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목만 세 번째 >
나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살펴 가세요.”
“······오냐.”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날 꽉 끌어안으며 허허 웃지도 않고,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돌지도 않았고,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지도 않으셨다.
대신 기가 찬 듯이 그저 “허허!” 하고 헛웃음을 연신 터뜨리셨을 뿐이었다.
‘그래도 뒷목만 좀 잡고 끝난 게 어디야.’
혹시나 쓰러지면 태성병원까지 업고 달려야 하나 고민했었구만.
여기엔 전적으로 김 비서의 공이 컸다.
‘세 번이나 뒷목 잡게 만든 건 좀 너무했나?’
첫 번째는 내가 태성그룹 경영 일선에서 움직인다고 통보했을 때.
두 번째는 내가 점찍은 태성그룹 계열사를 내어달라고 콕 짚어 말했을 때.
세 번째는 우광의 계열사 인수전에 나 또한 독자적으로 뛰어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덕분에 할아버지는 벌써 세 번이나 ‘억!’ 소리를 내면서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우,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정혁아!
그렇게 할아버지와 삼십 분이나 실랑이를 벌어야 했다.
“김 비서, 나 오늘 뒷목 여러 번 잡았다.”
“이거나 마시면서 숨 고르시죠.”
김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가방에서 음료수병을 꺼냈다.
할아버지는 단숨에 음료수 한 병을 뚝딱 해치웠다.
병에 희한한 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진, 요상한 냄새의 음료수였다.
“그건 뭐예요?”
“피로회복제입니다.”
“혈압약이 아니고요?”
할아버지 뒷목 잡으셨다니까.
“비타민과 미네랄이 듬뿍! 태성제약이 최근에 개발한 제품입니다. 도련님도 한 병 드셔보실래요?”
“이거 큰아버지가 추진하는 일이었죠?”
경쟁 제약회사의 백커스가 크게 인기를 끌자, 태성제약도 야심 차게 내보인 신제품이었다.
‘대차게 말아먹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음료로군.’
그렇게 사라지는 제품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건 오랫동안 비난과 조롱을 받으며 우스갯소리로 회자되는 제품이었다.
‘궁금한데 어디 한번 마셔볼까?’
내가 어렸을 때 잠깐 나왔다 사라졌다는 비타민 음료였는데.
당시 난 가난하게 뒷골목을 전전하느라 이런 걸 사먹을 만한 형편이 안 됐다.
그래서 이번이 첫 시음!
벌컥벌컥.
마셔보니까 바로 감이 왔다.
‘말아먹은 이유가 있었구만!’
우광제약에 번번이 밀리던 태성제약이 왜 석유파동 이후 우광에 넘어갔는지도 덩달아 깨달았다.
“이거 언제 출시된다고요?”
“올해 여름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비타민 음료라면 오렌지나 레몬, 사과, 뭐 이런 향을 첨가하는 게 낫지 않아요? 이건 정말······.”
이걸 출시하기 위해 억 소리 나는 돈을 들여 몇 달이나 공들였다.
게다가 CF 광고 모델로는 이 시절에 최고로 잘 나가는 톱 여배우를 썼었다고!
그러고도 쫄딱 말아먹고 오래도록 놀림을 받게 되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태성제약,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그러니 석유파동 때 우광에 넘어갔던 거지!
우광에 부실 계열사가 있듯 태성에도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
그 대표적인 계열사가 바로 태성제약이었다.
“회장님.”
김 비서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탁탁탁탁 두드려주면서도 품에서 접이용 빗을 꺼냈다.
순식간에 할아버지의 흐트러진 머리는 척척 정돈 끝.
휴대용 먼지떨이개로 슥슥 빗어서 먼지 제거 끝.
주름진 옷깃을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팡팡 털어서 각까지 잡았다.
나는 작게 감탄했다.
‘저게 바로 할아버지가 늘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비결이었구만!’
유능한 비서 한 명이 열 임원 안 부럽다더니!
저런 비서, 나만 없어!
나는 흐린 눈으로 유종태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멀었다, 한참 멀었어.’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던 것일까?
은색 안경테 너머로 김 비서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거렸다.
김 비서가 할아버지의 뒤를 따르다 말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유 팀장.”
“예, 저 유종태가 책임지고 배웅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경호원이자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가 잽싸게 달려와서 방긋 웃었다.
“태성병원에 미리 회장님 진료 예약을 잡아놓을까요?”
“유 팀장, 그게 아니지.”
“예?”
“당신은 도련님을 모신다는 사람이······ 쯧. 이거 정말 안 되겠군요.”
김 비서는 품에서 휴대용 먼지떨이개와 접이식 빗을 꺼냈다.
능숙한 손길로 순식간에 나를 깔끔하게 변신시켰다.
그러고도 김 비서는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유 팀장, 지금껏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정혁 도련님을 수행하셨습니까?”
“예? 혹시 무슨 문제라도······.”
“큰 문제지요. 비서로서의 태도가 영 글러먹었습니다.”
“······전 비서가 아니라 경호팀장인데요?”
“경호팀장이라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도련님을 두고 우릴 배웅하겠단 개소리는 어디서 나옵니까?”
“······.”
유종태, 가불기에 걸리고 말았군.
유종태는 억울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으나, 김 비서가 한발 더 빨랐다.
김 비서는 유종태의 뒷덜미를 독수리처럼 낚아챈 후였다.
“어억!”
“도련님, 이 녀석은 제가 책임지고 확실하게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저기, 김 비서님?”
“이 모두가 비서로서의 교육과 소양이 부족한 탓입니다.”
“아니, 전 경호팀장이라니까요?”
“잘됐군요. 지금 도련님께는 경호팀장보다는 전문 교육을 받은 유능한 비서가 더 절실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마땅한 사람을 따로 뽑아 붙여드릴까요?”
“······.”
유종태는 김 비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비 맞은 똥개처럼 날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도련님,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저 유종태, 믿어주세요!”
“도련님께서는 곧 입학하셔야 하는데. 회사와 학교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천지분간을 못 하고 있으니.”
김 비서가 혀를 차는 이유였다.
“그래도 다행인 줄 아십시오. 도련님께 그동안 제법 눈도장은 찍어놓은 것 같으니.”
김 비서는 우아한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옷깃에 주름 한 점 없이, 자로 잰 듯 반듯한 인사였다.
“모자란 녀석을 내치지 않는 대신 쓸만하게 굴려서 어떻게든 써먹겠다는 도련님의 뜻, 제대로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잡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역시 김 비서!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캐치했군!
“가르쳐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이 녀석보다 뛰어난 비서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종태가 비명처럼 외쳤다.
“저 도련님의 충성 넘버 투 유종탭니다! 진짜로 이렇게 절 보내버린다굽쇼?”
“도련님 곁에 몰릴 인재들이 한둘일 것 같나? 이대로라면 2인자는커녕 3인자, 아니, 열 손가락 안에도 못 들 것 같은데.”
“······!”
“닥치고 얌전히 따라오지.”
유종태는 찍소리도 못 하고 끌려갔다.
나는 종이봉투에 미리 담아둔 것을 김 비서에게 건넸다.
“김 비서님, 정말 저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으세요?”
“지금 영입 제안하신 겁니까?”
“와주면 땡큐, 아니면 말고!”
그러자 진즉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문부터 열고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버럭 외쳤다.
“김 비서, 안 갈 거야?”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아니란 말을 못 해, 왜?”
“······.”
“와주면 땡큐라는데, 대뜸 아임 쏘리부터 하고 봐야지!”
“······.”
“유 팀장, 자네가 보기엔 어때? 나야, 우리 정혁이야?”
딸랑!
할아버지의 구시렁은 고 실장이 겨드랑이를, 유종태가 다리를 달랑 들어 차에 태우면서 끝났다.
이 모두가 김 비서의 손짓 한 번에 이뤄진 일이었다.
* * *
“휴우, 회장님과의 협상은 잘 끝내셨습니까?”
“물론이죠.”
털썩.
사장실로 돌아온 심 사장은 식은땀을 닦아냈다.
“태성화학의 여천국가산업단지 이전 계획에 변동 사항은 있으실까요?”
“없어요.”
“역시 우리 도련님! 그럼 이대로 쭉 진행합니다?”
“네.”
“하하, 좋습니다!”
심 사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추진해오던 것이 있는데, 인제 와서 울산으로 계획이 변경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까지 까마득했을 테니까.
“울산을 고집하던 회장님이 여천을 순순히 받아들이시던가요? 다른 조건이나 제약을 걸지는 않으시고요?”
“쭉 처음 계획대로 추진하시면 돼요.”
“그게 말이 됩니까? 태성화학 이전에 관한 비용 전액을 회장님께서 부담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10만 원만 빌렸는데요?”
“······.”
“차용증 보여드려요?”
“······.”
입을 떡 벌렸던 심 사장이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회장님의 뜻대로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를 넘기시고 태성화학을 지키신 건······.”
“둘 다 내 건데요?”
“······.”
“처음 계획대로 쭉 추진하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그렇다면 아까 선언하신 대로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도 여천으로 옮기실 겁니까?”
“그럼요. 울산에 놔두고 우리가 굴리기로 얘기 다 끝냈던 일이잖아요?”
“진짜로?”
나는 볼을 부풀렸다.
“전 청사진을 그렸고, 그대로 실행했어요. 모든 건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됐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물어봐요?”
“정말 도무지 안 믿겨서 그럽니다. 제가 회장님을 모릅니까? 회장님께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심 사장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회장님이라면 반드시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를 큰 도련님께······.”
“꼼수를 좀 부렸어요.”
나는 씩 웃었다.
“할아버지에게 우광자동차와 우광중장비에 관한 지분도, 경영권도 넘기기 싫고. 그렇다고 울산에 태성과 나란히 자리 잡은 공장을 굳이 딴 데 옮기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여천은 석유화학단지로 성장하지만, 울산은 자동차와 기계, 금속 산업의 메카가 된다.
굳이 제대로 자리 잡은 자동차 공업을 딴 곳으로 옮길 이유는 없었다.
“나란히 울산에 두고 태성과 우리가 따로 나눠서 굴린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잖아요.”
심 사장이 걱정하는 이유였다.
“도련님, 회장님께서는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나와 전(前) 태성건설 임원진만으로는 일곱이나 되는 계열사를 제대로 굴릴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지금 우광 임원진들까지 열심히 굴려 쓰고 있잖아요.”
“전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누가 농담이래?
나도 지금 진지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심 사장이 걱정하는 건 본인이 아니라 나와 내 회사의 미래였다.
그러니 자꾸만 빙그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내가 태성그룹 계열사를 받아 경영 일선에 서는 것을 몇 년 뒤로 물린다는 게 조건이에요.”
“허어, 애초에 도련님께서는 아직 태성의 계열사를 받아 경영 일선에 설 뜻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꼼수라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실적도 없는, 능력도 증명하지 않은, 어린 제게 태성의 계열사를 못 맡기시겠다더라고요.”
“그건 당연한 말이고요. 그래서요?”
“그럼 실적과 능력을 증명하면 될 것 아니냐고 큰소리쳤죠.”
“어떻게요?”
“JH투자가 보유한 계열사와 태성 계열사의 실적을 비교하기로.”
“네엑?”
심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되겠습니까? 우광 계열사 실적은 태성에 비해 한참 못 미친단 말입니다!”
“안 될 건 또 뭐예요?”
할아버지도 딱 심 사장 같은 표정으로 뒷목을 잡으시더니.
심 사장도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특히 태성자동차와 태성중장비! 회장님께서 대준 도련님을 얼마나 크게 밀어주셨는지 모르십니까?”
“큰 기대와 큰 지원이 꼭 큰 성공을 예정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기간은 얼마로 잡으셨습니까? 10년?”
“3년이요.”
“어억!”
심 사장은 두 번째 뒷목을 잡았다.
“도련님, 그럼 정말 불가능합니다! 이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에겐 심 사장님이 계시잖아요.”
“아무리 저라도 3년 내에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를 태성자동차와 중장비만큼 키워놓을 자신은 없단 말입니다!”
“그럼 이대로 우광자동차와 중장비가 태성에 흡수 합병 당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어억!”
심 사장은 세 번째 뒷목을 잡았다.
“명분이 확실해요. 태성은 한 가족이고, 같은 계열사를 쪼갤 필요 없고, 나는 어리고, 우리에겐 유능한 임원진과 직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는 눈을 지그시 반쯤 감았다.
“내가 가진 자동차와 중장비를 태성에 넘기지 않는 이유는 큰아버지를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진심이십니까?”
심 사장은 눈을 부릅떴다.
“차기 총수 자리를 두고 도련님 또한 같은 이유로 태성자동차와 중장비를 주시하고 있으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이 양반아, 잘못 짚었어.
“난 가족끼리 칼 들고 쑤셔댈 생각 없어요.”
땡전 한 푼 없이도 뒷골목 음지의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왔다.
그렇게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다섯 거물 중 하나가 된 나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계열사를 종잣돈으로 사채만 굴려도······. 10년이면 지하금융계의 거물이 되고도 남을걸?’
그러니 계열사 몇 개 날리는 것도, 경영권 좀 빼앗기는 것도, 지분이나 명예를 내세우지 못하는 것도.
내 기준에서는 정말로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 정도는 뒷골목에서 농담으로도 안 쳐준다고.
내 신장은 아직도 두 쪽 다 멀쩡하고, 강남에 사들인 땅은 넓고, 우리집 지하실 금고엔 억 소리가 나는 국보급 예술품과 금괴가 가득하지.
“그러면 왜······.”
왜 내가 태성에 우광자동차와 중장비를 넘기지 않고 움켜쥐었냐고?
“태성자동차와 중장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예요.”
< 뒷목만 세 번째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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