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숟가락 얹기 (1) >
유종태는 중정부장과 김 비서가 들어가 있는 옆방 벽에 귀를 바싹 대고 숨을 죽였다.
“중정부장이 도련님더러 직접 나서서 확실하게 처리해줬으면 한다는군요.”
내가 일부러 청원각 옆방을 달라고 요구한 이유였다.
이곳엔 몰래 듣는 귀를 심을 만한 장치가 된 방이 존재했다.
바로 이 방처럼.
유종태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속셈이 뭘까요?”
“이참에 태성의 능력을 제대로 시험해보겠다는 거죠.”
하나 더.
“중정의 일개 요원이 아닌 태성에게 공동 책임을 담보받겠단 뜻이기도 하고요.”
중정부장은 철구 아저씨만으로는 마음이 안 놓인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미 철구 아저씨가 김형원의 신원을 파악했다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미국에 파견된 중정요원들이 2년이나 목을 맸는데도 잡지 못한 꼬리를 철구 아저씨가 잡았어요. 솔직히 황당하고 뜬금없는 일이잖아요.”
나도 못 믿겠다 싶은데, 중정부장은 오죽하겠어?
‘하지만 그건 진짜거든! 철구 아저씨가 주소를 적은 쪽지엔 황금빛이 번쩍거렸다니까?’
이걸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저기 주안상에 올린 쪽지는 그저 은빛이 은은하게 감돌 뿐이지만, 철구 아저씨가 내어줬던 쪽지는 달랐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와 할아버지가 써준 계열사 인수 각서만큼이나 빛나는 쪽지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황금빛이 얼마나 눈부시게 번쩍거리던지.
아직 떨어지지도 않은 콩고물에 눈이 멀어 군침이 절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대체 왜? 김형원이 뭐라고 쪽지가 황금빛이래?’
이건 솔직히 나도 이해가 잘 안 간다.
김형원을 잡는 대가로 중정부장이 약속한 것은 고작 세 가지 일을 돕겠다는 것뿐이다.
그 정도로 황금빛이 이렇게 요란하게 번쩍거릴 일인가?
‘몇 번이나 다시 주판알을 튕겨 봐도 계산이 안 맞아. 기대한 것 이상으로 쪽지가 황홀하게 빛나. 어째서?’
그러니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김 비서님도 쉽게 대답을 못 하십니다. 확실히 일이 좀 껄끄럽게 돌아가나 봅니다.”
유종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사실 난이도가 너무 높은 일이긴 하죠. 그 김형원이라잖습니까.”
“그건 별문제가 안 돼요.”
솔직히 말하면 까짓것 못 할 것도 없다.
“중정부장님의 목표는 일견 몹시 까다로워 보여도 알고 보면 단순해요.”
전(前) 중정부장 김형원을 귀국시켜 코라이 게이트를 덮을 것.
“지금까지 이걸 달성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김형원의 행방이 미국 정부의 비호 아래 꽁꽁 숨겨졌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미 빡대가리 빡중령님은 김형원의 거처를 찾아내셨죠.”
“김형원을 덮쳐 강제 귀국시키는 것만 해도 미션 클리어거든요.”
“······간단하네요?”
유종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웃었다.
“김형원 때문에 속깨나 끓였을 대통령이라면 두 손 들고 크게 반길 일이군요?”
“중정부장은 충성을 증명할 수 있을 테고요.”
“와우.”
“대통령의 총애를 사고, 신임을 두텁게 다지는 기회일 테니, 중정부장으로선 태성을 세 번이나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단 약속을 내걸 만하죠.”
이 나라 최고 통수권자의 기대와 총애를 사긴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게 따지면 세 가지 약속도 싸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네요.”
“아니, 왜요?”
남의 뜻에 끌려다니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중정부장님이 철구 아저씨에게 제시한 기한은 1년이에요. 미국까지 날아가서 최소 1년 동안 저 일에만 매달리란 소리잖아요.”
“타임 리미트 때문에 그러세요? 그거라면 태성그룹 경호원들을 잔뜩 끌고 가면······.”
“그런 건 고려할 사항조차 안 돼요.”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인력이 부족하면 현지에서 수급하면 그만이거든요.”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거든.
뒷골목을 뒤지는 것처럼 슬럼가나 갱단을 뒤져서 적당한 놈들을 물색해서 갖다 쓰면 끝.
“이참에 큰 공을 세우면 태성의 앞날이 창창할 겁니다. 혹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돼서 그러십니까?”
“누가 공을 못 세울까 봐 걱정이래요? 그딴 건 걱정거리 축에도 안 든다니까요.”
“아니, 그럼 왜요? 거절하기 아까울 만큼 좋은 기회잖습니까?”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에요!”
“······.”
유종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입학도 하기 전에 혼자 1년이나 미국에 가겠다고 하면요?”
“······어?”
“그걸 어떤 부모가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볼 것 같아요?”
“어어······?”
“내가 열여덟만 되었어도!”
유종태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와우, 상상도 못 했던 이유!”
그렇다고 중정부장이 오해하는 것처럼 우리 아버지에게 일을 떠맡길 수도 없고!
‘아버지는 5년으로 내정된 서울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아 총력을 다하고 있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을 고작 이런 일로 귀찮게 할 순 없지.’
에휴, 어쩔 수 없구만!
“대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중정부장님의 기대에 부응할까 해요.”
“다른 방식이요?”
“모름지기 모든 일은 결과만 좋으면 장땡 아니겠어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중정부장님이 실패했던 두 가지 공작, 시원하게 해결해주겠다고 전하세요.”
대통령이 코라이 게이트를 중정부장에게 일임한 이후, 그는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김형원의 회유와 자금줄 회수.
“은닉 재산을 중간에 빼돌려 털어먹는 건 제법 자신 있거든요.”
이건 내 전문 분야라고 봐야 한다.
여러 번 해봐서 더 잘 해먹을 수 있다!
‘내가 왜 신림동 개미지옥이라고 불렸겠어.’
가진 거라곤 젊은 몸뚱이밖에 없던 내가 빠른 시간 내에 대한민국 음지를 휘어잡는 다섯 거물 중 하나가 된 이유였다.
“우후훗!”
“와우, 방금 엄청나게 비열한 웃음!”
함정을 판 후에 목표를 끌어들여 탈탈 털어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
* * *
전화를 한 통 하고 오겠다고 나갔던 김 비서가 돌아왔다.
가만히 김 비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중정부장은 마침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좋아.”
중정부장은 턱을 쓸었다.
“태성의 브레인이 그리 호언장담한 일이라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군.”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날고 긴다는 중정요원들이 2년 동안 전심전력으로 매달려도 안 됐던 일인데 말이야.”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잖습니까.”
“김형원를 귀국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놈이 숨기고 있는 은닉재산을 회수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일 텐데.”
“제안하신 1년. 그 안에 승부를 보겠습니다.”
“좋아.”
중정부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안에 김형원만 내 손에 쥐여준다면야. 자금줄 잡는 일은 5년 정도 기한을 늘려줄 용의가 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벌써 중정부장의 입에서 세 번이나 좋아 소리가 나왔다.
매사가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만큼 중정부장은 긍정적인 확답을 쉽게 내리지 않는 사내로 유명했다.
“내가 어디까지 지원해주면 될까?”
“미국에 파견된 중정요원과 로비스트의 지휘권과 수사권 일체.”
“그것 가지고 되겠어?”
“로비에 참여했던 우광이 적극적인 협조한다면 더 좋겠지요.”
“좋아.”
벌써 네 번째 좋아 소리가 나왔다.
“우광의 김 회장에게 똑똑하게 전달해 두지.”
중정부장은 호쾌하게 웃었다.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안 그래도 쪼그라든 우광을 미라처럼 바짝 말려버리겠다고.”
서슬 퍼런 협박이 될 터였다.
“세무조사랑 압수수색은 물론 서빙고 물고문실과 전기의자도 준비해 놓겠다.”
중정부장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미국 대사관에 공문도 띄워놓지. LA 주지사에게도 따로 전화 한 통 넣어놓으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무운을 빌지.”
중정부장은 비단방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김 비서와 철구 아저씨는 툇마루까지 따라나와 90도로 허리를 굽혀 중정부장을 배웅했다.
* * *
딱.
‘어이, 수호신.’
[가고 있다! 옆방으로 가고 있다고! 보채지 좀 마라!]
‘로비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드라마 보고 있던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크흐흠!]
저승사자는 뒷머리를 긁으며 옆방으로 사라졌다.
이번엔 심 사장과 우광의 김대식이 마주하고 있는 왼쪽 방.
중정부장과 김 비서가 자리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로 배치된 쌍둥이 방이었다.
똑똑똑.
“들어오십시오.”
심 사장의 목소리였다.
김 비서는 아까 몽블랑 만년필로 휘갈겨 적은 쪽지를 심 사장에게 전하고 나갔다.
심 사장은 말없이 김 비서의 쪽지를 읽고 피식 웃었다.
반면 심 사장이 건넨 쪽지를 읽던 김대식은 손에 쥔 걸 와락 구겼다.
“하!”
그건 내가 보낸 협박 쪽지였다.
“내 딴에는 최대한 우호적인 동맹 제안을 건넸다고 생각합니다만.”
우광의 김대식이 쥐고 있던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우광은 지주회사의 지분 7%나 내놨습니다. 그 정도면 성의 표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와락 구겨졌던 쪽지 세 장이 동그랗게 찌그러져 굴러다녔다.
“이게 태성의 대답입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태성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우광의 김대식은 붉으락푸르락해서 씩씩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 사장은 도자기 술주전자를 들어 제 잔을 쪼로록 채웠다.
“태성의 호의였습니다만?”
“호의? 이게 어딜 봐서 호의란 말입니까?”
우광의 김대식은 분개했다.
“코라이 게이트는 우리 우광의 몫입니다. 거기에 태성이 밥숟가락을 얹겠다고 선언한 것도 모자라서······!”
“왜요. 억울하십니까? 그렇다면 진즉에 우광 선에서 수습을 잘하셨어야죠. 우리 태성에게까지 똥물 튀길 게 아니라.”
“똥물이라니. 거 말이 너무 심하시네!”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심 사장은 술잔을 홀짝였다.
다크서클이 깊게 패이고,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심 사장은 술이 들어가자 미간을 와락 구겼다.
“에라이!”
심 사장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 품에서 구취 제거제를 꺼내 칙칙 뿌렸다.
“아무래도 과로 때문에 간이 썩은 게 분명해.” 하며 작게 투덜거린 건 덤이었다.
그럴수록 우광의 김대식은 더욱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능력이 안 되면 돈이라도 대라고?”
우광의 김대식이 겉면에 1이라고 적혔을 터이나, 이미 잔뜩 구겨져 숫자를 알아보기 힘들어진 쪽지 뭉치를 심 사장에게 던졌다.
“코라이 게이트에 밥숟가락 얹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고?”
탁.
우광의 김대식은 겉면에 2라고 적혔던 쪽지 뭉치를 또 던졌다.
쪽지 뭉치는 심 사장의 얼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우광그룹 지주회사 지분 7%를 내놓은 값이라고? 이런 빌어먹을!”
겉면에 3이 적힌 마지막 쪽지까지 심 사장의 얼굴에 던졌다.
그런데도 우광의 김대식은 씩씩대는 거친 숨을 고르지 못했다.
“뻔뻔해도 유분수지! 지금껏 코라이 게이트 때문에 우광이 얼마나 많은 돈과 수고를 감수했는데!”
“그것까지 태성이 알아야 합니까?”
심 사장은 가차 없이 김대식의 말을 잘랐다.
“대통령 각하께서, 중정부장께서 알아야 하는 사항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심 사장!”
“우린 코라이 게이트 때문에 우광이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엔 관심 없습니다. 또한 우광철강이 지난 4년간 왜 적자만 보고 있었는지도 알 바 아니고요.”
“그걸 어떻게······!”
우광의 김대식은 표정을 굳혔다.
우광철강이 막대한 적자를 보는 것으로 기록된 진짜 이유는 바로 코라이 게이트 때문이었다.
우광이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지금껏 승승장구했던 숨겨진 까닭이기도 했다.
심 사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 싫으면 빠지시든가요. 그것까진 안 말립니다.”
심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우린 우광의 협조가 없어도 상관없거든요. 그럼 이번 일의 공은 전부 태성이 먹는 것으로 얘기 끝냅시다.”
“잠깐!”
우광의 김대식은 손을 들었다.
“그럼 우광의 지주회사 지분 7%는?”
“코라이 게이트에 밥숟가락도 안 얹겠다는데, 남의 회사 지분을 날로 먹을 생각은 없으시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탁.
심 사장은 김 비서에게 받은 쪽지를 주안상 위에 올렸다.
“중정부장님께서 코라이 게이트를 닫기 위해 우광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하셨답니다.”
“적극적인 협조? 중정부장께서?”
“참고로 우광이 뒤를 봐주고 있던 전(前) 감찰국장과 그 휘하 중정요원은 물론 중정 제1차장까지 서빙고 물고문실행이 확정됐다는군요.”
“뭐?”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시든가.”
심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반면 김대식의 안색은 희게 질려갔다.
“조만간 중정에서 전화가 갈 겁니다. 중정부장님께서 우광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안 그래도 쪼그라든 우광을 미라처럼 바짝 말려버리겠다더군요.”
“중정부장님께서?”
“세무조사랑 압수수색은 물론 서빙고 물고문실과 전기의자도 준비해 놓겠다는데. 김 회장님께선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 어떻게 이런······!”
“이 정도면 우광그룹 지주회사의 지분 7%의 값이 되셨을까요?”
희게 질렸던 우광의 김대식의 안색은 바로 시꺼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 밥숟가락 얹기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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