쩡한 정신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서 제정신이 돌아오면 자기가 했던 말은 기억 못 한다며.

내 사주 보자마자 바로 꾸벅꾸벅 졸았던 거 내가 다 아는데.

“제가 나중에 커서······.”

예린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린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저는 오빠의······ 으음······.”

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밥상머리 앞에서 이러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음식을 해주던 옥분 할머니와 도우미 아줌마들도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모았다.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나중에 커서 우리 정혁이랑 결혼할 거야? 정혁이 부인이 되어주는 거야?”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예린이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제가 감히 어떻게 오빠랑 결혼하고 부인이 되겠어요?”

“그러면?”

“전 오빠의 애···, 애······, 그러니까 애······.”

“애인?”

예린이가 두 주먹을 꽉 쥐고 비장하게 외쳤다.

“애첩이 될 거예요!”

< 천륜이라며?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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