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측근의 청탁 >
‘유공?’
뜬금없이 터진 발언에 깜짝 놀랐다.
‘청와대 경호실장의 입에서 먼저 유공을 내어주잔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할아버지가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대선자금과 함께 우광건설 뇌물 비리 장부를 건넬 때.
유공에 관해 떠본 적 있었다.
-내가 태성에 뭘로 보답하면 좋으려나?
-만일 대한석유공사를 민간에 이양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태성을 먼저 떠올려 주십시오.
-유공? 태성에 정유회사가 없어서 유공에 눈독을 들이나 보군. 하지만 또 다른 석유파동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유공을 시장에 내놓는 일이 생길까 모르겠어.
절로 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때 태성의 속내를 짐작한 이후, 유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당시 그는 석유파동이 터질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보고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장담했었다.
-하하하, 좋다! 행여 유공을 민영화하면 태성이 1순위다!
물론 충고도 함께 따랐다.
-미련하게 사업에만 목매지 말고 자네도 청탁이란 걸 제대로 이용할 필요가 있단 소리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이게 청와대 경호실장이 말한 청탁이란 거겠군.’
뜻밖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태성 대신에 자청해서 대통령에게 청탁을 넣어?’
의아했다.
‘태성에 이 정도로 호의를 보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왜?’
물론 여차할 때 쓰려고 틈이 날 때마다 착실하게 빚을 달아놓긴 했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쥐여 주고 정적 제거 및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도록 도왔고.
대선자금을 건넬 때 따로 배 박스로 성의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김형원을 잡아들였을 땐 몰래 슬쩍 정보를 넣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정도 권력자에겐 그만한 호의가 아주 당연한 서비스로 느껴졌을 텐데. 굳이 나서서 일을 키워?’
청와대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소위 말하는 이 나라의 절대 권력자!
받는 게 당연하고,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위치다.
대통령의 눈 밖에 날 정도로 큰 치부가 아니면 약점조차 되지 않을 강자니까.
‘그런 자가 고작 저런 성의를 빚으로 달아둘 리가 없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아!’
청와대 경호실장은 보란 듯이 중정부장을 보며 견제하고 있었다.
‘권력 과시용이었군.’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은 견원지간이었다.
대통령의 총애를 두고 피 튀기게 싸우는 삼인방 중 하나였으니까.
청와대 경호실장, 중정부장, 육군보안사령관 말이다.
‘중정부장이 김형원을 잡아와 대통령의 환심을 사니, 청와대 경호실장으로선 몸이 달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대놓고 보여주려는 거다.
자신의 권력과 대통령의 총애를!
영향력을 과시하여 중정부장의 기를 누르고, 서열을 확인시켜주겠노라 선언한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청와대 경호실장이라고 해도 유공은 쉽지 않을 텐데.’
대한석유공사가 어떤 기업인가.
미국 걸프사의 도움을 받아 세운 국영기업이었다.
이 나라 석유 유통의 근간을 맡고 있는 캐시 카우!
그 말인즉, 정치자금을 뽑아먹기에 딱 좋은 곳이란 소리였다.
‘석유파동이라도 터져서 유공이 빚더미에 오르지 않은 이상, 대통령이 쉽게 제 지갑을 내어줄 리 없지.’
섣부른 청탁이었다.
아마도 실패 확률 90%에 달하는.
그건 지금 대통령의 구겨진 미간만 봐도 답이 나온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장은 자신만만했다.
“각하, 기억하십니까?”
대통령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청와대 경호실장은 개의치 않았다.
“저 친구를 사석에 불러 술자리를 가졌을 때 말입니다. 석유파동에 대한 가능성을 듣고서 각하께서 궁리를 하셨잖습니까.”
“음?”
대통령은 구겨진 미간을 풀지는 않았지만, 흥미는 보였다.
“정부 선에서 해결 불가능하단 결론이 나자 민간 차원에서의 대응을 염두에 두셨죠.”
“사우디에 내정간섭 할 수는 없으니까.”
“2차 석유파동이 발생한다 치고, 사우디 왕실의 빚을 석유로 받겠다고 하면?”
당시 대통령이 한 말이었다.
“국교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태성이 정유회사를 만든다 치면?”
대통령의 말을 청와대 경호실장이 고스란히 옮기면서 씩 웃었다.
“진짜로 석유파동이 다시 터지면 유공의 빚더미는 곧 나랏빚이 되고 맙니다.”
과거 진짜로 그랬었다.
이란발 제2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유공은 빚더미 위에 올랐다.
정부가 국가 경제 안정을 부르짖으며 석윳값 급등에 따른 손실을 몽땅 기업에게 떠넘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의 걸프사는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약소국 지분 정리에 나섰고, 그때 대한석유공사에 관한 지분을 헐값에 처분하고 떠났다.
‘아직 석유파동도 안 터졌는데, 정치자금줄을 내놓으라고 청탁을 해? 이건 시기상조지.’
안 될 말이다.
‘쓸모를 다한 늙은 닭은 내어줄 수 있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내어줄 수 없을 테니까.’
무리한 청탁은 곧 화를 부른다.
결론은 났으니, 결과만 확인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통령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음······.”
놀란 것은 나였다.
‘고민을 한다고? 대통령이? 최측근의 무리한 청탁을 가차 없이 자르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이건 계산기를 두드려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안 될 일.
고민이 끼어들 여지도 없는 사안이었다.
‘미국 걸프사가 지분 50%를 가지고 있는 초거대 공룡기업이다. 현재 주식 시세로 치면 걸프사에 최소 2억 달러짜리 협상을 불사해야 하는 일을······ 심사숙고해?’
2억 달러가 뉘 집 개 이름인가?
국가개발에 목을 맨 대통령은 온갖 차관을 끌어다가 성장에 쏟아붓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뽑고, 공장을 돌리고, 제철소와 조선소를 짓고, 인재를 육성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포항철강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돈이 없어서 일본의 배상금 1억 달러를 끌어다 써야 했었다.
‘경호실장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청와대 경호실장의 웃음은 짙어졌다.
반면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던 중정부장의 표정은 굳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어쩌면··· 운 좋게··· 만에 하나······.’
희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석유파동이 터진 이후 매물로 나올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기 위한 준비라면 지금도 착실히 하고 있다.
‘마른걸레가 될 때까지 쥐어짜도 아직 2억 달러까지는······ 확실히 무리이긴 한데······.’
어디 따로 자금을 마련할 방법은 없으려나?
이것저것 바쁘게 머리를 굴려볼 때였다.
대통령은 딱 잘라 말했다.
“안 될 말이다. 석유 정제와 공급은 나라의 근간이 되는 중공업의 한 축이야.”
에라이, 좋다 말았네!
“대선이 코앞인데, 일부러 분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새삼스러울 일도 없건만.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건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역시 유공을 거저먹는 게 쉬울 리 없지!’
대통령의 거절이 떨어졌는데도 청와대 경호실장은 태평하다.
“예, 각하께서 옳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아니, 오히려 기쁨과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중정부장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대선이 코앞인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코라이 게이트를 수습하기에도 바쁘다. 괜히 미국 기업을 자극할 생각 없다.”
“예, 각하. 맞습니다. 자칫 걸프사를 핍박했단 오명을 쓰게 되면 안 그래도 소원한 양국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겠죠.”
청와대 경호실장은 물수건을 집어 들어서 느긋하게 손을 닦았다.
험악한 눈은 여전히 중정부장에게 고정한 채였다.
중정부장은 분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될 낌새가 보이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유공을 날렸으면, 딴 거라도 물어 와야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제야 겨우 대통령의 의심과 경계를 풀었는데!’
확실하게 여기서 더 뜯어먹지 않으면 손해다!
사채업 하면서 느는 건 상대의 주머니 여력을 가늠하는 눈치뿐이었다.
‘겨우 세금 감면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여기서 태성이 나서서 욕심을 부린다면 도로 의심을 사게 될 테고. 이거 난감하네.’
이대로 돌아서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가 워낙 좋거든.
‘빚은 청와대 경호실장만 졌어? 중정부장도 졌어!’
나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하는 중정부장을 돌아보았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깔아놓은 밥상에 중정부장이 내 숟가락을 올려주면 더할 나위가 없는데. 안 되려나?’
안 되면 되게 만들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지!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어이, 수호신.’
[왜? 이번에야말로 저놈의 주둥이를 틀어막아 주랴? 기다려 봐라.]
저승사자가 아까 놓친 기회를 만회하려는 듯, 대통령을 바라보며 도포 자락을 걷었다.
‘이번엔 그 반대야. 저놈 주둥이를 열어야 해.’
[일장연설을 또? 넌 지긋지긋하지 않나?]
‘제대로 뜯어먹을 기회가 왔는데 이대로 입 다물고 튀면 곤란해서 그렇다!’
[뭘 어떻게 해줄까?]
잠깐, 웨이러 미닛!
지금 그게 문제라서!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꿈으로 하자. 뒤탈도 없고.’
[단체로 식곤증 꿈나라로 보내버려?]
‘단체로 보낼 것도 없어. 딱 한 명이면 돼. 저 사람.’
내가 가리킨 건 중정부장이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 꼬장꼬장하게 생긴 놈 주둥이를 열고 싶다면서? 저쪽 딱딱하게 생긴 놈을 꿈나라로 보내버리라고?]
‘저쪽 딱딱이가 이쪽 꼬장이를 설득해야 하거든.’
[오!]
‘저쪽 딱딱이더러 태성에 진 빚이나 갚으라고 해. 할 수 있겠어?’
[맡겨만 둬.]
저승사자가 중정부장을 향해 입김을 후 불었다.
중정부장은 눈을 내리깔았던 채로 흠칫했다.
“······!”
중정부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식은땀 한 줄기가 중정부장의 이마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확실하게 전했다.]
‘되려나?’
[믿어. 내 특별히 연출에 공 좀 들였지.]
그래 봤자 꿈인데 뭐.
보험을 들어둔 만큼 나는 재빠르게 차선책을 강구했다.
‘여차하면 몰래 쪽지를 전하자. 아니면 이대로 내가 대통령과 담판 지어?’
그런데 내내 조용하던 중정부장이 입을 떼었다.
“각하, 경호실장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결심을 단단히 굳힌 표정이었다.
“태성의 협력에 힘입어 김형원을 잡아 코라이 게이트를 덮었지 않습니까. 고작 세금으로 끝내기엔 포상이 너무 야박한 건 사실입니다.”
의도적으로 코라이 게이트를 언급했다.
중정부장은 대통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성에 굵직한 국책사업을 맡겨 보시죠.”
“뭐?”
“아까 각하께서 직접 골라보라고 제안하셨잖습니까. 지하철 3호선과 4호선 공사, 제철소 사업권, 공업단지 간척사업, 방산 사업.”
이건 태성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내던졌던 탐스러운 미끼였다.
실제로 들어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안일 터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태성의 꿈꾸는 미래는 여기 어디에 있지? 골라 봐. 없으면 건의하고.
조금 전에 본인의 입으로 꺼낸 말이었거든.
뜻밖에도 대통령은 생각 이상으로 뻔뻔했다.
“이미 거절한 사안이다.”
“그건 각하의 체면을 위해 양보한 것이지요.”
“한 기업이 독식하기엔 너무 과해.”
“한 기업이 독식하기엔 규모가 너무 커서 문제였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정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데, 벌어야 할 국책사업을 수두룩하다며 한탄하셨잖습니까.”
“김 부장.”
대통령은 일말의 재고도 없이 잘라낼 생각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정부장은 거침이 없었다.
“태성은 중동에서 오일 머니를 싹싹 긁어왔습니다.”
“······10억 달러!”
그제야 대통령의 눈에 빛이 번뜩인다.
“마침 세금 감면까지 받았으니 태성건설의 자금력은 여유롭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국책사업은 나라를 위한 대업입니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 뭐든 맡겨만 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까. 태성에게 기꺼이 애국할 기회를 주시지요.”
“애국! 그거 좋지!”
청와대 경호실장이 유공을 언급할 때와 반응이 다르다.
대통령은 몹시 흡족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차 회장, 한번 골라 봐라. 어떤 국책사업을 맡길 바라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대박!’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아깐 대통령의 의심과 경계를 피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눈감았지만.
포상으로 고르라고 내어줬다면 두말하지 않고 냉큼 집어먹었을, 하나같이 굵직하니 탐나는 사업들이었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계산기를 튕겼다.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라면 구 시장이 두 팔 걷고 태성건설을 밀어줄 테니 패스.’
이미 잡은 고기를 굳이 고를 필요는 없겠지.
‘당장 간척해서 농사지을 것도 아니고, 울산과 여천에 이전 결정을 번복할 생각도 없으니.’
그럼 남은 것은 방산과 제철소 사업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각하, 제철소 사업권은 어떻습니까?”
그래, 바로 그거지!
청와대 경호실장과 맞먹는 권력자이자,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 직접 건넨 청탁이었다.
< 최측근의 청탁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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