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키고 싶은 마음 >
심 사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동차와 중장비를 넘기지 않은 게 태성자동차를 지키기 위해서라고요?”
“네.”
“혹시 큰 도련님이 말아먹을까 봐?”
“······.”
차마 아니라곤 말 못 하겠다!
심 사장은 멋쩍은 듯 웃었다.
“사실 큰 도련님이 성실함과 의욕에 비해 사업 감각은 조금 부족하신 편이시죠.”
그걸 조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째 큰아버지가 손대는 것마다 족족 망해서 넘어가던데.
태성자동차와 중장비는 물론이고 태성제약까지.
“설마 내가 차기 총수 자리를 노리고 큰아버지를 물먹이려고 할 줄 알았어요?”
“크흠!”
이야, 차마 아니란 소리는 못 하겠나 본데?
이 양반아, 잘못 짚었다니까.
“곧 석유파동이 닥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그 휘하 임원진은 그 경고를 내내 무시하고 있고요.”
태성에 딸린 식구가 몇이고, 거느린 사업체가 몇이며, 벌여놓은 사업이 얼마나 많은데.
대기업 차원에서 월동을 준비하기엔 너무도 빠듯한 시간이다.
“우광이 무너진 이후 큰아버지는 작정한 듯 덩치를 키우려고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잖아요. 삼황자동차가 목표라죠?”
“태성자동차를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로 만드시겠다더군요.”
“포부 좋고, 배짱 좋고, 휘하 임원진의 능력도 좋더군요. 하지만 딱 하나.”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기가 안 좋아요.”
그래서 마음이 안 놓인단 말이지.
“만일 진짜로 석유파동이 터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예전의 석유파동에 비해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그동안 석유 의존도는 높아졌고, 중공업 산업 규모도 비할 수 없이 커졌으니까요.”
덩치가 커질수록 타격도 커지는 건 자명한 이치다.
“큰아버지 계획대로 된다면···, 여기에 우광자동차와 중장비까지 합병해 태성자동차의 덩치를 무지막지하게 키운다면···, 석유파동이 터졌을 때 받을 타격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세요?”
“휘청거리는 정도에서 그칠 리 없습니다.”
잠시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겨 보던 심 사장은 절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부도를 면키 힘들 겁니다. 어쩌면 다른 계열사들까지 도미노처럼.”
그래, 바로 그런 이유로 석유파동 직후 큰아버지는 태성자동차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태성자동차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무분별한 투자와 인수 합병으로 유보금은 바닥난 상황에 먹여 살릴 덩치만 훨씬 더 커진다면···, 수습할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전 일부러 자동차와 중장비를 내놓지 않았어요.”
태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차기 총수 경쟁을 선언한 직후예요. 만일 큰아버지와 태성자동차가 무너지면 어떤 일로 번질 것 같아요?”
“당연히 승계 싸움이 본격화될 겁니다.”
“안 그래도 석유파동 때문에 줄도산이 나는 위기 상황에 서로 칼을 겨눠 내분까지 시작하겠네요?”
과거 큰아버지가 태성자동차에서 물러난 후 일어났던 일이었다.
태성은 장남과 차남으로 나뉘어 분열을 시작했다.
그렇게 태성은 재계 서열 5위에서 5년 만에 재계 서열 198위까지 곤두박질치고 만다.
다들 이대로 공중분해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태성의 암흑기였다.
“도련님, 그럼 더 잘된 것 아닙니까?”
대체 뭐가?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한 면과 같다고 했습니다.”
심 사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장 막강한 경쟁후보를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잖습니까.”
“큰아버지를 날리겠다고 태성자동차와 중장비까지 함께 날려먹으라고요?”
나는 기가 차서 웃었다.
“뒷수습은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렇겠지.
21세기에도 대한민국의 자동차 공업은 죽지 않았으니까.
“자동차 공업이 줄도산 날 지경이라면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할 테니까요.”
이놈의 지긋지긋한 대마불사!
이 또한 정경유착의 폐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덕분에 대한민국의 자동차 공업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동차 공업 통합 조치라도 내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덩치 큰 태성보단 중소 자동차 기업들이 먼저 인수 대상이 될 겁니다.”
역사는 심 사장이 예측한 대로 흘러갔다.
‘확실히 다음 정권은 자동차 기업의 회상 불가능한 부도를 막아냈다. 제5공화국의 병크라 일컬어지는 자동차 공업 통합 조치를 이용해서.’
나는 망해가던 태성자동차가 어떻게 급부상했는지 일련의 상황을 전부 꿰고 있다.
‘심 사장이 독일 자동차 기업과 기술제휴를 성사시키고, 새봄자동차를 헐값에 인수해 태성자동차는 기사회생했지.’
태성자동차의 위기를 해결할 타개책이라면 이미 구상 끝낸 지 오래였다.
심 사장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도련님께선 태성자동차의 뒷수습을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이 혈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만 궁리하면 됩니다.”
심 사장의 눈은 이미 10년 후로 예정된 차기 총수 경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자 독식인 싸움입니다. 패배자에겐 그룹의 미래를 걱정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광그룹의 형제 싸움이 그러했듯이.
우광건설 사장은 형을 총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우광화학 공장에 불을 질렀다.
우광화학 화재로 인한 손해마저 감수하고서.
“어쩌면 이건 골육상잔을 피해갈 수 있는, 그러니까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운이지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그게 심 사장님이 보는 천운인가요? 태성자동차와 중장비를 날릴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럼 도련님 손으로 대준 도련님의 목을 날리실 겁니까?”
“그럴 생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족에게 칼을 들이밀어요? 고작 태성을 갖기 위해서? 그것참 꼴불견이네요.”
“누군 가족에게 칼을 겨누고 싶어서 겨눈답니까?”
심 사장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총수 자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우위를 점할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다들 그런 핑계를 대면서 제 식구에게 칼을 겨누더라고요.”
재벌그룹의 경영권 암투가 대개 그러했고.
조폭들의 영역 싸움 혈투가 보통 그러했다.
나 또한 온몸에 칼자국과 배신의 상처를 새기며 뼈저리게 배웠던 교훈이 그러했다.
“그게 사람 새끼예요? 인간쓰레기지.”
“도련님이 보기에는 이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물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로 들리니까 문제다.
어려서부터 뒷골목을 전전했던 내가 이런 꼴을 못 봤겠냐고.
숱하게 봤다.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릴 만큼.
스승님이 날 후계자로 지목한 후에 나 또한 그러한 싸움판에 내던져졌으니까.
“재벌그룹 후계 싸움에 뛰어든 이상 이 바닥의 룰을 따르셔야 할 겁니다. 약육강식과 승자 독식. 싸움을 피하고 과실만 얻을 순 없으니까요.”
“그게 룰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나는 검지로 내 가슴을 콕 찔렀다.
“난 그 룰 따를 생각 없어요.”
“도련님.”
“만일 내게 태성과 가족,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을 택할 생각이거든요.”
내가 죽어갈 때 다시 잡길 바랐던 건 돈과 명예가 아니었다.
오직 내 가족을 다시 만나길 바랐을 뿐이었다.
“도련님께서도 이런 싸움을 각오하고서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 아닙니까?”
“내가 능력과 실적을 증명하겠다고 했지, 언제 그룹 파벌싸움에 뛰어들어 가족끼리 내분을 일으키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가족이란 걸 잊는 놈에겐 못 준다!
-총수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
-가족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 사장이 앉은 자리로 걸어갔다.
그제야 우리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나는 할아버지와 뜻이 같아요. 태성은 한 가족이에요.”
“어려운 싸움이 될 겁니다. 안 그래도 도련님께선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핸디캡을 주렁주렁 달고 링 위에 오르셨어요.”
심 사장의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심 사장이 왜 저런 눈을 하는지 알고 있다.
심 사장 또한 신입 사원 시절을 거쳐 사내 정치의 암투를 겪어내고 사장 자리까지 올랐을 테니까.
“그런 건 이미 각오한 지 오래예요.”
내가 불리한 싸움이라는 건 할아버지도, 나도, 심 사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나도 그걸 감수하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물러서진 않을 거예요. 내 사전에 가족을 버린다는 말은 없거든요.”
심 사장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큰아버지도 내 가족이에요.”
난 큰아버지가 총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어느 날 호숫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안 그래도 가시밭길을 걷게 될 텐데, 거기에 무거운 족쇄를 차고, 짐을 지고 가는 격입니다.”
“그 무게가 가족이라면 기꺼이.”
부디 심 사장 또한 나와 같은 가시밭길을 걸어갈 각오를 다져주길 바랄 뿐이다.
그건 너무 큰 욕심이려나.
“다른 가족들은 도련님의 각오를 몰라줄 겁니다.”
“상관없어요.”
“도련님께 관용을 베풀지도 않을 겁니다.”
“바란 적도 없고.”
“외려 도련님의 약점이 될 겁니다. 공격의 빌미가 될 겁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지켜야죠. 그만큼 소중하니까.”
심 사장은 낮게 탄식했다.
“고집쟁이로군요.”
“그럼 가족을 두고 타협해요?”
나는 작게 웃었다.
“싸움은 밖에서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도련님.”
“가족끼리 밥그릇 싸움을 할 바엔 차라리 그 시간에 난 내 밥그릇, 내 회사나 더 크게 키울래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불만 있어요?”
“그런 식으로 물러터지게 구는 게 불만입니다. 태성그룹 총수 자리는······.”
“그게 뭐 별거라고요. 까짓것 아쉬우면 내 손으로 만들어 앉으면 그만인데요.”
“······.”
빈털터리 맨손으로도 뒷골목 밑바닥에서 올라온 나다.
재벌 기업 총수 자리에 앉아보고 싶으면 내 손으로 만들어 앉으면 땡이지.
“난 자신 있어요. 태성보다 더 크게 키우는 거? 까짓것 못 할 것도 없잖아요.”
과거 사채왕 해먹던 시절 내 주특기가 그거였거든.
-망해가는 기업 살려내서 크게 키워 되팔기.
이보다 더 짭짤한 투자처도 드물더라고.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돼요. 어떻게, 지금이라도 계열사 7개 묶어서 재벌그룹 발족식 열어 볼까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럼 닥치고 나만 믿고 따라오실래요?”
“허······!”
“태성이 내 가족이듯, 심 사장님도 내 가족처럼 지켜줄 자신은 있는데. 싫어요?”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덥석!
내가 손 내밀기 무섭게 덥석 잡는다.
아니,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날 꽉 끌어안았다.
“도련님, 어디 가서 사람을 이렇게 막 꼬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넘어는 오셨고요?”
“도련님이 작정하고 꼬시면 속수무책이죠. 보세요. 뻔히 알면서 제가 또 넘어갔잖습니까.”
“맨입으로? 이렇게 쉽게?”
“어허, 방금 멘트 압수. 특히 여자는 절대로 이렇게 꼬시면 안 됩니다.”
“······.”
나한테 여자 걱정하는 게 제일 쓸데없는 걱정일 텐데요?
왕년에 잘나가던 시절에도 내 팔자엔 여자가 딸랑 한 명뿐이었거든요?
“이미 도련님의 손을 잡은 이 사람을 또 꼬셔서 뭣에 쓰시려고요?”
심 사장은 작게 툴툴거렸다.
“설마 그때 끝까지 함께하기로 했던 맹세를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땐 우리 회사 바지 사장 자리를 약속했던 거고요.”
“그럼 이번엔 뭐가 다릅니까?”
“말 나온 김에 우광자동차와 중장비 사장 자리에 앉아보는 건 어때요?”
“······!”
눈을 동그랗게 떴던 심 사장은 이내 피식 웃으면서 장난조로 되받아쳤다.
“이번에도 역시 바지 사장입니까? 투자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보직 변경하는 건가요?”
“보직 변경이 아니라 승진 발령인데요?”
“······!”
“이번엔 제대로 된 계열사 사장 자리로 내어드려야죠.”
“······진심이십니까?”
“내가 언제 회사 일로 장난치는 거 봤어요?”
나는 씩 웃었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거든요. 난 내 사람 챙겨주는 일이라면 대놓고 편애하는 스타일이라구요?”
“뇌물과 아부도 받아주십니까?”
“물론이죠. 세상은 원래 뇌물과 청탁! 위아래 골고루 칠하는 기름칠로 매끄럽게!”
철구 아저씨 같았으면 치를 떨었을 텐데.
사내 정치로 노련한 심 사장은 냅다 내 입에 무언가를 푹 꽂았다.
쪽쪽 빨아먹어 보니까 한약이었다.
“성장 보약이랍니다. 이거 먹으면 키가 쑥쑥쑥! 도련님을 위해 특별히 지은 겁니다.”
우리 사무실에 이런 보약도 있었나.
뻣뻣하기로 쇠심줄 같다는 심 사장한테 뇌물을 다 받아볼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 번만 더 승진하면 이번엔 바지 회장이겠네요.”
“바지 회장이요? 살다 살다 바지 회장은 또 처음 들어봅니다만.”
“방산 사업 계열사 묶어서 회장 자리에 앉히면 바지 회장이죠. 총수 자리는 하나뿐이라면서요?”
“어억!”
심 사장은 웃으면서 뒷목을 잡는 시늉을 했다.
이거 영 안 믿는 눈치인데.
“왜요? 바지 사장은 맡아도 바지 회장은 못 맡겠어요? 능력이 영 안 되시나? 야망이 없으신가?”
“저 야망 있는 남잡니다! 바지 회장 자리, 탐납니다!”
이건 진심이구만!
심 사장이 엄지를 들어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럼 같은 회장이라고 차 회장님과 맞먹어도 됩니까?”
목표가 확실한 야망이었다.
< 지키고 싶은 마음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