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 이전 계획 (1) >
강 사장이 말했다.
“도련님, 그건 중요한 지도입니다. 함부로 낙서하시면 안 됩니다.”
송 부사장도 말을 보탰다.
“아직 점심 전이지요? 밖에 유 팀장이 기다리고 있던데, 같이 소고기 먹으러 가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심 사장이 혀를 찼다.
“왜 자꾸 도련님을 내쫓지 못해서 안달이야?”
“심 사장님.”
“사우디에서 더위 먹었어? 왜 자꾸 헛소리를 해?”
“지금 한가하게 어린애랑 놀아줄 때가 아닙니다.”
“누가 한가하대? 지금 일하느라 눈 돌아가게 바쁜 거 안 보여?”
“태성화학의 미래를 논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심 사장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서류뭉치를 들어 응접실 테이블 위에 쿵 내려놓았다.
“이게 다 태성화학 재정비에 관한 일거리다. 이걸 누가 다 준비했다고 생각해?”
“심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
“나 아니고, 정혁 도련님이야.”
“······예?”
“귓구멍 막혔어? 이거 다 정혁 도련님께서 추진하시던 일이라고 했다.”
“예에?”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설마 이게 다 도련님의 경영 수업 자료인······.”
“자꾸 헛다리 짚을래? 왜 사람이 말을 하는데 못 믿어? 보라고.”
심 사장이 내가 그리고 있던 여천국가산업단지 공장부지 예정도를 탕탕 내려쳤다.
“이걸 누가 그리고 있었어? 직접 봤으니까 알잖아?”
“그래서 아까 낙서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봐놓고도 믿을 생각이 없나 보군. 잘 봐. 이게 내 글씨야?”
심 사장은 여천국가산업단지 공장부지 예정도에 적힌 내 글씨와 별표를 콕 찔러 가리켰다.
입주에 고려해야 할 중요 사항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표시해놓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심 사장의 최측근으로 일해왔던 만큼 그들은 금세 심 사장의 글씨체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우리 정혁 도련님은 태성의 브레인, 태성의 미래, 태성의 후원자, 태성의 기둥이시다!”
“······.”
심 사장이 암만 열변을 토해도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좀처럼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보기엔 난 운 좋게 부모 잘 만난 여덟 살짜리 재벌 3세일 뿐일 테니까.
“귀신에 홀린 것 같지? 안 믿기지? 어처구니가 없지? 이해해. 나도 그랬어.”
심 사장은 손짓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일단 자리에 앉지. 이럴 때일수록 보약부터 마시면서 차근차근 말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지금 보약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보약은 원래 몸이 허해지고 정신이 나갔다 싶을 때 챙겨먹는 거야. 잔말 말고 일단 마셔.”
심 사장은 전용 냉장고에서 보약을 꺼내 휙휙 내던졌다.
강 사장에겐 녹용진액이, 송 사장에게는 공진단이 떨어졌다.
심 사장이 택한 것은 홍삼 액기스였다.
“심 사장님, 정혁 도련님은 고작 여덟 살이십니다.”
“그래, 그래. 나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지.”
“여덟 살짜리가 태성화학 입주 계획을 추진했다는데,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래, 이해해. 나도 그랬었다니까?”
심 사장은 홍삼 액기스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때였다.
벌컥!
“심 사장, 사무실이 왜 이렇게 텅텅 비었어? 지금 업무시간 아니야? 단체로 워크샵이라도 보냈어?”
“회장님!”
할아버지와 김 비서였다.
할아버지는 날 보더니 헤벌쭉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달려왔다.
“아이고, 우리 정혁이가 여기 와 있었구나!”
할아버지가 수염 때문에 까끌까끌한 뺨으로 내 뺨을 부볐다.
날 끌어안고 사무실에서 뱅글뱅글 돌 것 같은 기세였다.
당장이라도 쪽쪽 뽀뽀를 퍼부을 것 같아서 나는 들고 있던 뻥튀기를 할아버지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 부사장이랑 송 전무로구만?”
김 비서가 즉시 정정했다.
“회장님, 이번에 각각 사장과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 났습니다.”
“그래, 강 사장과 송 부사장. 중동에서 고생 많았다지?”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공손하게 악수했다.
“회장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중동에서 우리 식구들이 큰 공을 세우고 금의환향 영전했다는데 당연히 내다보러 와야지.”
둘은 감격한 표정으로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안 그래도 태성화학 일로 심 사장님과 긴히 논하려던 참입니다.”
“그걸 왜 심 사장이랑 논하려고 들어? 앞으로는 정혁이랑 해.”
“······예?”
“태성화학 대주주, 우리 정혁이잖아.”
“네?”
“내가 태성화학 지분 일체를 정혁이에게 넘겼다.”
“네엑?”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렸다.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돌아봤다.
기함과 경악이란 말 외에 다른 단어를 붙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게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성준 도련님이라면 또 몰라도, 정혁이 도련님께 지분 일체를 넘기셨다고요?”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면 300억짜리 회사 지분이 여덟 살짜리 도련님께 갑니까?”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공을 세워서 재주껏 가져가더라. 금쪽같은 내 새끼는 수완이 제법 좋거든!”
우광에 넘겼던 태성화학의 지분과 우광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까지 전부 다.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이 태성에 넘겨주기로 했던 것 몽땅 다.
-정혁이가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온 공 역시 인정해 이와 관련된 것 또한 정혁이의 몫으로 인정한다.
-네 어머니 혼수로 얹어 보내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 네 것을 네가 어떻게 처리하든 난 관여치 않겠다. 그러니 네가 직접 어미한테 지분을 증여하든가 말든가.
그렇게 태성화학 지분은 내 몫이 되었다.
‘어머니가 지분 증여받는 것을 반대하고 계신 관계로.’
시아버지가 챙겨주는 아들의 몫을 빼앗기 싫다나 뭐라나.
여튼 그래서 아직 내가 태성화학 지분을 전량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할아버지는 응접실 소파 상석에 털썩 앉고는 무릎 위에 날 턱 올렸다.
“자, 태성화학으로 긴히 논할 문제란 게 뭔지 같이 들어도 되려나?”
심 사장이 즉시 대답했다.
“원래 내부 회의엔 외부인 참관 금지가 기본 아닙니까?”
“내가 태성그룹 총수인데?”
“태성화학 주식은 있으십니까?”
“주식 없는 건 자네도 똑같지 않나?”
“태성화학 지분은 JH투자회사에서 위임받아 관리하잖습니까. 제가 여기 사장입니다만?”
“······.”
“원래 회사는 지분 많이 가진 사람이 왕입니다만?”
“······.”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입을 떡 벌리고 할아버지와 나, 심 사장을 번갈아 봤다.
심 사장이 저러는 의도야 뻔했다.
‘두 사람에게 태성화학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짚어주려고 저러는군.’
할아버지도 그 속내를 알고 있으니 저렇게 입맛만 다실 수밖에.
호로록.
나는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서 인삼차를 마셨다.
적당히 쌉쌀한 것이 암만 봐도 6년근 인삼!
마음에 든다.
“심 사장님, 너무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세요. 할아버지 섭섭하시잖아요. 태성은 한 가족!”
“아이고, 내 새끼! 그렇지, 태성은 한 가족! 나 정혁이 할애비다!”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할아버지와 의논하고 싶었거든요.”
“나한테?”
“현재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태성의 중화학 공업기지를 두 군데로 모으면 어떨까 해서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속으로 이것저것 재고 따져보는 모양이었다.
“두 군데라면 어디와 어디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
“울산과 여천이요.”
현재 울산에는 태성자동차와 태성중장비, 태성기계와 태성금속 등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여천국가산업단지에 또 다른 거점을 만들면 어떨까 해요.”
“흐음.”
“태성화학을 포함해 우광에서 인수한 계열사 전부를 이곳에 집어넣어 방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요.”
방산과 중공업의 시작은 석유화학이다.
심 사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을 돌아봤다.
“그래, 태성화학의 최근 현황은 다 파악했고?”
“예.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더군요.”
“공장을 제대로 돌리려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얼굴을 굳혔다.
“자네들이 보기에 태성화학이 직면한 문제는?”
“이대로라면 태성화학 제품을 제대로 납품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안은?”
“공장을 추가 건설해야 합니다.”
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됐군.”
“그래서 아까 여천국가산업단지에 관해 얘기를 꺼내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할아버지와 김 비서는 여천국가산업단지 공장부지 예정도를 힐끔 내려다봤다.
“태성화학은 제6 공장을 날려버린 상태라 어차피 공장을 다시 지어야 할 상황입니다.”
“기존의 공장 생산라인을 가동하면서 제6 공장을 짓는 건 좀 번거로운 일이긴 하나, 못할 것도 없긴 하죠.”
“하지만 안 그래도 태성화학은 공장 가동력이 포화 상태라 공장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인근에서 마땅한 공장부지를 찾기 어렵다는 겁니다. 확장이 불가합니다.”
“석유화학 산업이라는 게 입지조건이 퍽 까다롭잖습니까.”
괜히 나라에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만들어 육성하는 게 아니다.
석유화학은 중간재 및 전처리 단계에 있는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원료와 제품을 다룬다.
1. 생산물 위주로 화학 계통적 결합을 통해 제품 생산의 집중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2. 원료에 해당하는 제품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제공받기 위해서.
3. 제조원가의 절감과 부산물 및 폐기물을 자체 소진할 수 있도록.
석유화학 기업을 모아서 집중 육성하는 곳이 바로 석유화학 산업단지였다.
“지금까지 태성화학은 이 정도 공장 규모로도 커버 가능했었습니다만.”
“지난 7년 동안 태성화학의 규모가 기대 이상으로 커진 게 문제라면 문제겠죠.”
7년 전 자본금 10억으로 출발한 태성화학은 어느새 300억짜리 회사로 성장했다.
“그동안 원재료 가공 생산 기술이 크게 성장한 덕분이랄까요?”
“다루는 석유화학 공정이 더 정교해지고 많아진 만큼 내놓는 제품군도 다양화되었습니다.”
“더구나 몇 가지 히트 상품 덕분에 시장에 내놓는 완제품도 점차 증가하고 있지요.”
“현재의 공장 규모와 수준으로 이를 커버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심 사장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했다.
“안 그래도 진즉 공장 이전 문제가 대두되곤 했었지.”
“이전하기 딱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태성화학은 이미 내수를 중점으로 두는 중소기업 규모를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까지 수출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 사장은 여천국가산업단지 공업부지 예정도를 내려다보았다.
“여천국가산업단지는 내년 10월 완공 예정이라지요?”
“산업도로 건설은 69년에 마무리되었지만, 본격적인 입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입주가 멀었기는. 송년의 밤에서 다들 수군대는 소리는 못 들었나?”
“그땐 태성건설 후원자들을 모시고 계약서 쓰느라, 크흠!”
“······.”
할아버지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침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그린 공장부지 예정도가 펼쳐져 있었다.
“정혁아, 할애비가 노안이 왔나 보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느냐?”
“이건 작년에 건설한 남호화학 제7 비료공장이에요. 연 260만 톤을 생산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 생산 시설이죠.”
같은 표시는 여러 군데에 해놨다.
“올해 입주 예정되어 있는 대규모 석유화학 공장들을 표시해 봤어요.”
현재만 따져도 이 정도다.
이곳은 향후 여천화학, 녹산화학, 금조화학, 삼남화학, 청월화학, 삼황화학, 일성화학 등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화학공장이 빼곡하게 들어설 예정이다.
21세기 기준 283개 업체, 약 2만여 명이 근무하는 대한민국 3대 석유화학단지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 공장 이전 계획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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