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52화 (152/189)

< 중정부장과 담판 짓다 (1) >

철구 아저씨는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혀를 찼다.

“아저씨, 지금 옥분 할머니 길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시는데요.”

“어억!”

철구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서 옥분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강 여사! 설마 놀라서 기절한 거야?”

“드르렁! 퓨아, 퓨아······!”

“우리 강 여사, 인삼 좀 고아 먹여야겠네. 역시 세월에는 장사 없어.”

응, 아니야.

저승사자가 재운 것뿐이거든.

“읏챠.”

철구 아저씨는 옥분 할머니를 단번에 들쳐 업었다.

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키를 찾기에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바퀴 터진 차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젠장, 이 개새끼들이 진짜······!”

철구 아저씨는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인지, 대뜸 기절한 놈들한테 발길질을 했다.

빠각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화음처럼 들려왔다.

유종태가 달려들어서 철구 아저씨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이고, 빡중령님! 더 패면 이 새끼들 진짜 뒈집니다!”

“놔라.”

“뼈 부러지는 소리 들으셨잖습니까! 송장 치우려고요?”

“숨만 붙여놓으면 되잖아, 숨만!”

“이 새끼들은 중정부장님께 보낼 선물이라면서요!”

“······.”

“중환자를 끌고 가서 선물이랍시고 내어놓을 순 없잖습니까.”

“에이씨!”

그제야 철구 아저씨는 발을 거뒀다.

나는 유종태에게 손짓했다.

“유 팀장님, 그 사람들 주둥이를 열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옙! 지하실로 끌고 갈까요? 아니면 청계산으로?”

철구 아저씨는 잇몸까지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수고롭게 멀리까지 갈 것 있나. 개새끼들 조지는 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철구 아저씨가 가슴을 쫙 폈다.

“중정 몰라?”

없는 자백도 받아낼 수 있다는 곳!

“믿고 맡겨 봐.”

생긴 게 딱 불곰 닮았다고 했더니.

소매를 걷자 드러난 팔뚝은 사람 허벅지만큼 두꺼워 보였다.

이른바, 철구 아저씨표 진실의 시간이다.

“선물이라며? 핵심만 간략하게 뽑아보자아아~♬”

중정부장이 직접 심문하는 수고를 줄여주겠다는 뜻이었다.

모름지기 선물이란 받는 사람 입장을 염두에 두고 보내야 하는 법!

마음에 든다!

* * *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철구 아저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왔다.

철구 아저씨의 손에는 은빛이 도는 종이가 다섯 장이나 들려 있었다.

“받아.”

“이게 뭔데요?”

“진술서.”

역시 말보다는 문서지!

“중정 차장의 지시였다더라.”

이미 철구 아저씨의 미래를 엿봐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육하원칙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중정부장 자리를 놓고 벌인 알력 다툼이구만.’

코라이 게이트가 터진 후, 7대 중정부장이었던 신지수가 해임되고 현(現) 중정부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청문회에서 증언을 한 4대 중정부장 김형원을 귀국시키기 위해 특별히 대통령이 제 심복을 중정부장 자리에 꽂아넣었다.

덕분에 차기 중정부장으로 내정되었던 중정 제1차장은 헛물을 켜게 되었다.

‘중정 제1차장이라면 4대 중정부장 김형원이 망명했을 때 설득해 파리로 보냈다던 그자로군.’

한마디로 코라이 게이트의 핵심 인물을 설득해 사건을 무마한 공을 세웠던 인물!

덕분에 공석이 되었던 중정부장 자리에 앉았던 남자였다.

고작 5일뿐인 영광이었지만.

‘청와대 경호실장과 손을 잡고 중정부장의 반대편에 서서 권력의 대립각을 세웠다더니.’

아쉽다.

‘진술서에는 중정 제1차장이 중정부장을 밀어내려고 부하들을 시켜 수작을 부렸다는 정황밖에는 드러나지 않았군.’

하지만 나쁘진 않다.

‘중정 제1차장과 청와대 경호실장을 묶어서 압박할 카드였다면, 중정부장에게 보다 많은 것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까진 어쩔 수 없지.’

나는 진술서를 곱게 접어 동전 지갑에 넣었다.

“아저씨 덕분에 아주 좋은 선물을 들고 가게 생겼네요?”

“쓸만해?”

“이만하면 당분간 중정 제1차장이 몸깨나 사리면서 상사 눈치 보기 바쁘겠는데요?”

“그래?”

철구 아저씨는 몹시 쑥스러워하면서 순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거 있잖냐. 아까 내가 맡겼던 그 열쇠 말이다.”

열쇠?

아, 서울역 물품 보관소!

“이왕 선물하는 거라면 그것도 같이 들고 가면 좋지 않을까?”

“그것도 선물 축에 들어요? 거기에 뭘 숨겨놨는데요?”

“녹음기. 어쩌다 보니 중정 제1차장과 청와대 경호실장의 밀담을 도청했거든.”

“에엑?”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 제1차장의 밀담을 어떻게 도청한 거지?

아이고, 이 양반아!

“대통령 각하께서 코라이 게이트 때문에 몹시 노하셨다더라. 이 기회에 중정부장을 실각시키자고 은밀하게 건의하던데.”

“허어······!”

“중정부장의 임무는 김형원 전(前) 중정부장을 귀국시키는 거야. 그런데 중정 제1차장은 각하의 손에 닿지 않는 유럽으로 도피시키려 해.”

이거 우광건설 뇌물 장부 때문에 죽을 뻔한 게 아니었구만!

“그렇게만 된다면 현(現) 중정부장도 신지수 전(前) 중정부장처럼 해임될 수밖에 없고, 그 자리는 원래대로 제 몫이 될 거라면서.”

이 정도면 서로 죽고 죽이는 대가리들 싸움판에 제대로 끼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중정요원들이 김형원 전(前) 중정부장의 뒤를 추격하고 있다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주소도 얻게 됐거든.”

황당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이렇게 운 좋게 얻어걸린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코라이 게이트 터지고 대통령의 지시하에 중정이 발칵 뒤집혀서 요원들 파견한 지 벌써 2년째예요. 그런데도 못 잡은 꼬리를 아저씨가 덜컥 잡았다고요?”

“그게··· 우광화학 방화를 캐다가 우연히 얻게 됐다. 뒤 구린 놈들이 다 그렇게 얽히는 거지 뭐. 크흠!”

“이 정도면 뒤 캐는 건 타고났는데요?”

“낌새가 영 이상하더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더니 어라, 이게 툭 튀어나오대?”

“허어, 아저씨는 운이 좋은 거예요, 능력이 좋은 거예요?”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과거 온갖 재주를 다 부려도 마지막엔 늘 ‘재수 없게’ 일을 망치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 해본 행운이었다.

“그러다 결국 들킨 거예요?”

“뭐 그렇게 됐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용케 안 죽고 살아계시네요?”

“크흠!”

“호랑이 목줄을 잡으셨구만! 그러니 중정 차장이 눈에 불을 켜고 아저씨를 죽이려 들죠. 저런 놈들까지 몰래 보내서.”

“위험한 일이니까 되도록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철구 아저씨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혀를 찼다.

“중정 차장이 노리는 일인데, 저놈들을 눈앞에서 치운다고 끝날 것 같아요?”

감찰국장과 서문 머시기를 잡았는데도.

아직까지 철구 아저씨의 머리 위에는 [3일]이라는 저승행 카운트다운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다.”

“고개 들어요. 아저씨가 죄지었어요? 허물 있는 놈은 따로 있는데 왜 아저씨가 죄인처럼 굴어요?”

나는 팔짱을 꼈다.

‘중정 차장이 문제라면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결심과 동시에 계산도 끝났다.

“잘됐어요. 중정부장에게 보내기엔 이만한 선물, 아니, 뇌물도 없겠네요.”

“면목이 없다. 쩝.”

철구 아저씨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움찔하면서 내 눈치를 슬슬 봤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아저씨도 참. 이건 요령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음험한 쪽으로 머리가 영 안 굴러간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도 철구 아저씨가 가져오는 건 항상 내가 꼭 필요한 것뿐이다.

이 정도가 되면 신기하다는 말밖에 안 나올 지경이다.

“차라리 중정부장을 찾아가서 고자질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내가 아저씨 덕에 이득을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아저씨가 모든 공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크흠, 중정부장님씩이나 되는 높은 분이 나 같은 일개 요원을 만나주기나 한대?”

“······.”

그야 그렇긴 하지만.

“힘없는 자의 손에 떨어진 보물은 재앙과도 같다더라. 근데 내가 딱 그 짝이야.”

철구 아저씨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순박하게 웃었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 때도 그렇고.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진짜 꼼짝없이 뒈질 뻔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죠.”

아저씨의 뇌물 장부로 내가 얻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할아버지랑 협상으로 뜯어낸 각서도 있고, 이걸로 우광에서 뜯어낸 계열사가 몇 개며······.

‘중정 제1차장과 청와대 경호실장의 밀담이라······.’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은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오랜 시간 권력을 두고 날을 세웠다던데.

여기에 중정 제1차장까지 껴있을 줄은 몰랐다.

‘오른팔이 되어줘야 할 사람이 정적과 손을 잡고 호시탐탐 뒤를 노리고 있었으니, 중정부장이 오죽 이를 갈았겠어.’

확신한다.

이 선물은 제대로 먹힐 게 틀림없다.

‘내가 아는 미래는 김형원 전(前) 중정부장이 중정 제1차장의 설득에 넘어가 프랑스 파리로 도피했다는 것. 이후 김형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돼서 코라이 게이트가 흐지부지 묻혔지.’

아쉬운 대로 철구 아저씨를 보내 파리에서나마 김형원의 뒤를 쫓을 계획이었다.

미국의 도피처는 신변 보호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중정부장에게 제대로 된 빚을 달아둘 수 있다면······.’

중정부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 중의 권력자!

국내외 정보를 한 손에 쥐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재계 인사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물밑에서 태성과 내 투자회사를 도와준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 같을 터!

또 하나 더.

‘중정부장이 갖고 있는 자료가 탐난다.’

어떻게 빼돌릴 기회가 없을까?

왠지 이쪽 방면으로 특출난 철구 아저씨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일단 코라이 게이트부터. 철구 아저씨 덕분에 직접 김형원과 담판 지을 가능성도 열렸지.’

김형원은 지금 절벽 끝에 몰린 신세다.

한국과 미국의 압박에 질식사하기 일보직전.

절박한 사람은 앞뒤 잴 것 없이 빠져나갈 구멍에 몸을 집어넣고 보는 법이다.

‘코라이 게이트는 우광의 후계자가 전면에 나서서 로비를 서포트했던 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광이 깔아놓은 미국 유통망에 밥숟가락을 얹을 수만 있다면······.’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방위산업체를 굴리기로 작심한 이상 역시 그쪽으로는 미국시장만큼 매력 있는 시장이 또 있을까!’

미국은 20세기는 물론 21세기에도 무기 혹은 국방 관련 시장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좋았어! 제일 중요한 김형원의 거주지는 철구 아저씨가 확보했고, 내겐 훗날 밝혀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로비스트 명단이 있지!’

나는 유종태를 돌아봤다.

“유 팀장님, 인왕산 선녀보살 댁에 전화 넣으세요. 청원각 좀 열어달라고.”

“예, 도련님.”

“심 사장님이 우광의 김대식 회장님과 만나기로 한 날이 언제라고요?”

“내일 저녁 8시, 청원각 후원 별채인 여심당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같은 시각 옆방을 비워달라고 하세요. 참, 김 비서님께도 연락하시고요.”

“김 비서님이요?”

“김 비서님 정도는 되어야 중정부장님이 따로 만나주지 않겠어요?”

나는 진술서가 들어있는 동전 지갑을 팡팡 쳤다.

“청와대 경호실장과 알력 다툼할 필요 없이 눈엣가시 같은 중정 제1차장의 목만 깔끔하게 쳐낼 수 있는 선물을 드리겠다고 전하세요.”

* * *

다음 날 저녁 청원각 후원 별채 여심당.

드르륵.

댓돌에 구두를 벗고 툇마루에 올라 장지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나전칠기 가구에 이조백자, 원앙 장식품과 한지 공예품으로 꾸민 화려한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온갖 음식이 올려진 주안상이 떡 하니 차려져 있었다.

김 비서는 조용히 도자기 술주전자를 기울여 제 술잔을 채우다가 벌떡 일어섰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난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온 것 같은데.”

중정부장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8시 정각이었다.

김 비서는 맞은편 비단방석을 권했다.

중정부장은 성큼성큼 걸어가 방석에 앉았다.

“청와대 경호실장과 알력 다툼할 필요 없이 눈엣가시 같은 중정 제1차장의 목만 깔끔하게 쳐낼 수 있는 선물이란 게 대체 뭐지?”

호기심과 흥미를 완벽하게 감춘 차가운 어투였다.

중정부장은 날카로운 눈매로 김 비서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읽고 상대의 빈틈을 찾아 의도를 가늠하려는 기색이었다.

“중요한 선약까지 파기하면서 나온 자리야. 그만한 가치가 있길 바라지.”

“부장님 시간이 귀한 것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탁.

김 비서는 주안상에 다섯 장짜리 종이를 올렸다.

중정부장이 무심한 눈길로 그것을 바라봤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문서가 있었던가?”

“우광건설 뇌물 비리 혐의로 서빙고 물고문실에 끌려갔다던 전(前) 감찰국장과 휘하 감찰국 중정 요원이 작성한 진술서입니다.”

“고작 그까짓 것으로 중정 제1차장의 목을 칠 수 있을 것 같나?”

중정부장은 진술서를 제대로 읽기는커녕 무심한 눈길마저 바로 거둬들였다.

작은 흥미조차 사그라진 눈빛이었다.

이미 권력 싸움에 패배한 개가 짖는 소리엔 관심 없단 뜻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별 볼 일 없는 용건으로 날 불러세웠군.”

중정부장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태성의 브레인이 직접 마련한 자리인 줄 알고 나왔는데 말이야. 이거 실망이 커.”

“실망하시기엔 아직 이릅니다.”

탁.

김 비서는 은색 빛이 도는 녹음기를 꺼내 올렸다.

한가운데 크게 중정 마크가 박힌 물건이었다.

“중정 제1차장이 코라이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김형원 전(前) 중정부장을 유럽으로 빼돌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형원을?”

중정부장의 눈썹이 까딱했다.

김형원 전(前) 중정부장을 귀국시키는 것, 귀찮은 입을 틀어막고 코라이 게이트를 흐지부지 무산시키는 것.

그게 대통령이 중정부장에게 맡긴 최우선 순위 임무였다.

김 비서는 술주전자를 들어 중정부장의 도자기 술잔에 쪼로록 따랐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실 정도의 용건은 될 것 같지요?”

“김형원의 신원은 미국 정부가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그러니 몰래 작당해 봤자 실행 불가능한······.”

탁.

김 비서는 곱게 접힌 쪽지를 올려놓았다.

“김형원의 행방, 잡았습니다.”

“뭐?”

중정부장은 도로 비단방석에 털썩 앉아 양반다리를 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지 김 비서가 따른 술잔을 한입에 털어넣었다.

“자세히.”

< 중정부장과 담판 짓다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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