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해야지 >
JH투자회사 사무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우우······ 미치겠네.”
누군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광 계열사에서 이곳으로 차출된 엘리트 실무진들이었다.
한 사람이 한숨을 터뜨리자, 파티션 너머 여기저기서 볼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는다. 진짜 저세상 업무 강도······.”
“방금 맡은 일을 겨우 해치웠는데요, 짜잔, 또 생겼습니다?”
“이 나이에 과로사 걱정할 때인가······.”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뒈질 것 같아······. 우욱!”
과외 선생들이 혀를 찼다.
“나약한 소리! 누가 회사에서 이런 어린애나 할 법한 응석을 부리죠?”
“우광은 원래 이런 식으로 농땡이 피우나요? 이게 말로만 듣던 월급 도둑?”
“이해할 수가 없네요. 월급을 받았으면 그만큼의 일은 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능력이 있으면 또 몰라. 일도 참 더럽게 X같이 못해요.”
우광 계열사에서 선별되어 끌려온 자들은 일 잘하기로 소문났던 과장급 이상 인사들뿐이건만.
과외 선생들은 그들을 몹시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깟 잡무 좀 돌렸기로서니. 양심 다 죽었어요? 죽는소리를 내시네?”
“대기업 관리자급 유능한 실무진들이라고 해서 전 상당히 기대했었단 말이죠. 이거 실망이 큽니다.”
“동감이에요. 어떻게 종일 일하고도 저것밖에 못 할 수가 있죠? 효율이 쓰레기잖아요.”
우광 계열사의 엘리트 실무진들에겐 모욕과도 같은 평가였다.
하지만 과외 선생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딴 잡무는 탕비실에서 커피 타면서도 해치울 수 있는 난이도인데요.”
“10분짜리 과외용밖에 안 될 일에 세 명이나 매달려 있다고요?”
“15장짜리 보고서를 쓰는 데 이틀이나 걸려요? 이거 고작 30분짜리 업무예요!”
우광 계열사 실무진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우광에서는 나름 임원급을 노릴 만한 엘리트로 손꼽히던 그들로선 여러모로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뭐지? 설마 이거 단체로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신입 사원 똥군기 잡듯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들이 회사 일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깝죽대?’
‘이 새끼들아, 네놈들이 직접 해 봐! 우리 계열사 10년 치 업무를 깔끔하게 표와 도식으로 정리해 오라는 게 네 눈엔 잡무로 보이냐?’
코웃음밖에 안 나왔었다.
그런데 이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들이랑 같이 일을 해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코웃음이 기함과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니, 무슨 일을 저렇게 거침없이 해치워? 근데 잘해······. 너무 잘해······.’
‘이건 뭐 일하는 머신이야? 사람이 어떻게 쉬지 않고 소처럼 일만 하지?’
과외 선생들은 정시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손을 놀린다.
그들의 목표는 이상하리만치 똑같았다.
-과로사로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의 업무는 오늘 끝내자!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사수하기 위하여!
-잠은 죽어서 자도 충분하다! 회사는 놀이터가 아니라 일터다!
그들은 우광의 신입 사원만큼이나 앳된 얼굴로 능숙하게 보고서를 작성한다.
기계처럼 단련된 펜 놀림과 언제 어디서 투입되어도 순식간에 완벽하게 처리 가능한 만능 잡무 스킬!
무서운 집중력에 눈보다 빠른 서류 검토,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타자기 속도까지!
아침마다 산더미같이 쌓이는 업무를 쌓인 눈 쓸어내듯 해치운다.
‘와, 단체로 이렇게까지 눈깔이 돌았다고? 진짜 미쳤네.’
‘이렇게 일하고도 앓는 소리 한 번을 안 내? 여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회사야?’
‘태어나서 이 정도로 지독하게 일하는 작자들은 진짜 처음 본다!’
‘아직 졸업도 못 한 대학생들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냥 과외 하러 왔다가 일하게 됐다던데.’
‘아니, 무슨 대학생 과외 선생이 나보다 더 일을 잘해?’
우광 계열사 과장급 이상 실무진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파랗게 어린 과외 선생들이 본격적으로 업무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면 지옥불 한가운데에서 구르게 되는 일상이 반복되곤 한다.
이름하야 곡소리의 시작을 알리는 상쾌한 아침 업무 분담!
“김 과장님, 우광조선에서 8년 근무하셨다면서요. 고작 5년 치 영업 자료 보고서로 만들어 올리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일반적인 영업 자료 보고서라면 또 몰라도, 거래처별로 월별로 분기별로 기간별로······.”
“그 정도는 기본이잖아요? 회사일 처음 해봐요?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해요?”
과외 선생 하선우는 캐비닛을 뒤져 자신이 예전에 작성해 올렸던 파일철을 꺼내 던졌다.
우광조선 김 과장은 향후 임원 자리를 예약해둔, 임원들의 관심과 총애를 듬뿍 받던 엘리트 사원이었다.
그만큼 일을 잘했고, 야망도 컸으며, 일머리도 좋고, 요령도 뛰어난 데다, 사내 정치에도 능한 남자였다.
그런 그를 두고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이래라저래라 업무 지시를 하고 있으니 자연 못마땅한 표정이 될 수밖에.
하지만 그는 파일철을 펴 보았다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우광의 41개 계열사의 3년 치 주식 등락폭을 월별로 정리해서······.”
“제 첫 업무였는데요? 쉽던데요?”
“이걸 작성하는 데 몇 달이나 걸리······.”
“이틀이요.”
“······.”
우광조선 김 과장은 속으로 쌍욕만 자동반사적으로 터뜨렸다.
어디서 구라를 까!
“그래 봐야 기초 잡무. 그거 참고해서 내일까지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세요. 가 봐요.”
대체 인력을 얼마나 갈아넣어야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저걸 첫 업무로 해치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건 도저히 혼자 못 하는 일이야!’
우광조선 김 과장은 피식 웃었다.
“팀원을 몇 명 더 붙여주······.”
“그까짓 거 만드는 게 뭐 그리 대수······ 으헉! 내 피 같은 183초! 이 시간이면 해치우는 서류가 몇 장인데!
과외 선생 하선우는 새파랗게 질려서 즉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손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어떻게든 흘러가버린 시간 내 업무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고작 3분 때문에 뭘 또 그렇게까지······.”
“3분 아까운 줄을 모른다고? 이거 상종 못 할 작자였네.”
“······.”
“꺼져요! 당신 때문에 내가 야근하게 생겼어!”
우광조선 김 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옆 파티션에 들어갔던 우광자동차 이 과장이 똑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우광자동차 10년 치 거래처 어음 지급 사항을 월별로 정리해서 거래처 등급을 산정하라니요!”
“기본 업무잖아요. 회사 일 처음 해봐요?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할 직급 아니시잖아요?”
탁.
“아니, 어떤 미친놈이 태성건설과 태성화학 10년 치 거래처 어음 지급 사항을 제품별로 월별로 정리해서 거래처 등급 산정을 했답니까?”
“이 정도는 수습사원 때나 하는 잡무잖아요.”
“대체 어떤 미친 회사가 이런 업무를 수습사원 때 시킨답니까?”
“대체 우광은 얼마나 일을 대충 시키······ 으악! 내 피 같은 249초! 망했어! 이러다가 결재 한 건 빵꾸다!”
그렇게 이 과장은 쫓겨났다.
우광자동차의 브레인이자, 마케팅의 귀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이 과장이었다.
그는 이미 멍하니 동공이 살짝 풀려 있었다.
건너편 자리에서는 우광중장비 박 과장이 대차게 깨지고 있었다.
“우광중장비 영업팀이셨다면서요? 우광중장비를 6년 동안이나 팔았으면 세상에 못 파는 물건 없겠네요?”
박 과장은 우광중장비 영업왕으로도 뽑힌 적 있는 세일즈 업계의 굵직한 네임드였다.
“저는 7개국 23개 은행을 시작으로 요즘은 63개국 1,254개 은행에 접선해서 700개 기업의 7년 치 주식 등락을 검토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사수 앞에서는 명함도 못 꺼낼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굼벵이처럼 영업 뛰어서 어느 세월에 제 업무를 인수인계 받는답니까? 쯧쯧쯧.”
과외 선생들은 보고서를 만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혀, 저런 놈들도 인력이랍시고 데려와서 가르치라니. 내가 저런 과외 하려고 여기 온 줄 아시나.”
“그 와중에 내 업무도 펑크 내면 안 된다니. 에라이, 짬 안 되는 우리만 죽어나지, 이 지긋지긋한 잡무!”
“무능과 엄살은 우광의 기업 문화일까요? 심 사장님이랑 우리 보스가 일하는 거 보면 쇼크사하겠네.”
탕탕탕!
험악하고 묵직하게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
전(前) 태성건설 임원이었다.
“회사가 놀이터야? 입 놀리느라 손 안 놀리지?”
박력이 넘쳐서 소름이 쭉 돋았다.
전(前) 태성건설 임원들은 구취제를 입안에 칙칙 뿌리더니 냉장고에서 보약을 꺼내 마셨다.
“전국 팔도 우광 계열사 공장마다 들러서 실무 현황 일일이 확인하느라 지금 뒈질 것 같거든?”
“지역 고위 행정 관료 만나서 굽신대야지, 지역 유지들 만나서 굽신대야지, 지역 은행 센터장들 만나서 굽신대야지!”
“우리는 전국 돌면서 인수한 계열사 장부 뒤질 때마다 까이고! 노조 상대한다고 까이고! 보고서 만들어서 결재받으려고 또 올라와서 까여! 맨날 까여!”
“졸음운전이 얼마나 무서운지 늬들이 알기는 해?”
“겨우 술 접대 숙취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이젠 멀미랑 허리 디스크로 요절하게 생겼어!”
어느새 조용하던 복사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자 치는 소리도 더 빨라지고, 캐비닛 뒤져 서류 찾는 소리도 부산스러워졌다.
전 태성건설 임원들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런 나약한 것들! 잡무밖에 안 하는 주제에 징징대기는!”
그때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심 사장이 퀭한 얼굴로 “손수레 가져와!” 하고 외쳤다.
“이 소리도 삼백마흔두 번째인 것 같은데. 자랑도 정도껏 작작 하십시오. 나 도와줄 거 아니면 입 닥치라고!”
“······.”
“이 새끼들이 입 닥치랬다고 진짜 닥치냐? 우광, 늬들까지 날 모른 척하면 안 되지! 나름 엘리트 실무진들이라며!”
“······.”
“이런 시발!”
심 사장은 김 과장이 돌돌돌 끌고 온 손수레 위에 박스를 올렸다.
박스 안에 결재서류를 마구 쑤셔넣으며 이를 갈았다.
“황금 라벨 붙은 박스만 처리하면 된다며! 과로사하지 않도록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에 힘쓰라며! 인력 충원을 해주면 뭘해, 일거리는 몇 곱절로 쑤셔박는데!”
심 사장은 체통과 이성마저 잃고 으르렁거렸다.
“내가 미쳤지! 태성의 미래를 위한 대계를 책임지기는 얼어죽을! 난 태성의 미래를 책임질 깜냥이 안 되는 쓰레기야! 재활용도 안 되는 핵폐기물급 산업 쓰레기가 바로 나라고!”
심 사장이 결재서류가 가득 담긴 박스를 네 개나 싣고 손수레를 직접 돌돌돌 밀었다.
“이왕 과로사를 해야 한다면 대한민국 재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긴 개뿔! 매일 이렇게 개처럼 일하다 뒤질 바엔 지금 당장 목매달고 뒤지는 게 호상(好喪)이지!”
전(前) 태성건설 임원들이 모른 척 차 키를 챙겼다.
인수한 우광의 지방 공장을 둘러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똑똑똑.
딸랑.
사무실 문이 열렸다.
아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심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문 손님을 확인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중동 갔던 태성화학 임원들이 돌아왔잖아?”
“심 사장님, 제가 드디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
“어서 오게, 자랑스러운 태성의 일꾼들! 눈알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네!”
심 사장이 햇살처럼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강준구 신임 태성화학 사장 예정자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경례를 붙이려 할 때였다.
“자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일해야지.”
“예?”
“귓구멍 막혔어? 일하라고. 회사에 왔으면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저 지금 방금 귀국······.”
“그러니까. 일해야지, 태성의 일꾼.”
심 사장의 맑은 눈에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전(前) 태성화학 임원들은 움찔했다.
사우디 태양 아래에서 바쁘게 영업 뛰며 도로 공사, 도시 건설 공사하다 피부가 검게 탔던 전(前) 태성화학 임원들은 슬슬 눈치를 봤다.
“심 사장님, 여기 기념품······.”
“지금 기념품 나눠 가지면서 하하호호 할 때가 아니야. 일해야지.”
“예?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 한잔하며 안부······.”
“한가하게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어딨어? 손수레나 끌어. 일해야지.”
“저희는 아직 정식으로 발령받지도 않······.”
“정식 발령이 대신 일해주나? 할 일 많아. 사무실 치워야지, 공장 돌려야지, 장부 정리해야지, 재고 파악해야지, 원자재 발주해야지, 영업처 관리해야지, 불탄 공장 수습해야지.”
턱!
전(前) 태성화학 부사장이었던 강준구는 심 사장에게 뒷덜미가 잡혀 질질 끌려갔다.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야. 월급 받고, 회사 왔고, 숨 붙어 있으면 일해야지.”
전(前) 태성건설 임원들이 저마다 태성화학 임원들을 붙들고 질질 연행했다.
“그래도 한때 한솥밥 먹던 정도 정이라고. 보스 오시기 전에 날 만난 것을 다행인 줄 알······.”
딸랑.
“심 사장님, 마침 잘 만났네요.”
꼬마 도련님이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을 거느리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손수레 가득 서류 상자를 싣고 돌돌돌 밀고 있었다.
< 일해야지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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