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78화 (178/189)

< 가즈아 >

조 상무는 몹시 당황했다.

“사장님, 제정신이십니까?”

“그럼 내가 지금 헛소리나 하고 있는 걸로 보이나?”

“솔직히 말하면··· 예, 그렇습니다.”

심 사장의 핏발 선 눈은 오기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무실 식구들이 조심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사장님 20주년 결혼기념일이잖아요.”

“그래서 아침부터 꽃단장하고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오신 거죠?”

“오늘을 위해 비행기 표를 미리 끊어놓으셨다면서요?”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총 5일 휴가의 주인공이 되셨는데······.”

심 사장은 길게 탄식했다.

“누군 휴가 가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러니까요. 대체 왜요?”

“말했잖아. 이 정도로는 보스의 기준을 맞출 수가 없다니까.”

“우리는 보스의 지시 사항을 보란 듯이 수행했습니다만?”

조 상무는 답답해서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 쳤다.

“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업무 처리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이렇게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보세요.”

조 상무가 가리킨 건 우광연구소 최 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감탄했던 사무실 식구들의 작업물이었다.

우광연구소 10년 치 연구를 요약 정리한 최종보고서와 개발 아이템 정리표.

하지만 심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겐 저게 최선인가? 난 아니라고 보는데.”

“심 사장님, 이건 우광연구소에서 핵심 연구 사업만을 뽑아놓은 엑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부실해. 그러니 내 최선은 아직이야.”

조 상무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심 사장이 더 빨랐다.

“보스가 왜 업무를 중단하고 이 일을 최우선 사항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했는지 다들 까먹었나?”

대통령이 정혁 도련님을 국산 전차 성능 시험 참관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우광연구소를 비롯한 계열사를 넘긴 대신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길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혁 도련님은 그동안 우광연구소가 비밀리에 개발했다던 전차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특히 조준경.

“자네라면 정혁 도련님의 손에 이런 결과지를 들려 보낼 수 있겠어? 그것도 대통령 앞에?”

“······!”

조 상무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무실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지르던 환호성과 들썩이던 흥겨움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무실엔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형편없는 결과물에 다들 만족하나 보지?”

“······.”

“그래놓고 성과금 잔치나 하자고? 자네들 양심은 안녕하신가?”

조 상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회사 일이 올림픽이야? 결승전에 빨리 골인하면 우승이야? 그럼 떼돈 버나?”

심 사장은 혀를 찼다.

“회사의 자부심은 매출에서 나오고, 회사의 자존심은 성과에서 나온다. JH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할 셈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쯧, 다들 일머리가 늘고 시야가 트여서 마음가짐까지 제법 달라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갈 길이 멀군.”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 대신 결과로 보여주길 바라지.”

심 사장은 사무실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그게 JH의 근성이지. 아닌가?”

“맞습니다!”

조 상무를 비롯한 사무실 식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눈에서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그들은 그간 허투루 일해오지 않았다.

자부심을 느낄 만큼 진심으로 일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조금 부끄러웠다.

“반성하겠습니다. 그간 업무에 익숙해졌다고 제법 교만해졌던 것 같습니다.”

“우광계열사 새끼들이 작성했던 보고서를 읽으면서 일을 발로 했나 혀를 찼었는데, 제가 지금 딱 그 꼴이었군요.”

사무실 식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 사장님,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업무 방향성만 설정해주십시오!”

“그럼 어떻게든 기한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게 우리 JH의 근성이니까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아자 아자, JH 화이팅!”

“화이팅!”

다들 기합이 바짝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우광연구소 사람들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정신인가?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도 부족하다고?”

“자청해서 일거리를 떠안겠다는데? 이게 말이 돼?”

“뭐 이런 업무에 미친 새끼들이 다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사무실 식구들도 불타오르는 눈으로 심 사장만 바라보았다.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는 심 사장의 눈 또한 비슷한 온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좋아! 그게 바로 JH의 근성이지!”

“예, 맞습니다!”

“그럼 우광연구소를 털러 가볼까?”

“예, 좋습니다!”

우광연구소의 최 소장이 기겁해서 외쳤다.

“우광연구소로 가 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왜죠?”

언뜻 광기가 비치는 눈으로 일제히 뒤를 돌아보는 JH 식구들.

우광연구소 연구원들은 흠칫했다.

“우광연구소의 핵심 연구 개발 기술은 그게 전부입니다. 거기 가 봐야 실패했거나 ‘사업성 없음’으로 폐기한 연구 자료들만 잔뜩일 겁니다.”

“그건 까봐야 아는 거고요.”

“저희들, 이래봬도 이 바닥의 전문갑니다!”

“혹시 또 알아요? 뒤지다가 뭐라도 건질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폐기된 자료들을 아무리 뒤져봐야 쓸 만한 기술 안 나옵니다. 그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미련한 짓이에요.”

“여기까지 온 마당에 까짓것 별수 있어요? 미련한 짓이라도 해야죠.”

사무실 식구들은 씩 웃었다.

“그게 우리 JH 정신이랍니다.”

“그럼, 그래야지!”

심 사장은 옷깃을 잡아당겨 팡팡 털었다.

바닥에 엎드리느라 생겼던 구김이 반듯하게 펴졌다.

“궁상을 떨어도 연구소를 불 싸지르며 떠는 게 낫지, 여기서 마냥 주저앉아 한탄해 봐야 없는 기술이 뚝딱 생길 것도 아니잖아?”

심 사장은 먼지가 들러붙은 무릎도 마저 털었다.

조 상무는 재빨리 심 사장에게 달라붙어 쥐어뜯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해줬다.

멀쩡한 행색으로 돌아온 심 사장이 결연하게 앞장섰다.

“가즈아.”

심 사장의 뒤를 조 상무가 따랐다.

사무실 옷걸이에 걸렸던 양복 재킷을 어깨에 턱 걸치면서.

그 뒤를 전(前) 태성건설 임원들이, 과외 선생들이, 우광 계열사의 엘리트 실무진들이 따랐다.

“까짓것 어떻게든 되겠죠.”

“맞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에요.”

“월급 받고, 회사 왔고, 숨 붙어 있으면 일해야죠.”

연구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제일 먼저 실험 가운을 벗어 던졌던 연구원이 외쳤다.

“오늘 20주년 결혼기념일이라면서요? 비행기 표도 미리 끊어놨다면서요?”

“이딴 걸 들고 가면 대통령은 이해 못 해도, 월급 통장 들고 가면 마누라는 이해해줘.”

“······.”

말이 안 통한다!

연구원은 다급히 사무실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한우정에 회식 간다면서요?”

“우리 도련님 손에 이딴 걸 들려 보내게 생겼는데, 지금 소고기가 목구멍에서 내려가겠습니까?”

“일을 더 한다고 돈이 더 나올 것도 아니잖습니까?”

“일을 더 하면 돈은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 단지 대통령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후엔 특별 상여금 대신 퇴직금이 나올 것 같아서 문제죠.”

“······.”

다들 맛이 갔다!

연구원은 당혹스러웠다.

지금껏 해외유학파 출신 박사 학위자들과, 혹은 실험실에서 지긋지긋하게 구르던 대학원생과 함께 연구하면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초유의 사태였다.

“연구소에 가 봤자 아무것도 못 건진다고 누누이 말했······!”

“그게 우광연구소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입니까?”

“······!”

심 사장의 반문에 연구원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심 사장은 연구원을 힐끔 일견하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왜 지금껏 우광연구소가 돈 먹는 하마 취급을 당했는지 알만 하군요.”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연구원들도 알고 있었다.

박사 월급과 투자금에 비해 나오는 실적은 코딱지라며 남들이 비웃고 있는 것을.

그랬기에 결국 적자투성이 연구소를 헐값에 넘겼다는 것을.

이미 자존심은 짓밟히고 자부심은 뭉개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연구에 매진해왔다고 떳떳하게 외칠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과학과 기술 개발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닦달하고 뒤진다고 없던 기술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우리가 몰래 빼돌린 것도 아니고! 연구소를 암만 뒤져도 네놈들이 바라는 기술이란 건······!”

“그만해라, 쪽팔려 죽겠다!”

최 소장이 버럭 외쳤다.

최 소장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우리도 연구소로 간다.”

“소장님!”

“연구동 실험실을 전부 뒤져서라도, 아이디어 수준에서 폐기된 아이템까지 전부 꺼내서 검토한다.”

“네에? 소장님도 아시잖습니까. 그래 봤자······!”

“닥쳐라! 지금 이 순간부터 연구원들은 전원 합심협력해서 저들을 돕는다! 그게 내 최우선 지시 사항이야!”

연구원들은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작정한 듯 저들을 돕지 않겠다 선언했던 최 소장이 아니던가.

그랬던 최 소장이 딱 잘라 말했다.

“모욕은 거기까지만 해.”

“소장님!”

“우리도 그동안 허투루 연구하지 않았어.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을 우리 스스로가 쓰레기 취급하지는 말아야지!”

연구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들? 대통령 앞에서 우광연구소 눈도장 찍겠다고 저 난리야.”

“······.”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어? 연구원 명찰 달기 부끄럽지 않나?”

“······.”

“우광연구소의 연구 자료를 보고 싶다잖아. 지금껏 우광에서 우리 연구를 거들떠나 봤어?”

“······.”

최 소장은 등을 돌렸다.

“떠날 사람은 떠나. 안 말려.”

“소장님······.”

“대화부터 해 보고 결정하기로 했지? 말 통하고, 인력 지원 충분하고, 똥군기 안 잡았고, 우리 업무에 저들 시간을 쏟았어. 이거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야!”

그러고 보니 저들이 지금껏 몇 시간이나 매달려 해온 일은 원래 그들의 일이었다.

연구원들은 새삼스럽게 사무실 식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전차 기술?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우리가 달라붙어서 매달리면 못 할 것도 없잖아?”

최 소장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빙글 돌렸다.

“두고 봐라. 내가 진짜 기깔나는 전차 기술을 꼭 뽑아내고 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최 소장의 등은 퍽 후련해 보였다.

“우리도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고!”

최 소장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두 눈은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빛났다.

스윽.

제일 먼저 실험 가운을 벗어 던졌던 연구원은 바닥에 나뒹구는 실험 가운을 주웠다.

먼지를 탁탁 털어 입고는 재빨리 뛰어갔다.

“소장님, 차 키 이리 주십시오. 연구소에서만 틀어박혀 살다 보니 장롱면허 다 됐다면서요?”

연구원들은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달려갔다.

“제가 자료 관리 담당이거든요? 얼른 출발합시다!”

“우리가 붙어서 도우면 서류 정리가 더 빨라질 테니, 조기퇴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연구동 실험실에서 맨날 새벽 퇴근하는 게 예산데요. 오늘은 신데렐라 해보죠!”

“우리도 끝나고 회식합시다! 한우정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컵라면은 진짜 지긋지긋합니다!”

* * *

JH투자회사 식구들이 벌써 출발한 줄 알았더니.

주차장에서 누군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최 소장은 의아해하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누가 왔는데 그래? 다들 망부석처럼 멀뚱히 서서······.”

사람들 한가운데엔 국민학교는 들어갔나 싶은 꼬마 도련님이 제 몸보다 더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심 사장님, 오늘이 20주년 결혼기념일이라면서요?”

“도련님?”

“조 상무님께 들었어요.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끊으셨다면서요. 그럼 여기서 이렇게 꾸물대면 안 되죠.”

꼬마 도련님은 심 사장에게 장미꽃다발을 떠안겼다.

“이건 사모님께 드리세요. 장미꽃을 좋아하신다면서요?”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딸기 케이크도 받으세요. 20주년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글자도 박아놨어요.”

“아, 이것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 상무님, 사장실에 가서 여행용 캐리어나 얼른 가지고 내려오세요. 차에 시동 걸어두고 기다릴게요.”

“예!”

조 상무는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갔다.

사무실 식구들이 재빨리 길을 터줬기에 홍해처럼 길이 갈라졌다.

꼬마 도련님은 생긋 웃었다.

“지금쯤이면 일 다 끝냈겠다 싶어서 왔는데.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아, 그게 말이죠······.”

“한우정에 예약해뒀어요. 소고기 풀코스로.”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특별 상여금. 약속대로 2배 챙겨 넣었어요.”

“헉,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심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갈 때였다.

“왜요? 연구 자료 탈탈 털어도 영 마뜩지가 않아서 그래요?”

“그, 그걸 어떻게······!”

조 상무가 헉헉대며 커다란 캐리어를 어깨에 짊어지고 달려왔다.

“그럼 뒤는 제게 맡기고 심 사장님은 얼른 공항에 가보세요. 제주도 가셔야죠.”

“도련님, 안 그래도 지금 막 우광연구소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아니죠.”

꼬마 도련님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핵심 연구 자료에서도 없던 답이 우광연구소를 뒤진다고 나오겠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방법이 없긴 왜 없어요? 그럴 줄 알고 연락해 뒀거든요.”

“연락? 어디에 말입니까?”

“부산이요.”

밀매왕이라고 들어보셨나 몰라?

부산 국제시장을 꽉 잡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 일본, 대만을 오가며 못 구하는 게 없다는 밀무역의 거물!

< 가즈아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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