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권력의 힘 (1) >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통령이 보내서 왔다고? 너 같은 꼬맹이를?”
나는 설명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이 카드는 모 아니면 도지.’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못 이룰 게 없다는 시절이었다.
‘바로 납작 엎드려서 뒷배에 빌붙어 제 욕심을 채우려 들거나.’
음지의 야심가라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권력에 기생하려 들기 마련이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린 후 시치미를 떼거나.’
음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겐 사람 하나 증발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이왕이면 의심 많고, 수완 좋은 미꾸라지파였으면 좋겠군.’
그런 사람은 보통 적이 많거든.
적이 많은데도 이 자리를 오래 지키고 버텨냈다는 건 그만한 능력이 된단 소리다.
‘기생충이라면 이참에 박멸하는 게 낫겠고.’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게 굴거든.
공권력에 들러붙기 위해선 한두 푼 바쳐야 할까.
그럼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겠어.
어렵게 사업을 벌이느니 없는 사람들 고혈을 쥐어짜는 게 훨씬 쉽고 빠른 법.
내가 남산 찰거머리를 혐오하던 이유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연락도 넣어놨겠다, 그럼 슬슬 흥정 들어가서 가격이나 팍팍 깎아 볼까?’
내가 태성그룹 경호원들을 마다하고 달랑 유종태와 최 소장만 대동하고 내려온 까닭이었다.
태성의 이름으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말죽거리 말대가리를 보내 밀수 예약을 잡은 이유이기도 하고.
“대통령이란 말만 꺼내면 다들 벌벌 떨 줄 아나 본데, 사람 잘못 봤다.”
아니나 다를까.
웃음기를 싹 지운 남자는 살벌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달랑 둘만 대동해서, 굳이 도박판에서 딴 명패로 밀수 예약을 잡아 놓고는, 뭐? 대통령의 명이라고? 우습지도 않지.”
빙고!
배짱도 좋고, 의심도 많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가는구만!
거래 상대로 딱 좋다!
“꼬맹아, 헛소리는 거기까지만 해라.”
“헛소리라니요? 가는귀먹으셨나 봐요?”
“······.”
“노안도 오신 것 같죠?”
나는 초대장을 흔들었다.
“여기 버젓이 청와대 마크가 찍혀 있는데요. 설명이 더 필요해요?”
“그까짓 것, 국제시장 뒷골목에만 들어가도 감쪽같이 만들어내는 놈이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까지 우기고 싶다면 더는 할 말 없고요.”
“우겨? 내가?”
“보세요. 여기 국산 전차 성능 시험이 열리는 날짜, 장소, 행사 식순.”
나는 초대장을 펼쳐 중요 내용을 손끝으로 탁탁 짚었다.
“이런 극비 정보를 민간인이 쉽게 뒤로 빼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
“전국의 군 장성을 한자리에 불러들이는 행사예요. 일정이 노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 같아요?”
70년대에는 무장 공비가 침투해 소란을 피워댔고, 대통령 암살을 모색하기도 했다.
거기에 군 장성들까지 한자리에 모인다는 정보가 흘러들어간다면?
“테러당하기 딱 좋겠죠?”
아마 중요 요인들을 한꺼번에 죽인답시고 눈이 뒤집혀서는 부나방처럼 달려들고 보지 않을까?
“흠, 언론사나 방송국에서 나온 건 아니고?”
“알만한 선수끼리 왜 자꾸 어설프게 떠봐요? 언론사와 방송국에는 행사 당일 혹은 전날 늦게 연락 들어가는 거 뻔히 알면서.”
안보와 경호도 중요하지만, 대대적으로 홍보할 기자단도 필요하긴 하니까.
‘자력강생이란 기치 아래 대통령이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서 야심 차게 준비한 국산 전차 프로젝트다.’
그 성능을 만천하에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겠지.
대한민국 국방 기술 수준이 이 정도라며 보란 듯이 과시하고 싶을 것이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남자가 고개를 꺾으며 날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하고.”
“손님.”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대통령은 국산 전차 성능 시험에 사활을 걸고 있고, 마침 그쪽은 괜찮은 전차를 갖고 있고, 나는 그것을 사러 왔어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나는 생긋 웃었다.
“긴말 더 필요해요?”
“필요하지. 이쪽은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해한다.
음지의 사람들에게 공권력은 대재앙이나 다름없으니까.
신중히 간을 보고 싶겠지.
“좋게 말할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마지막 기회다. 어디서 나왔어?”
이쪽을 가늠하는 남자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차가운 눈이었다.
“경찰일 리는 없을 테고. 중정이야, 검찰이야?”
남자가 이를 드러내자, 방수 앞치마와 장화를 신은 남자들이 슬금슬금 모여든다.
들고 있는 회칼과 손도끼는 숨기지도 않겠다는 듯 서슬이 퍼렇다.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중국 공안이나 북한 쪽 인사는 아니겠지?”
“손님에게 호구 조사가 웬 말이에요? 밀수 판매 참 X같이 하시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뒷배 밝힌 지가 언젠데, 뭘 또 물어요? 치매 오셨어요?”
나는 청와대 마크가 찍힌 초대장을 한 번 더 흔들었다.
남자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럼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말을 나더러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믿고 말고는 내 몫이 아니고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너 같은 꼬맹이를 골라 보내?”
“뭐, 불신의 뒷감당은 그쪽 몫이 맞고요.”
남자는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관자놀이까지 깊게 패인 칼자국 흉터가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서 협박이야?”
“매너가 X 같으니 별수 있어요? 대당 수천만 원짜리 거래하러 온 손님을 길바닥에 세워놓는데요.”
콰당탕.
젊은 남자가 수돗물을 받아놓았던 고무 대야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찬 후, 대뜸 나무 도마에 꽂힌 회칼을 뽑아 들었다.
“이 건방진 애새끼가······!”
“그만.”
남자는 손을 들었다.
“형님!”
“쯧. 성질 하고는. 네가 낄 판이 아니야. 빠져 있어.”
“지금 이렇게 같잖은 실랑이를 할 때가 아닙니다!”
“알고 있다.”
“형님, 아직 청소도 다 못 끝냈습니다!”
“그럼 청소나 마저 하고 있든가. 손님 앞에서 못난 꼴은 보이지 말아야지.”
남자는 회칼을 빼앗아 고등어를 다듬던 나무 도마에 탁 꽂았다.
새파랗게 날이 선 칼 두 개가 나란히 나무 도마에 꽂혔다.
최 소장은 흠칫해서 내 뒤로 숨었고, 유종태는 휘파람을 불었다.
“용병 생활을 오래 하셨나 봅니다? 이스라엘 실전무술이군요.”
“눈썰미가 제법이군. 말귀도 제법일까는 모르겠지만.”
“안 들립니다. 흥정은 제가 아니라 우리 도련님과 하셔야죠.”
유종태는 언제든지 뛰어들 수 있도록 내 곁에 사선으로 붙어 섰다.
남자는 유종태를 일견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당 일억.”
누굴 호구로 아나!
“물건값에 운송비에 수고비 추가, 위험수당 추가, 판공비 추가, 보관비 추가, 통관비 추가.”
잠깐.
웨이러 미닛!
“밀수 주제에 통관비가 웬 말이에요?”
밀수가 왜 밀수인가.
적법한 통관 절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몰래 들여와 팔아서 밀수다!
“가격은 원래 파는 놈이 붙이기 나름이다. 배알 꼬이는 것 같은데, 여기에 부가가치세까지 얹어볼까?”
이 새끼, 혹시 내가 세금이라면 치를 떠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냐?
“왜? 가격, 조건이 영 안 맞아? 그럼 안 사면 돼. 돌아가든가 말든가 좋을 대로.”
이렇게 나오시겠다?
“왜? 또 대통령 들먹이면서 협박하려고? 아서라. 그딴 건 나 같은 사람한텐 무섭지도 않아.”
남자는 씩 웃었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잠깐 튀면 그만이거든. 나 원양어업도 하는 사람이야.”
깜빡했군.
원양어업이 있었네?
“전차를 못 구하면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꼬맹이 너지. 당장 두 달 뒤를 준비하려면 시간 빠듯할 텐데?”
“좋아요. 대당 일억.”
“도련님!”
유종태와 최 소장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특히 최 소장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우읍!”
모터 달린 것처럼 다다다다 적정 가격 산출 근거를 쏘아내려던 모양인데.
눈치 빠른 경호원이자 내 수족인 유종태가 그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대당 일억 받고. 대신 능력껏 깎아 볼게요.”
“해 봐. 그게 될까는 모르겠다만.”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말했잖아. 가격, 조건 안 맞으면 안 팔면 그만이라고.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누가 아쉬워질지는.”
내 장담하지.
그건 아마도 내가 아닌 당신일 거야.
“꼬맹아, 넌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거냐?”
“공권력의 힘이요.”
“허······!”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들이닥칠 때가 된 것 같죠?”
“너······!”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운 거 아니었어요? 왜 또 의뭉이에요?”
가만히 보면 이거 아주 습관적이라니까?
“이 야밤에 고등어까지 부어가면서 요란하게 청소할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야심한 시각이다.
통금이 코앞인데, 온몸에 비린내를 묻혀 가며 고등어 궤짝을 꺼내 부어?
피칠갑한 바닥이라면 청소용 솔로 박박 닦아내는 게 훨씬 쉽고 간단한데?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그것까진 내가 알 필요 없는, 저쪽 사정이고.
“됐고. 본인 똥은 스스로 닦죠.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전 안에서 차나 한잔 마시고 있겠어요.”
“흐음, 후회할 텐데. 안쪽은 아직 청소가······.”
“그놈의 의뭉, 작작 좀 떨어요. 창고가 여기 하나뿐인 것도 아니잖아요? 누굴 X도 모르는 애송이로 아시나.”
나는 혀를 찼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고등어 선단이라더니, 그동안 경영 참 소박하게 하셨나 봐요?”
“하하하!”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부터 머리 팽팽 돌아가는 거 하며, 두둑한 배짱과 끝내주는 말주변까지. 이거 진짜 제대로 걸물이라니까?”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꼬맹아, 너 내 밑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으련? 책임지고 크게 키워주마.”
남자의 제안에 뒤에 서있던 고등어 수산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경악한 표정을 짓는지 몰라도.
나로서는 그저 콧방귀가 나올 뿐이었다.
“반대로 제안하죠.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어요? 열심히 굴려서 지금보다 크게 키워드릴게요.”
“뭐?”
“업계 최고 대우를 약속할게요. 공권력과 칼부림에 쫓길 일 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안락한 노후 생활! 어때요?”
못 구하는 물건이 없는 대한민국 밀수계의 거물!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음지에서 이런 실력을 썩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왠지 이 남자라면 태성그룹의 해외 유통을 시원하게 뚫어줄 것도 같은데.
“그럼 기다리고 있겠어요.”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뭐 이런 꼬맹이가 다 있지?”
“15분 드릴게요. 충분하죠?”
“차고 넘치지.”
남자는 씩 웃었다.
“통 크고, 손 크고, 간뎅이만 큰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리는 그림까지 크신 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곰치야.”
“예, 형님.”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못생긴 사내였다.
“손님 안으로 들어가신댄다. 살뜰하게 모시도록.”
“예, 형님.”
“험한 꼴 안 보시게 제일 안쪽 창고로 안내해.”
* * *
냉동 창고를 지나, 건어물 창고를 지나, 가장 깊은 안쪽 창고에 들어섰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적재 창고 쪽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곰치란 남자가 차갑게 경고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뒈지고 싶지 않으면.”
왜애애앵.
아까부터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알아서 기어. 상어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끼이익. 철컥!
곰치란 남자가 밖으로 나가더니 창고 문을 걸어 잠갔다.
유종태는 소리 없이 움직여서 창고 벽에 귀를 바싹 붙였다.
“도련님, 사이렌 소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응, 그러라고 불렀다니까.
“진짜 이대로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예? 도련님의 명으로 중정부장한테 전화를 넣은 게 바로 저였습니다만?”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중정부장에게 받아뒀던 세 가지 약속 중 하나를 깠다!
-부산에 위치한 고등어 수산 창고를 제대로 탈탈 털어주십시오.
-이유는?
-두 달 후에 있을 국산 전차 성능 시험에 태성이 준비한 국산 전차를 선보여드려야죠.
-호오.
중정부장은 큰 흥미를 보였다.
태성의 브레인에게 전하라며 내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귀띔해 준 게 바로 그였다.
국내외 극비 정보를 손안에 휘두르고 있는 중정부장.
그의 가장 강력한 권력 투쟁 상대 중 한 명은 군내 사조직을 거느린, 군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육군보안사령관이었다.
-육군 산하의 방위산업 연구소에서 개발하고 있는 국산 전차보다 훨씬 더 월등한 성능의 전차로 보답하겠습니다.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물론 이 공은 중정부장님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하하, 그거 좋지! 중정 부산지부, 부산검찰청, 부산경찰청이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내친김에 부산항에서 인천항까지의 관문도 뚫어주시겠죠?
-세관과 항만에도 전화 넣어두지.
유종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밀매왕은 이 상황, 감당 못 할 겁니다. 절대로.”
응, 그러라고 미리 중정에 전화 넣었다니까?
내 장담컨대 경찰차 몇 대 출동해 적당히 봉투 찔러 넣고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걸?
공권력으로 인한 대재앙이라고 들어는 보셨나 몰라?
“애국하는 마음으로 대당 수천만 원짜리 탱크를 세 대씩이나 사들여 국가 안보에 헌신하겠다는데, 이대로 억울하게 호구 잡힐 수는 없잖아요?”
나는 씩 웃었다.
“이참에 한번 제대로, 능력껏, 왕창, 후려쳐 깎아볼게요.”
< 공권력의 힘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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