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 이전 계획 (2) >
할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여천국가산업단지에 태성화학을 이전한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난 인삼차만 호로록 마셨다.
두툼한 서류를 넘긴 심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멀뚱멀뚱 기다릴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준비하신 사업 계획서라도 검토하지.”
안 그래도 태성화학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정신없이 서류를 보느라 바빴다.
심 사장은 김 비서 쪽 테이블을 툭툭 쳤다.
“차 대신 보약 한 포, 어떻습니까?”
여천국가산업단지 입주 예산 편성표를 넘겨보던 김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심 사장은 대뜸 전용 냉장고에서 보약을 꺼내 김 비서에게 던졌다.
김 비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용봉탕’이라고 적힌 보약을 받았다.
“사무실에 왜 용봉탕이······. 아니, 다른 보약도 많아 보이는데 왜 하필 이걸······.”
“남자한테 좋은데,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
심 사장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의 자양강장제! 김 비서는 약발 좀 받는 체질이신가?”
김 비서는 여전히 옷깃에 먼지 하나 없고,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오지 않을 만큼 단정했지만.
은색 안경테 너머로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포착했다.
심 사장은 짓궂게 웃으면서 김 비서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우광과 파투 난 후 해외 유통망이 끊기는 바람에 매일 야근한다며? 집에 잘 못 들어갑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저도 일주일에 오륙일 정도 철야하거든요.”
“맙소사.”
“오늘은 이거 마시고 일찍 들어가시죠. 내일 아침엔 12첩 반상 받게 될 겁니다. 흐흐흐.”
심 사장이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김 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왜? 이거 귀한 겁니다.”
“아시다시피 해외 유통망을 개척한다고 요즘 따로 준비할 일이 많습니다.”
“쯧쯧쯧, 매일 밤 서류에 코 박고 씨름한다고 없던 해외 유통망이 뚝딱 생긴답니까? 매일 전보 날린다고 옳다구나 유통 계약 맺어준대요?”
심 사장은 김 비서의 어깨에 팔을 턱 올려놓으며, 날 향해 턱을 들었다.
“차라리 도련님께 부탁하는 편이 더 빠를걸요?”
“예?”
“왠지 오늘은 정혁 도련님께서 김 비서의 고충까지 단번에 해결해 줄 것 같단 말이죠?”
“예?”
“김 비서가 철야할 정도라면 회장님께서 골몰하는 문제일 게 틀림없으니까요.”
“설마······!”
“우리 정혁 도련님을 모릅니까? 이쪽 방면으로는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요.”
김 비서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 사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역시 회장님께는 쌍화차가······.”
“할아버지는 지금 느긋하게 계란 노른자 두 개 동동 띄워서 뜨끈하게 마실 정신 따윈 없을걸요?”
나는 방긋 웃었다.
“총명탕으로 하죠.”
“역시 우리 도련님!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기억력 증진과 집중력 향상에 특히 좋다죠?”
심 사장이 꺼내고, 내가 할아버지 입에 쏙 물려주었다.
할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가 작성했던 여천산업단지 공장 이전 사업 계획서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다.
반사적으로 쪽쪽 빨아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여천이지? 이왕에 공장을 이전할 거라면 울산이 낫지.”
할아버지가 날 고쳐 앉았다.
“정혁아, 여천은 아직 산업단지 조성이 다 끝나지 않았다. 이는 향후 미래 가치가 불확실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해.”
안다.
“정부에서 야심 차게 산업단지 건설을 밀어붙였지만, 대기업들이 외면한다면 실패한 산업단지가 될 테고, 그러면 향후 태성화학의 손해가 꽤 클 것이다.”
내가 그걸 왜 모를까.
이거 대한민국 3대 석유화학공업단지로 대성공한 21세기 여수산업단지의 위상을 줄줄이 읊어줄 수도 없고.
“하지만 울산은 다르다. 대기업이 속속 들어와 자리를 잡은, 대한민국 최대의 종합 중공업 단지가 되었어.”
일명 울산공업단지.
1967년 울산 정유공장이 확장되면서 석유화학 공업단지로 선정된 곳이다.
1972년 10월에 준공했으니, 여천국가산업단지에 비해 간접자본시설이 훨씬 잘 들어선 상태였다.
“우리 태성자동차와 태성중장비는 물론이거니와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도 이곳에 있다.”
1972년부터 염포와 미포지구에 자동차와 조선 공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태성기계와 태성금속 공장도 근처에 있고.”
효문지구에는 부품 및 계열 공장이 활발하게 들어섰다.
“울산은 정유를 중심으로 가까운 포항에서 철강을 납품받을 수 있다. 항만과 철도는 또 어떻고?”
알고 있다.
울산은 10년이 채 되지 않아 자동차 및 조선공업 중심의 기계장치 공업단지로 탈바꿈하는 곳이다.
“중화학 공업 집중이라는 목표에 들어맞는 곳이라면 역시 울산이지. 나는 왜 네가 울산을 두고 여천을 꼽는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할아버지가 내내 생각에 깊이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였다.
“설마 몰랐던 게냐?”
“그럴 리 있겠어요?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 우광조선까지 울산공업단지에 있는데요.”
“그런데도 여천으로 받은 계열사를 옮기겠단 소리가 나와?”
할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멀쩡히 울산에서 잘 돌아가는 우광자동차, 중장비, 조선 공장을 왜 굳이 여천으로 옮기려고? 손해가 막심할 텐데?”
“멀쩡히 잘 돌아가는 공장을 지금 당장 폐쇄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일단은 여천에 태성화학만 옮길까 해요.”
현재 태성화학 공장은 인천에 있다.
심 사장과 할아버지는 인천의 낡은 화학공장을 인수하는 것으로 석유화학에 진출했다.
지금으로선 이미 확장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답답한 듯 총명탕을 단숨에 쪽쪽 빨아먹고 빈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울산이 더 낫다니까. 현무화학과 조선화학도 울산에 있어.”
현무화학과 조선화학은 현재 대한민국 석유화학의 1위, 2위 기업이었다.
만든 지 고작 7년밖에 되지 않은 태성화학과는 비교할 수 없다.
기업 역사에서도, 규모와 매출 수준 및 제품군에서도 우위에 서 있는 거대 화학기업이었다.
“정혁아, 중공업은 서로 모여 있어야 시너지가 커지는 공업이다.”
“알아요.”
“그걸 알면서 왜 이리 똥고집이야? 왜 굳이 여천인데?”
“정부 보조금 지원이 빵빵해서요.”
“······.”
할아버지는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울산!’이라고 외치던 말도 쏙 들어가 버렸다.
대신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모양이다.
“고작 정부 보조금 때문에 여천에······ 허허허.”
“새로 산업단지 들어서는 곳에 입주하면 정부에서 파격적인 혜택으로 꽤 이것저것 챙겨주겠다잖아요.”
나는 씩 웃었다.
“울산은 이미 공장들이 워낙 많이 들어가서요. 정부 보조금이 쪼잔하던데요.”
“태성화학의 미래를 고작 정부 보조금 몇 푼에 따라 결정하다니.”
할아버지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 사장이 그리 가르치더냐?”
“그럼 사채라도 쓸까요?”
“······.”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정부 보조금도 황당한데, 갑자기 여기서 사채는 왜 나와?”
“당장 가진 돈이 없으니까 사채라도 끌어다 쓸 수밖에요.”
은행 문턱이 높던 시절이다.
제도권 금융이 제 역할을 다해내지 못하여 사채가 판을 친다.
“연이율 67.8%짜리가 아닌 89.8%짜리로나 끊어야 얼추 공장 이전 자금을 충당할 수 있겠네요.”
“도박장에서나 통용되는 단기 사채 연리로?”
89.8%짜리 단기 사채는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즐겨 쓰던 이율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사채업자도 사람 가려가면서 돈 빌려줘요. 태성그룹 총수인 할아버지에겐 67.8% 이율로 회수할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니거든요.”
더럽고 치사하지만 사채시장은 그렇게 돌아간다.
사람 따라, 상황 따라, 돈 빌려주는 사람 마음 따라 이자율은 제멋대로 매겨진다.
회수 리스크가 클수록, 신용이 낮을수록, 사정이 급할수록, 약점이 클수록 이자율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어느 사채업자가 여덟 살짜리 꼬마한테 돈을 빌려준대?
“제가 할아버지랑 같은 입장인 줄 아세요?”
태성그룹이야 돈이 많겠지.
투자 예산이나 기업 유보금도 많을 테고.
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제가 인수한 계열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계열사가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어······ 음······.”
“잘 굴러가던 태성화학은 우광에 넘어갔다가 공장 날리면서 공장 멈춘 지 두 달째예요.”
우광화학 화재 사고로 공장이 폭발하고, 공장 인부들은 다쳤다.
노조는 사무실을 점거하고 사업장을 폐쇄하여 두 달 동안 시위를 계속했다.
“태성화학의 공장 인부들과 임원들도 싹 다 태성건설로 빠진 상태였고요.”
“······그건 그렇구나.”
“인수한 우광 계열사는 뭐 다를 것 같아요? 우광의 김대식 회장이랑 대놓고 담판 짓지 않았으면 인수까지 차일피일 몇 년은 끌었을걸요?”
“그것도 그렇지.”
“빼돌린 자료, 간자로 심은 임직원들, 우광철강 적자 때문에 쥐어짠 현금 각출로 현금흐름까지 경색된 상태란 말이죠.”
“······.”
그제야 할아버지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우리 정혁이 주머니가 그렇게나 얇았던가? 왜 듣고도 실감이 안 나지?”
“난 뭐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끼고 사는 줄 아세요?”
나는 콧방귀를 팽 뀌었다.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 구로동 판자촌에 살았거든요?”
“어······?”
“주택복권 당첨되고 적금까지 깨서 겨우 1천만 원 마련했던 게 다였거든요? 그게 고작 몇 달 전이에요.”
“어어······?”
“그렇다고 제가 물려받은 외가 재산이 빵빵해요, 친가에서 그룹 차원으로 지원해 주길 해요?”
“어어어······?”
“태성은 한 가족이라면서요. 그런데 전 나 몰라라 하시네요?”
“내가 언제!”
할아버지는 버럭 외쳤다.
하지만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이내 크흐흠 헛기침했다.
“내가 각자 계열사는 각자가 알아서 굴리라고 떼어주긴 했다만, 나 몰라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이래 봬도 태성그룹 총수야.”
“십 년 후 총수 자리를 물려줄 후계자를 고르기 위해서. 재주껏, 능력껏, 알아서 하라고 손 떼겠다고 하셨잖아요.”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는 더욱 커졌다.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밥상머리에서 선언했었다.
-태성의 식구라면 신분, 출신, 자격을 따지지 않겠다. 태성을 이끌 만한 능력이 있는 자에게 넘겨주마.
-능력껏 뜯어먹고, 재주껏 끌어들여서, 한껏 키워 봐.
-단, 가족이란 걸 잊는 놈에겐 못 준다. 제 식구한테 칼 들이미는 놈을 어떻게 믿고 태성을 맡겨? 태성은 한 식구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우광화학 농성 때도 모른 척 일부러 외면하셨잖아요.”
“크흠!”
“사냥은 밖에서 해야지 집구석에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셨다면서요?”
“크흐흠!”
“사업에 걸린 돈과 사람과 이해관계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직접 경험해 보고 깨달으라고.”
이것뿐만이 아니다.
“대통령이 측근들 몫으로 태성에 넘긴 우광 계열사 주식 일부를 내놓으라고 엄포 놓았다면서요.”
덕분에 우광의 계열사 몇 개를 헐값에 뜯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뜯어낸 계열사는 전부 내 몫으로 떨어졌다.
“그것까지 내어주려면 살림이 빠듯해서요. 그렇다고 대통령이 요구한 뒷돈까지 할아버지께 손 벌릴 수는 없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강 사장과 송 부사장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심 사장은 작게 한숨을, 김 비서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태성은 한 가족이야. 네 애로사항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할아버지에겐 JH투자회사 지분이 1%도 없는데도요?”
“정혁아, 너는 내 손자다. 네가 사고 치고 손 벌렸더라도 할애비는 널 도왔어.”
할아버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하물며 태성화학은 네가 어미의 혼수로 쥐여 준다고, 네 아비의 든든한 뒷배로 만들어 주겠다고,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이렇게 많은 서류를 끌어안고 내내 끙끙······.”
기특함과 안쓰러움이 섞인 눈빛이었다.
“내 자식 밥그릇은 본래 아비인 내가 챙겨줘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넌 걱정할 것 없다.”
할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태성화학 공장 이전 자금은 내가 도와주마.”
“맨입으로요?”
“그럼 차용증이라도 써줄 테냐? 그러면 나야 좋지!”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대신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고마워요, 할아버지.”
나도 할아버지를 끌어안으며 방긋 웃었다.
“요즘 할아버지도 우광에게 빌려 쓰던 해외 유통망이 끊겨서 애로사항이 많으시다면서요?”
나는 동전 지갑을 열어 잘 접은 종이를 꺼냈다.
우광의 김대식 회장에게서 뜯어낸,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종이였다.
“그 애로사항은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공장 이전 계획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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