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련님은 천재이십니다! >
뜬금없이 그 자리에서 결정된 부산행이건만.
최 소장은 즉시 심 사장의 것보다 큰 여행용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연구동 실험실에서 몇 날 며칠 꼬박 철야하기 일쑤라서요. 이 정도는 지갑처럼 챙기고 다녀야죠.”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 연구원의 삶!
그렇게 우리는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탔다.
사무실 식구들과 연구원들의 한우정 회식을 뒤로하고.
부르릉.
유종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가왕 조용팔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1976년 조용팔이 예전에 발표했던 곡을 빠른 템포로 편곡하고 가사 일부를 수정하여 독점 앨범에 실으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나랑 같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최 소장이 뜬금없이 물었다.
“저는 그렇다 치고, 도련님은 아직 어리신데 이렇게 훌쩍 부산으로 가도 됩니까?”
“하교했고, 차 있고, 지도 있고, 지갑도 빵빵한데,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안 되는 이유야 차고 넘치죠. 우선 부모님께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허락이요? 그런 걸 받았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 부산으로 가는 일은 없었겠죠?”
“······.”
“원래 일은 치고 보는 거예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여덟 살짜리 어린애에겐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더 쉬운 법이거든요.”
최 소장은 뜨억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설마 이거 무단가출이었습니까?”
“물론 통보는 해뒀죠.”
난 분명히 비서실에 전했다.
스승님께 배웠던 그대로.
-중요한 일로 잠깐 부산에 다녀온다고 전해 주세요!
-자, 잠깐만요······!
달칵.
전화는 언제나 용건만 간단히!
“그럼 학교는요? 설마 무단결석입니까?”
“에이, 선생님이랑은 이미 담판 짓고 얘기 끝난 일이에요.”
아까 하교하면서 확실하게 마무리했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결석 예고를······.
-그럼 무단결석으로 갈까요? 뒷수습할 자신은 있으시고요?
-······일단 왜 결석을 하려는지부터 물어봐도 됩니까?
-일 때문에 부산에 다녀와야 해서요.
-아, 그렇다면 딱히 어렵지 않겠군요. 원래 결석은 부모님께서 연락이 와야 처리가 가능합니다. 결석계가 어디 있더라······.
-부모님이 연락하실 거였다면 제가 지금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있지 않았겠죠?
-······.
-이해가 영 안 가시나 봐요? 자세한 설명은 청계산에서 마저 할까요?
-이해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학교 일은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일 보고 돌아오십시오!
최 소장은 끙 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무단외박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별수 없지.
전차 성능시험 참관까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남아서.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려면 무리수를 감수할 수밖에.
“일단 당일치기가 목표이긴 해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차 타고 부산까지 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더라······. ”
어쩔 수 없지.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수밖에.
나는 최 소장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결국 부산 출장이 얼마나 걸릴지, 이게 무단가출이 될지, 무단결석이 될지, 무단외박이 될지는 전부 다 최 소장님께 달린 일이라는 소리네요?”
“······.”
“탱크, 잘 골라야 하실 거예요.”
“······.”
나는 동전 지갑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탱크 밀수에 관해서 전적으로 최 소장이 책임진다는 각서였다.
“난 투자한 것 이상으로 회수하는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거물이 되었는데.
최 소장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철두철미하시군요.”
“대당 수천만 원짜리라잖아요.”
나는 씩 웃었다.
“이참에 JH연구소 실력이나 확인해 볼까요? 진짜 구제할 길 없는 돈 먹는 하마인지 아닌지.”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매의 눈으로 골라보겠습니다!”
최 소장은 눈에 불을 밝히며 꼼꼼하게 밀수 팜플랫을 읽기 시작했다.
그제야 겨우 잔소리에서 벗어나게 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 외곽의 논두렁 밭두렁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같은 경부고속도로인데, 21세기랑은 많이 다르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통량 많고, 단일 노선으로 총연장이 가장 긴 고속도로다.
대한민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국토의 대동맥이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고도 경제성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우리 태성건설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다던데.’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1968년 공사를 시작으로 총노선 길이 416km에 달하는 도로를 태성건설, 금조건설, 현무건설, 일성건설, 청월건설 등 굵직한 건설사들이 합작해 1970년 완공해냈다지?
‘아버지도 도로 건설에 참여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 * *
‘진짜 21세기랑 다르긴 다르구나!’
이딴 게 휴게소?
대충 놓인 나무 책걸상에 조악한 화장실!
상회라고 적힌 옛날 간판을 건 구멍가게 몇 개가 전부라니!
‘알감자가 없어? 구운 오징어나 핫도그, 핫바, 꽈배기, 떡꼬치, 소고기국밥마저 없을 줄이야.’
이럴 수가!
‘쌍화차도 안 파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 리도 없고!’
휴게소까지 와서 데운 두유에 막걸리 술떡이나 사먹고 있어야 하겠어?
휴게소에 왔으면 조금 더 특별하고 맛있는 걸 사먹고 싶은 게 인지상정!
바로 그때 최 소장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차 트렁크를 열었다.
“출출한데 여기서 컵라면이나 하나 까먹고 갈까요?”
최 소장의 여행용 캐리어에서 컵라면 무더기가 튀어나왔다.
기가 찼다.
“웬 컵라면이에요?”
“최근 우리 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있는 아이템이잖습니까.”
“아, 참 그랬죠. 컵라면 개발.”
우광연구소에서는 우광식품에서 요청한 컵라면 개발 연구를 추진하고 있었다.
컵라면은 1972년에 최초로 국내 시판하였는데, 소비자 마음을 잡는 데 실패해 곧 단종되었다.
이후 1981년 육개장 사발면의 판매 이후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컵라면 시장은 급성장했다.
한마디로 아직은 컵라면이 프로토 타입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큽······!”
이럴 수가!
딱 한 입 먹었는데, 컵라면에서 우리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더럽게 맛없다!
“면발은 설익은 것과 불어터진 게 공존하고, 감칠맛도 없는 주제에 맹맹하기까지 한 국물 하며, 용기는 더럽게 비싼 2중 플라스틱.”
나는 나무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이대로는 절대로 안 팔려요.”
이 시절엔 봉지라면에 비해 컵라면은 약 4배나 비쌌다.
편의성이란 장점 하나 보고 가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연구원들이 다각도로 연구하느라 골머리깨나 썩고 있지요.”
최 소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요 반년 동안 컵라면만 달고 살았다니까요? 우광식품이 1년 내에 신제품을 내놓으라고 하도 닦달하는 바람에 숙식도 연구동 실험실에서 해결하면서······.”
“지금 컵라면 연구에 매진할 때예요?”
나는 혀를 찼다.
“최소 두 달 동안은 전차 기술 연구에만 매달려야 한다니까요.”
“아, 그렇죠. 잘 알고 있습니다.”
최 소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죠. 그럴 겁니다.”
“그런 것치곤 차 타고 오는 내내 컵라면에 관해 수첩에 메모하시던데요?”
“죄송합니다. 대당 수천만 원짜리 탱크부터 골라야 하는데, 습관처럼 컵라면에 정신이 빠져서······. 못난 꼴을 보였군요.”
최 소장은 뻘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반년 동안 오직 컵라면에 매달려 살았더니 머릿속에 온통 컵라면 생각뿐인지라······.”
“그래서야 어디 제대로 전차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겠어요?”
“죄송합니다. 연구원들이 다 이렇습니다. 하나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까 이 생활도 견디고 그러는 거죠.”
문득 최 소장의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에 눈길이 닿았다.
캐리어에는 컵라면뿐만이 아니라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 세안도구 따위가 들어있었다.
어쩔 수 없지.
“만일 컵라면 문제만 대충 해결되면 전차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러라고 월급 받는 건데요.”
“월급 정도의 각오로는 안 돼요. 전 최 소장님과 연구원들이 전차 연구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임해서 온정신을 쏟길 바라거든요.”
나는 손가락을 쫙 폈다.
“흠, 일단 개선 방향을 다섯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겠네요.”
“네?”
“첫째, 용기는 비싼 2중 겹구조의 골판지 플라스틱 대신 스티로폼으로 바꿔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볼 것 없다.
왕년에 내가 많이 먹어본 컵라면을 기준으로 읊는 것뿐이니까.
초창기 컵라면은 대부분 스티로폼 용기였던 것 같은데.
최 소장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스티로폼! 제조 난이도도 훨씬 낮아지고, 제작 비용도 싸집니다. 그거 좋은 방안이로군요!”
“둘째, 면은 네모난 것 대신 동그랗게, 용기 중간에 걸리도록 띄워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물론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 따윈 모른다.
단지 여태껏 그렇게 생긴 컵라면을 먹어왔을 뿐이라서.
그런데 최 소장은 이번에도 경악성을 터뜨렸다.
“대류 현상! 뜨거운 물과 수증기가 위로 오르는 현상을 이용한다면 훨씬 빠르고 고르게 면을 익힐 수 있겠군요!”
난 그딴 거 모른다니까.
“셋째, 면을 지금보다 훨씬 얇게, 그리고 빨리 익도록 봉지면 대비 전분 비율을 높여요.”
“아, 그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분 만에 익는 면을 개발했지요.”
“그러니까 맛이 없죠. 구멍만 숭숭하고, 금방 불어터지데요.”
나는 혀를 찼다.
이론 따윈 모르지만 맛은 안다구?
“빨리 익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3분, 그게 딱 좋아요.”
어쨌든 컵라면 하면 3분인 게 학계 정설이니까.
최 소장은 재빨리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3분! 전분과 밀가루를 조합을 어떻게 바꿔보면 그럴싸한 작품이 나올 것 같기도?”
그 황금 비율을 찾아내는 게 당신들 일이겠지.
난 거기까진 모르겠고.
“넷째, 면발도 위로는 빽빽하게, 아래엔 듬성듬성 성글게.”
“······!”
컵라면 회사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만들더라고.
최 소장은 숨넘어갈 듯이 외쳤다.
“드디어 실마리가 풀렸다!”
최 소장은 먹던 컵라면도 내팽개치고 수첩을 꺼내 미친 듯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섯째, 스프 좀 개선해 봐요. 나트륨과 MSG 팍팍팍 몰라요? 물 온도가 100도도 안 되는데, 맹맹해서 도저히 못 먹겠잖아요.”
“······그레이트! 나트륨, 바로 그게 문제였어!”
최 소장은 벌떡 일어섰다.
수첩과 볼펜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은 천재이십니다!”
최 소장은 흥분해서 콧김을 뿜었다.
“지금껏 우리가 반년 동안이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아직 결과로는 안 나왔고요. 전 그냥 개선 방향만 짚어봤을 뿐이에요.”
“새삼스럽게도 지금껏 망망대해에 뜬 부표처럼 연구해왔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군요.”
최 소장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우광연구소 핵심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도 형편이 없다며 심 사장이 좌절했을 때, 사무실 사람들은 우광연구소를 뒤지겠다며 심 사장에게 딱 한 가지만 바라더군요.”
-심 사장님,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업무 방향성만 설정해주십시오!
-그럼 어떻게든 기한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때는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목표와 방향 설정! 지도자의 덕목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최 소장은 몹시 부담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존경심과 감탄이 흘러넘치는 눈이었다.
“해외유학파 박사들 100명보다 우리 도련님 한 분이 더 낫군요.”
아닐걸?
단지 해외유학파 박사들은 제대로 된 컵라면을 못 먹어봤고, 나는 편의점 컵라면을 질릴 만큼 먹어봤을 뿐이다.
“도련님, 전차 기술 개발 연구도 목표와 방향만 제대로 설정해주십시오!”
최 소장은 열의에 차서 외쳤다.
“그럼 우리 연구원들도 JH의 근성으로 어떻게든 기한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럼 됐지.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이번 국산 전차 성능 시험 때 전국에서 군 장성들이 몰려든댔지?’
나는 씩 웃었다.
‘이걸 군용 식품, 혹은 전투 식량으로 들이밀어봐?’
이왕 방산에 뛰어들기로 한 거, 군 장성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으면 좋잖아.
< 도련님은 천재이십니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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