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권력의 힘 (2) >
“흐아아암······.”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자정이 다 되어가는 깊은 밤이라 그런지.
최 소장은 늘어지게 하품했다.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벅벅벅 비비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종일 커피를 안 마셔줬더니만······ 크흠!”
조잡한 변명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오는 내내 커피를 마시지 못했잖습니까.”
휴게소에서 컵라면이나 끓여먹는 바람에.
나도 휴게소에 내린 김에 쌍화차나 한잔 마실까 했더만, 다방이 안 보여서 포기하지 않았던가.
커피자판기가 일본에서 수입된 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라, 밖에서 커피를 간편하게 즐기기 어려웠다.
“실험실 좀비도 일으킨다는 카페인의 힘!”
최 소장은 멋쩍게 웃었다.
“실험실에서 굴러다니는 놈이라면 모름지기 이걸 중간중간 주기적으로 공급해줘야 하는 법 아닙니까. ‘디스 이즈 도핑 타임!’인 것입지요. 네네.”
우리 사무실 식구들의 혈관에는 보약이 흐를 텐데.
연구소 사람들의 혈관에는 카페인이 흐르는 모양이다.
“진즉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예?”
“가시죠. 차 한잔하러.”
“예?”
아니, 눈을 왜 그렇게 뜨시나.
최 소장은 몰라도 유종태까지 눈이 동그래질 줄은 몰랐다.
“도련님, 제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어딜 가겠다고 하신 거 아니죠?”
응, 그럼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우리 지금 창고에 갇혀 있는데요?”
응, 안다니까.
“지금 밖은 도떼기시장 그 자체일 거란 말이죠? 사이렌 소리 요란한 거 들으셨죠?”
응, 그래서 지금 나가자는 거야.
최 소장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아까 그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눈 부라리는 거 못 보셨어요? 우리 딱 15분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공권력의 대재앙이 X으로 보이시나.”
나는 콧방귀를 꼈다.
“이대로 같이 엮여서 삼도천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얌전하게 거기서 기다리고 계시든가요.”
벌떡.
눈치 빠른 경호원 유종태가 일어섰다.
“도련님, 전 설탕 커피 좋아합니다!”
최 소장은 멀뚱하게 눈을 껌뻑거리고 있거나 말거나.
“도련님께선 역시 쌍화차죠? 계란 두 개 동동 띄워서. 가시죠!”
쾅!
유종태가 대뜸 창고 문을 뻥 찼다.
뒤로 크게 물러나서 이번엔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철컥철컥!
힘주어 문고리를 돌려보지만 어림도 없다.
“단단히 잠긴 것 같군요. 게다가 강철판도 제법 두껍습니다. 이거 곤란하게 됐는데요?”
“실험실에 자주 갇혀봐서 잘 압니다. 이런 구조는 밖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 도련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보면 몰라요? 문 따잖아요.”
난 동전 지갑에서 철사와 실핀 세트를 꺼내 작업에 들어갔다.
절그럭, 절그럭.
“아니,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어디서 구하긴.
한남동 자택 지하실 금고를 딸 때 쓰던 걸 챙겨왔지.
‘역시 이 시대의 자물쇠는 조악하기 짝이 없구만. 내가 소싯적에 이걸로 용돈깨나 벌었다니까?’
전당포에서 일하다 보면 잠겨 있는 물건을 따는 건 일도 아니다.
덕분에 요령이 생겨 못 따는 게 없었다.
금고도 따고, 문도 따고, 병뚜껑도 따고······ 됐다!
“어째 예전보다 더 빨라진 것 같습니다? 역시 우리 도련님!”
“아니, 무슨 여덟 살짜리 꼬마 도련님이······!”
“허, 모르면 말을 하질 마십쇼! 우리 도련님은 원래 문도 잘 따시고, 병도 잘 따시고, 계약도 잘 따십니다만?”
왜애애애앵!
창고 밖에서 들으니까 사이렌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유종태가 민첩하게 주변을 탐색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보초병 하나 남겨두지 않다니요?”
“지금 밖에선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이했을 거예요. 정신없는 게 당연하죠.”
우리는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이러다가 칼부림 나는 거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카, 칼부림이라니요? 무슨 그리 무서운 소리를······!”
“누가 연구소의 화초 샌님 아니랄까 봐 순진하시기는.”
“상대는 경찰이란 말입니다!”
나는 혀를 찼다.
“상대가 어디 경찰뿐이겠어요? 중정 부산지부와 내무부 산하의 해양경찰대, 부산검찰청까지 총동원됐을걸요?”
“네에엑?”
나는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봐요. 멀리서 봐도 바글바글하죠?”
“어헉!”
어림잡아도 수백 명.
그것도 각기 다른 제복을 차려입고, 무장을 완료한 병력이었다.
사이렌 소리 사이에 확성기 소리가 섞였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려라!”
“손 들고 바닥에 엎드려!”
억울한 듯 항변하는 외침도 터져나왔다.
하지만 쾅! 하고 쏘아진 공포탄 소리와 함께 척척척, 무장한 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유종태는 창고 외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이거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데요?”
동감이다.
하지만 최 소장만큼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얼굴이 확 펴지면서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입니다! 경찰이 총출동했으니, 이제 우리는 안전해진 거겠죠?”
······그냥 여기에 버리고 갈까?
“경찰이 왜 출동했겠습니까? 바로 우리 같은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밀수하러 왔다가 현장검거 당하게 생겼는데요?”
“······어?”
이 눈새를 어쩌면 좋냐?
“도련님, 우리는 아직 계약서는 물론 밀수 전차를 본 적도 없고······!”
“이 야밤에 여덟 살짜리 어린애를 대동하고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창고에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다고 말하려고요?”
“······고등어 사러?”
그걸 믿겠냐?
“칼부림이라잖아요. 유치장에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태성그룹 쪽에서 안전하게 빼주지 않을까요? 재벌 3세라면서요?”
최 소장은 덜덜 떨었다.
“아까 쏜 거 공포탄 맞죠? 여기 있다가 진짜 실탄에 맞으면 어쩌려고요?”
최 소장은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우린 아직 밀수품도 못 봤고, 계약서도 안 썼고, 돈도 안 줬으니까, 딱히 밀수를 한 것도 없고, 저쪽이랑 한패도 아니잖아요.”
“이대로 유치장에 갇힌다면 최 소장님의 죄목은 재벌3세 유괴 혹은 납치쯤 되지 않을까요?”
“네엑?”
“거기에 방화, 마약 유통이란 죄목까지 추가될 것 같은데요?”
“네에에엑?”
최 소장은 억울한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밀수라면 몰라도, 방화와 마약은 진짜 아니거든요! 저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응, 알지. 더러운 누명이라는 거.
밀매왕은 밀수는 해도 마약은 취급 안 한다.
“최 소장님, 이 야밤에 적재창고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이유, 뭘 것 같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래도 마약은 아니겠죠!”
“마약, 맞을걸요?”
돌아가는 분위기상 저기 드럼통에 들어있는 놈들은 아마 그런 밀매왕의 철칙을 위반했기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다.
“네엑?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눈치 빠른 경호원 유종태도 혀를 찼다.
“아무리 연구소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매진한다지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너무 어두운 거 아닙니까?”
“······?”
“힌트. 몇 달 전 전국구 거물이 부산에서 잡혔습니다. 그게 누굴까요?”
“마약왕!”
빙고!
밀매왕과 노선을 달리하던 굵직한 거물 마약왕이 부산지검과 경찰 마약감식반의 공조 수사에 의해 소탕되었다.
조직이 와해되고 일망타진당했다.
그에 따라 부산 바닥이 발칵 뒤집혔다.
“마약왕의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조폭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연장을 들고 참전하는 바람에 부산 전역에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약왕이 체포되기 직전에 엽총을 난사하여 무장한 경찰들에게 크게 저항했어요. 그 바람에 경찰 쪽 피해도 아주 컸다면서요?”
“예, 덕분에 그 이후 부산 지역 경찰의 진압 수위도 높아졌습니다.”
최근 부산 지역 분위기가 몹시 흉흉해졌다는 소리다.
어느 정도냐고 말할 것 같으면, 밀매왕이 이 야밤에 눈 가리고 아웅 하겠다고 고등어 궤짝을 쏟아부어가며 은폐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왜애애애앵!
사이렌은 일종의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
-경찰이 출동하고 있다! 안 튀면 너희들은 X 된다!
-시민들이고 범죄자들이고 간에 상관하지 않으니 알아서 몸 사려라!
최 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치미는 불안감을 감춰보려고 애써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화까진 너무 가신 거 아닐까요? 쌓아놓은 물건들도 제법 많아 보이던데요.”
“이놈들은 물건값에 운송비, 수고비, 위험수당, 판공비, 보관비, 통관비까지 추가해서 받아먹는 놈들이에요.”
“그게 방화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가격은 파는 놈이 붙이기 나름이라잖아요.”
“······?”
“창고를 홀랑 태워먹은 후에는 화재보험비까지 얹어서 가격을 부를 거란 소리죠.”
“어억······!”
최 소장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것만큼은 못 참습니다! 아무리 시장통 바가지라지만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단단히 하나하나 따져······ 웁!”
눈치 빠른 경호원 유종태가 최 소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종태는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휘발유 냄새가 상당히 진합니다.”
“청소가 다 안 끝났다고 했잖아요. 매수에 실패한 데다 출항까지 못 했을 때를 대비해야죠.”
최 소장은 흠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적재 창고에는 시멘트로 채워넣은 드럼통이 몇 개나 쌓여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지게차로 실어 날라야 할 정도는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창고에서 선박까지 지게차 나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죠.”
“그럼 더욱 서둘러야겠군요.”
역시 유종태!
난 눈치 빠른 남자가 좋더라!
여전히 눈만 꿈뻑거리는 최 소장과는 다르다니까?
“공권력 매수에 실패하면 차선책으로 증거인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서, 설마······!”
“장물이 나와도 밀수는 잡아뗄 수 있지만, 시체가 나온 이상 살인은 잡아떼기 어려운 법이거든요.”
최 소장이 핼쑥해졌다.
“불에 타죽고 싶지 않으면 뛰어야 할 걸요?”
타다다닥!
최 소장은 허겁지겁 튀었다.
우리는 사람들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곳, 고등어 수산 창고를 한참 지나 세워진 자동차로 향했다.
화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적재창고 쪽에서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다.
이 늦은 밤에 붉은 화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게 멀리서도 보일 만큼.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불이다!”
“소방차 불러!”
“이 새끼들이 어딜 튀려고!”
“잡아! 한 놈도 놓치면 안 돼!”
아수라장이 멀리 있지 않았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갔다.
부르릉.
우리는 그 아수라장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항구도 안쪽만큼이나 빽빽하게 봉쇄된 후였다.
“스탑. 네놈들은 뭐야? 저 새끼들이랑 한패야?”
젊은 중정요원이 길을 막았다.
유종태는 운전대를 꽉 잡았다.
최 소장은 재빨리 들고 있던 밀수용 전차 팜플랫을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았다.
“수상한데? 왜 대답을 못 해? 전원 내려!”
나는 동전 지갑을 뒤져서 곱게 접힌 황금빛 종이를 꺼냈다.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수동 레버를 돌려서 자동차 창문을 열었다.
황금빛 종이를 슬쩍 건넸다.
중정요원은 인상을 팍 쓰면서 종이를 낚아챘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수작······ 어허헉!”
중정요원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황금빛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달달 떨렸다.
“대, 대통령 각하의 친서가 왜 여기에······!”
처음 꺼내 보는 종이 마패였다.
“대통령님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왔어요. 중정부장님께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중정요원은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경례를 올려붙였다.
“중정부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호텔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건 됐어요. 대신 다른 걸 부탁하고 싶은데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약속대로 저쪽을 제대로 탈탈탈!”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밑바닥까지 탈탈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중정부장께서 최선을 다해 협조하라 지시하신 일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대답!
“수완 좋고 인맥 넓고 능력 있는 자예요.”
“뒷배를 봐주는 인맥을 털어볼까요? 숨겨놓은 자금줄을 털어올까요?”
척하면 척!
부산지부에 두기 아까울 정도로 말이 잘 통하는 자였다.
“둘 다. 가능하겠어요?”
“물론입니다. 일망타진을 원하십니까? 밀수 조직만 도려내듯 파헤칠까요?”
워딩이 어째 마음에 쏙 든다니까?
“그거야 능력껏, 알아서, 편할 대로, 좋을 대로 하세요. 내가 원하는 결과만 확실하게 챙겨준다면.”
“그럼 나머지 사항은 월권을 묵인해주겠다는 뜻이군요. 감사합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리 하며 시원시원한 대답까지!
마음에 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중정요원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열흘 내에. 가능하겠어요?”
“기한 맞추려면 바쁘게 뛰어다녀야겠군요.”
나는 밀매왕에게 배달 완료까지 보름이란 기한을 내걸었다.
제주도에 숨겨놓은 전차 세 대를 꺼내 인천항까지 옮기는 데 그만한 시일이 필요할 리 없지 않은가.
공권력에 사정없이 처맞는 시간까지 포함이거든.
중정요원은 지갑을 뒤져 명함을 내밀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국 요원 한명호입니다.”
한명호?
설마 내가 아는 그 한명호?
‘해운왕의 칼잡이!’
내가 한때 눈독 들였던 남자였다.
탐나는 인재였던지라.
그런데도 몰라봤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 공권력의 힘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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