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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63화 (163/189)

< 폭탄선언 >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할아버지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폭탄선언일 텐데.’

나는 할아버지를 슬쩍 바라보았다.

‘앞뒤 생각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뜸 꽂았다가 할아버지가 뒷목 잡고 넘어가시면 곤란하지.’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신지라.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입 닥치고 있을 수도 없고.’

그건 안 되지.

나는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

‘별수 없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적당히 브레이크 밟으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원래 입수할 때도 단번에 퐁당 들어가면 심장에 무리가 오기 마련이다.

몸통에서 먼 곳부터 물을 끼얹으며 준비 운동이란 걸 하는데, 연로하신 할아버지한테도 그 정도 배려는 해드려야지.

털썩.

나는 어린이용 소파에 앉았다.

이제야 할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무릎 위가 아닌, 응접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서.

“정혁아, 그게 무슨 소리더냐? 10년 후 네가 태성그룹 총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게 내 뜻이라니?”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의뭉 떨지 마시고요.”

“네가 헛짚은 건 아니고?”

“그럼 하나씩 차근차근 짚어볼까요?”

나는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할아버지, 왜 제가 가진 우광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대신 태성화학 공장 이전 자금을 빌려주겠다고 하셨어요?”

“할애비가 곤란해하는 손자한테 돈 빌려주는 게 잘못이더냐?”

“누가 잘못이래요? 단지 할아버지답지 않은 결정이라서 그렇죠.”

평소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건 꿍꿍이속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그게 왜?”

“할아버지는 회사 일엔 진심이니까요.”

“당연한 소리! 이게 지금 장난인 것 같으냐?”

“물론 아니겠죠. 태성화학 직원만 2천 명이에요. 그들의 가족까지 족히 8천 명의 입이 할아버지에게 달렸다면서요.”

할아버지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의 무게였다.

사업에 걸린 돈과 사람과 이해관계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

“태성이 지금 우광 계열사를 인수하기 위해 자금을 비축하고 있다는 거 뻔히 아는데. 울산으로 태성화학 공장을 이전하는 비용을 전부 책임지시겠다고요?”

“이 할애비, 그 정도 능력은 있다!”

“하이에나들과 맞붙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잖아요.”

“······알고 있었느냐?”

“저도 태성그룹 전 계열사 임원회의 때 같이 들어갔었거든요?”

나는 혀를 찼다.

“찜해 놓았던 우광 계열사를 인수해 오려면 총알이 두둑하게 필요하겠네요.”

태성은 우광의 알짜 계열사를 찜해놓고 인수 조건을 조정하면서 헐값으로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태성이 허투루 돈을 쓸 리 있어요?”

태성의 곳간이 나보다 더 넉넉하다고 하더라도.

우광의 계열사를 욕심껏 인수하려면 돈이 꽤 부족해질 테지.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우광자동차, 우광중장비, 우광조선. 지분이 탐나시죠?”

할아버지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를 큰아버지 손에 쥐여 주고 싶으시죠?”

“······.”

“제 주머니가 텅텅 비어서 곤란한 처지가 됐다는 걸 알게 됐잖아요.”

“······.”

“원하던 지분을 얻을 절호의 기회,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탐나는 지분을 헐값에 후려치지 않으세요?”

“후우.”

할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더러 내 자식 밥그릇을 챙기겠다고 내 손자 밥그릇을 빼앗으라는 소리냐?”

“지분까진 눈독 안 들인다고 쳐도 경영권은 탐나시잖아요.”

정곡에 찔린 모양인지.

할아버지는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침묵하기를 택한 것이다.

“태성그룹 전(全) 계열사 임원회의에서요. 할아버지는 제가 우광의 계열사 지분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꺼내지 않으셨어요.”

태성그룹 임원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요구했던 바를 지키지 않았다.

대신 내게 임원회의 견학 소감을 물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지분은 내어줄 수 있어도 경영권은 줄 생각 없다는 뜻이었잖아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을 콕 찔렀다.

“난 고작해야 여덟 살짜리 어린애니까.”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대주주인 것은 인정할 테니 얌전히 배당이나 받아 챙겨라. 경영 일선에 앞세울 생각일랑 추호도 없으니 심 사장님께 경영이나 착실하게 배우고 있어라. 맞죠?”

“그래, 맞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이 바뀌었으니, 태도가 바뀌었겠죠. 예전이라면 제가 가진 계열사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하셨을 테니까요.”

할아버지는 내가 가진 우광 계열사의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모른 척 눈감았다.

그러니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아무리 손자가 예뻐도 내 자식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줄 수는 없다면서요.”

자식은 1촌, 손자는 2촌!

“할아버지라면 차라리 지분은 인정하되, 경영권만큼은 태성이 행사하겠다며 절 구워삶으려 하셨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태성그룹 차기 총수 자리를 두고 경쟁할 기반까지 빼앗을 순 없었나 봐요?”

“······후우.”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래, 맞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제대로 봤다. 그래서 일부러 네 경영권을 빼앗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 게다.”

“진짜 저한테 기회를 주시려고요?”

“그래.”

진심이군.

“물론 갈 길이 멀겠지. 어린 네 입장에서는 아주 험하고 어려운 길이 될 테고. 그걸 내가 왜 몰라?”

할아버지는 소파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10년이 지나도 넌 고작 열여덟 살에 불과하지.”

또 나이 타령이다.

할아버지가 생각하기에 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도 기회는 주고 싶었다. 태성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

“모든 악조건을 감안하고서도 저한테 기대를 걸겠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렇다면 나도 진지하게 되물을 수밖에.

“할아버지, 태성그룹의 차기 총수직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문제였다.

“해외에서 차관을 잔뜩 끌어와서 태성그룹 주식을 몽땅 사들이는 것? 그런 방법으로는 어렵죠.”

주가가 얼마나 치솟을지 알고?

그게 쉬웠다면 적대적 M&A가 판을 쳤을 것이다.

“정혁아, 재벌그룹이 왜 정부와 정치권, 금융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느냐?”

“외부 공격을 확실하게 방어하기 위해서겠죠.”

강제적으로 타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으려 드는 적대적 M&A가 이 ‘방어 기제’에 막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수합병은 우호적 M&A를 통해 이뤄진다.

상대 기업의 지배 주주 세력과 원만한 협상을 통해 적정한 가격에 지분과 경영권을 넘겨받아서.

“결국 그룹 내부에서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가 그룹을 갖게 된다는 소리잖아요.”

할아버지가 자식들의 경쟁을 지켜보겠다는 이유였다.

“그러려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제 편을 많이 확보해야겠죠? 지분 측면에서나, 사내 세력 측면에서나.”

지분 싸움에서는 흑기사와 백기사를 확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내 세력 싸움에서는 제 측근들이 되어줄 임원들을 회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이유로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중동에 나가 있느라 지지기반이 부실한 우리 아빠한테 이것저것 챙겨주셨죠?”

“물론이지. 심 사장이 이끌고 있던 태성화학은 네 아비 몫으로 키워둔 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태성건설로 뜻을 바꾸었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는 태성시멘트와 태성창호, 태성목재를 추가로 떼어주셨다.

아버지의 기반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크게 약했으니까.

“할아버지, 자식들에게 나눠준 태성그룹 계열사가 분리 독립하면 어떨 것 같아요?”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지!”

할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기업이 쪼개지면 힘도 쪼개져! 쪼그라든 기업은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재벌기업들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도 여기서 자주 쓰였다.

“회사 규모만 크면 다 재벌이야? 돈과 권력, 둘 다 있어야 재벌이다!”

지금 이 시절에는 군부독재 정권 때문에 숨죽여 지낼지 몰라도.

21세기 대한민국은 재벌 공화국이 되었다.

“따로 또 같이!”

태성 보고서에서도 마르고 닳도록 나오는 대목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런 이유로 자식들에게 일찍이 계열사를 나눠주고 각자 경영하도록 만들었다.

“각자의 책임하에 계열사를 맡아 운영하다가도, 유사시엔 총수 아래로 단합하여 위기에 맞서서 극복해야지!”

그래서 할아버지는 선뜻 10년 후에 태성그룹 차기 총수 자리를 내어주겠노라 선언하셨을 터였다.

“태성은 한 가족이야!”

내가 태성가에 들어온 이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정혁아, 내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차기 총수 자리를 두고 했던 말을 벌써 잊었느냐?”

“가족이란 걸 잊는 놈에겐 못 준다!”

나는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제 식구한테 칼 들이미는 놈을 어떻게 믿고 태성을 맡겨?”

“그래, 총수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 가족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지!”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정혁아, 총수는 선장과도 같다. 더 뛰어난 선장이 배의 방향키를 잡는 것뿐, 배를 함께 타고 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건 할아버지 생각이고요.

나는 씁쓸한 웃음을 애써 삼켰다.

‘어디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던가.’

그게 아무리 날고 기는 재벌 총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과거 태성그룹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쉽게 못 내뱉으실 텐데.’

나는 과거 태성그룹 보고서를 통해 할아버지가 선택한 태성의 미래를 알고 있다.

‘원래 권력은 부모자식은 물론 부부끼리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욕망이란 건 생각보다 무섭고 음험한 놈이거든.’

과거 할아버지는 태성화학 화재 사고로 인해 태성그룹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태성자동차가 무너지면서 두 형제간의 본격적인 세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태성그룹은 둘로 쪼개져 치열하게 대립했다.

‘승자는 둘째 큰아버지였다. 총수 자리를 양보한 큰아버지는 호숫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니까.’

그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할아버지는 쓰러졌다.

골든 타임을 놓친 탓에 반신불수가 되었고, 오랫동안 자리보전하다 숨을 거두셨다.

‘태성그룹 2대 총수가 된 차기준은 태성그룹을 독차지했지. 가족들을 전부 빈털터리로 쫓아내고서.’

그들이 가진 지분과 재산을 긁어모으기 위해서였다.

여차하면 누명을 씌워 옥살이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죽고 다치거나 파산한 사람이 여럿이었다.

‘과거엔 우리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객사해서 지분 싸움에 끼지 않았었지만, 이번엔 어떻게 될까.’

이건 부모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었다.

“할아버지, 제가 진짜로 태성그룹의 차기 총수 자리싸움에 뛰어들기를 바라신다면 이보다는 적극적으로 밀어주셔야죠.”

“음?”

“지분 측면에서나, 사내 세력 측면에서나.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내 편을 많이 확보해야 하니까요.”

“······어?”

“지금처럼 태성그룹과 완전히 분리 독립된 계열사를 기반으로 성장해서는 절대로 태성그룹 내부 투쟁에 끼어들 수 없어요.”

“······어어?”

“차기 총수는 돈만 많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어어어?”

그래서 결론.

“저한테도 제대로 된 태성그룹 계열사를 맡겨주세요.”

“뭐?”

그렇게 놀라실 줄 알았다.

하지만 반드시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일인지라.

“그러려면 당연히 저도 태성그룹 경영 일선에서 움직여야겠죠?”

할아버지가 입을 떡 벌렸다.

“여덟 살이라고 회사 경영하지 말란 법 없잖아요?”

“어억!”

물론 할아버지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내 그럴 줄 알았지.

< 폭탄선언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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